고궁 산책 ②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창경궁(昌慶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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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을 나와 남대문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창경궁 야간 개장 시간 7시에 맞추어 홍화문(弘化門) 앞에 닿았다. 뉴스로 고궁의 야간 개장 소식을 듣긴 했지만, 고궁을 밤에 찾게 되니 은근히 그 밤 풍경이 자못 기대됐다.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를 준비했지만, 어두워지면 감도(ISO)를 높여서 찍으려고 플래시는 가져오지 않았다.
창경궁은 조선 왕조 9대 임금 성종이 1483년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고려의 남경 이궁(離宮:예전에, 임금이 궁중 밖으로 나들이할 때 머무는 곳을 이르던 말)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세운 수강궁(壽康宮)으로 출발했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중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의 역사적 변천과 일제의 훼손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후 창덕궁이 정궁(正宮) 역할을 하면서 이궁(離宮)으로서 자주 활용되었다. 창경궁의 전각은 영건(營建 : 건물을 지음), 화재, 훼손 등으로 인하여 변화하였다. 성종이 수강궁을 확장할 때 지은 전각들은 임진왜란(1592)과 이괄의 난(1624), 순조 30년 대화재(1830) 등으로 소실과 중수를 거듭했다.
그러나 창경궁의 훼손과 변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강점기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園)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일제는 1907년 창경궁에 벚나무를 심고 1911년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1911년엔 ‘궁(宮)’을 ‘원(苑)’으로 격하시키고, 일본의 벚꽃놀이 풍습을 들여왔다. ‘창경원 야앵(夜櫻ㆍ밤 벚꽃놀이)’이라는 이름의 일본식 봄꽃놀이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게 1924년이다.[관련 글 : 벚꽃과 ‘사쿠라’]
창경원 야앵은 단순히 밤 벚꽃놀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휘황찬란한 오색 전등 아래 아악과 양악이 연주되고 기생들의 검무와 노래가 어우러지는가 하면 영화가 상영되고 ‘라디오 공개 무대’가 펼쳐지기도 하는 등 종합 유흥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식민지에 일본식 문화를 이식함으로써 맞춤한 이국정서에 식민지 백성들의 불만과 상실감을 적당히 위무해 준 일종의 당근이었을지 모른다. 일제는 흥청거리는 밤 벚꽃놀이를 즐기면서 사람들은 ‘일본식 근대’를 섭렵하고 망국의 설움 따위는 잊어버리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해방 뒤에도 이 벚꽃놀이는 이어졌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이 일본식 유흥에 기꺼이 동참한 덕분에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서울의 최대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60여 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창경궁 복원공사가 이뤄지면서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1984년에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고자 한 것도 왕조의 궁궐에 드리운 식민지 역사의 청산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는지.
동향의 창경궁이 품은 풍부한 이야기들
창경궁은 통치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져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할뿐더러 건축이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어서다.
또 창경궁은 남향인 여느 궁궐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졌다.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 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의 궁궐은 나라를 다스리는 법전(法殿)까지 문이 세 개지만, 창경궁은 궁궐이 들어선 자리가 좁아서 홍화문에서 법전까지 문이 두 개뿐이다.
왕실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와서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특색의 일부다.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일어나 현장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고, 임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했고, 현재의 건물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동향인 흥화문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창경궁의 보물 7점 가운데 하나다.
홍화문은 1750년에 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었고, 1795년에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이곳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직접 쌀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궁궐인데도 이 문을 통하여 백성들과 간접적으로나마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창경궁의 전각들, 국보와 보물
홍화문으로 들어 보물로 지정된 명정문(明政門)과 행각(行閣:궁궐, 절 따위의 정당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을 지나면 창경궁의 법전 명정전(明政殿)이다. 명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에 재건해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국보다. 명정전에서는 가끔 과거시험이 열리기도 하고, 중종 대에는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 궁궐의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 잔치 등이 열렸다고 한다.
명정전 뒤편, 정치 공간인 외전과 생활 공간인 내전을 구분하는 문인 빈양문(賓陽門) 왼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전을 경연하던 숭문당(崇文堂)이 있다. 숭문당은 ‘학문을 드높인다’라는 의미로 임금은 이곳에서 성균관 유학생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고 한다.
