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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교단 31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 시간들

by 낮달2018 2019.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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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떠나며 ② 교단 31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 시간들

▲ 아이들은 제자지만, 그들을 통해서 나도 성장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015학년도 종업식 때 퇴임 행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학교 쪽의 제의를 저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아이들과는 수업을 마치며, 교직원들에겐 송별회 때 작별인사를 하면 되리라고 여겼으니까요. 정년도 아니면서 공연히 아이들과 동료들 앞에 수선(?)을 피울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화요일에는 3학년, 수요일에는 2학년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228일 자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하니까, 아이들은 짧은 탄성을 지르며 자세를 바로 하고 잠깐 긴장하는 듯했습니다.

 

고맙다. 지난 1년간 공부하면서 너희들은 나를 신뢰해 주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지키며 예의를 잃지 않았다. 나는 여러분과 교감하면서 때로 위로를 받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많다. 그러나 그건 역시 내가 가진 인간적 한계 탓이니 내가 안고 가야 할 문제다.

 

열심히 해서 원하는 학교로 진학하기를 빈다.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시절엔 좌절과 패배도 자기 삶의 자산이 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녀온 공감 능력을 잃지 말기를. 그것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아이들과 악수를 하고 아이들이 치는 손뼉 소리를 들으며 교실을 나왔습니다. 쑥스러운 듯 손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는 아이들의 마음의 결이 가슴에 닿아왔습니다. 복도 창 너머로 일부러 눈길을 돌리는 교사의 얼굴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 조금 일그러져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31년은 곧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 초임 시절에 만난 열일곱 살 여고생들이 마흔아홉 중년이 된 세월 동안, 저는 여전히 열몇 살 소년 소녀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십 대의 마지막 해에 교단에 첫발을 디딘 햇병아리 교사는 31년 세월을 마무리하고 올에 회갑을 맞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교사도 성장한다

 

 첫 제자였던 여학생들과는 열두 살 띠동갑이었지요. 그리고 마지막 담임을 했던 여고생들과는 나이 차가 38년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관계는 사제였고 아이들에게 저는 같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스물아홉의 풋내기 교사에겐 열일곱 살 큰아기들이 때로는 이성으로 의식되기도 했지만 서른여덟 살 연하의 아이들은 늦둥이로 얻은 딸들 같았습니다.

 

아이들 앞에 선 교사의 모습은 그가 겪은 세월만큼 다채롭습니다. 스물아홉의 국어교사는 아이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마흔아홉, 중년이 된 그때의 여고생들에게 저는 풋풋한 청년 교사였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맡았던 학급의 아이들에겐 저는 나이 많은 큰아버지쯤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교사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지만, 교사들 자신도 아이들로 말미암아 성장합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얘기는 의례적 수사만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미성숙한 존재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교사들은 자신의 결함과 한계를 깨닫고 인간적, 인격적으로 성장하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아이들이 교사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점에 대한 지적으로 믿습니다.

 

첫 임지, 시골 여학교에서 저는 풋내기 교사의 때를 벗고 아이들과 교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 아이들을 일러 첫사랑이라고 이름 붙이는 이유입니다. 이 친구들과의 교유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련 글 : 밀양, 20068(2)] 이들은 같이 나이 들며 삶의 애환을 나누는 벗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 두 번째 학교에서 꾸린 문학동아리와 그 결과물인 문집.

 두 번째 임지인 남학교에선 우리 교육의 모순을 깨우쳤습니다. 열등생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면서도 분노를 제대로 삭이는 법을 알지 못했던 열여덟, 더벅머리 사내애들과 부대끼면서 저는 교사로 다시 태어났지요.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느라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그 아이들이 내 귀한 스승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관련 기사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들

 

거리의 교사4년 반, 서른아홉에 교단으로 다시 돌아와 몇 군데 학교를 옮겨 다니며 만난 아이들도 잊지 못합니다. 가난한 시골 중학교에서 만난, 조부모와 살던 키 작은 아이들……. 하굣길, 그 아이들의 외롭고 쓸쓸한 어깨에 내리던 오후의 햇살은 지금도 가슴 아프게 떠오릅니다.

 

이웃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만나 각별한 인연을 이어간 녀석들도 제 제자들의 목록에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10년 후에 만나자고 지나가듯 한 약속에 힘입어 녀석들과는 10년 만에 회포를 풀기도 했지요. [관련 글 : 10, 1998에서 2008까지]

 

복직 후에 근무했던 네 학교에선 어렵지만, 학급문집을 만들기도 했지요. 아이들과 맛깔난 교감의 결과라기보다는 학년 말에 몰아서 해치운 일이었지만 그걸 들여다보면서 저는 마흔 전후에 꽤나 부지런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합니다. [관련 글 : 가지치기, 혹은 거름과 물 주기]

▲ 복직 후 근무한 네 개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든 학급문집들.

 아이들과 나누고 여민 시간을 이르려면 제 교단생활을 온전히 복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제로 만났지만, 그들은 성큼 자라서 어느새 주변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었지요. 동시대인으로서의 사제가 함께 연대의 시간을 나누는 것은 축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입니다. [관련 글 :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1),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2)]

 

아이들과 나눈 교감을 말하다 보니 죄다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일색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강했지만 기실 제 앞에서 교과서를 폈던 아이들 가운데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면서 소외되고 외로웠던 아이들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들 앞에 저지른 잘못과 오류는 얼마일까

 

쉽게 이르기 어렵지만 제가 아이들 앞에 저지른 과오와 오류는 또 얼마였겠습니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개인적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내뱉은 모멸과 증오의 언어들은 또 얼마였겠습니까. 제 관심의 과다가 남겼던 아이들의 상처는 또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아이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의 우주요, 세계입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고유의 빛깔과 향기를 가진 아름다운 꽃들일진대 정원사를 자처하면서 우리가 서투르게 잘라내고 꺾은 가지와 줄기는 얼마였는지요. 그 성장의 오묘한