숭문당 뒤편의 후원으로 나서면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세운 정자 함인정(涵仁亭)이 넓은 뜰을 거느리고 서 있다. 임금이 즐겨 사용하던 공간으로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을 만나고, 신하들과 중용·심경과 같은 고전을 읽으며 경연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의 함인정은 사방이 트여 있지만, 19세기 초 궁궐 그림인 동궐도에서는 함인정의 삼면이 막혀 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경춘전과 사도세자의 환경전
함인정 왼쪽의 동향 전각은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와 왕비가 머물던 경춘전(景春殿)이다. 맨 처음엔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가 살았었고, 그 이후에도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가 살았다. 경춘전은 정조(1752~1800)가 태어난 곳인데, 사도세자(1735~1762)는 대리청정을 펼친 지 3년이 된 해, 용이 내려오는 태몽을 꿨다고 전해진다.
경춘전과 기역 자를 이룬, 남향의 전각은 임금이 창경궁에 오면 침전이나 편전으로 사용한 환경전(歡慶殿)이다. 1749년 영조(1694~1776)는 환경전에서 영민하고 무예에도 출중했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15세에 어린 나이였던 사도세자는 명을 거둬달라고 하소연하였으나, 영조는 엄격한 제왕 훈련을 시작하였다.
영조는 대리청정으로 자신은 정무와 약간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왕권을 높이고, 또 세자에게도 정치실습을 통해 탕평의 원리를 익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수장(영조)과 차기 수장(사도세자) 간에 갈등으로 빚어진 참극으로 이어졌다.
창경궁에서 연출된 왕실 가족사는 그것이 비록 권력 다툼이라고 할지라도 피붙이 간의 애잔함이 그 기저에 깔려 있음을 부장할 수 없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가 권력 다툼을 벌였을지라도 세손 정조의 안위를 위해 아들을 포기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1696~1764)의 모성애는 돌아보이기 때문이다. 세자빈 혜경궁 홍씨(1735~1816)가 쓴 <한중록>에 담긴 것도 다르지 않다.
또 중종은 환경전에서 탁월한 의술을 지닌 대장금의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대장금은 대비전과 중궁전에서도 진료하였고, 그 공로로 상을 받았다. (의녀 대장금은 중종 28년과 39년에 각각 쌀과 콩 15석과 5석을 받았다)
환경전 뒤쪽에 나란히 선 남향 전각이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이다. 오른쪽의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항복한 인조가 돌아와 머문 곳이다. 인조는 병이 깊어져 양화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거나 정사를 돌보았다.
내전의 으뜸 건물인 통명전과 항복한 인조가 머문 양화당
왼쪽의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이면서 동시에 내외명부(內外命婦:여성을 대상으로 품계에 따라 벼슬과 작위를 주는 곳)를 다스리는 업무를 보던 내전의 으뜸 건물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으나, 임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연회 장소로도 사용한 통명전의 규모는 앞면 7칸, 옆면 4칸의 팔작집인데,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정원을 꾸며놓았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고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어 보물로 지정돼 있다.
통명전이 우리 여정의 끝이었다. 거기서 고궁 음악회가 베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멀거니 인파들의 어깨 너머로 기웃대기만 했지만, 자리를 잡은 시민들은 음악회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창경궁을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 이미 만족하였으므로, 어둠살이 내리고 있는 궁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뿐이었다.
그러나, 5년 뒤인 오늘, 새로 창경궁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아무리 규모가 작은 궁궐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선걸음으로 마감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돌아본 건 창경궁의 조그만 일부였고, 그것도 그 거죽만 훑고 지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나머지 보물, 건너놓고도 사진 한 장도 찍지 않은 명정문 앞 옥천교(玉川橋),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세웠던 풍기의 받침대인 풍기대(風旗臺), 문정전 앞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를 설치했던 시설인 관천대(觀天臺), 춘당지 가의 팔각칠층석탑 등은 돌아보지 못했다.
언제 다시 창경궁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골 사람이 서울의 명승고적을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은 건 분명하다. 봄이 오고 꽃이 피면, 혹은 늦가을 단풍이 아름다울 때, 혹은 넉넉한 눈이 내린 겨울날에 창경궁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반갑고 귀한 시간이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2023. 1.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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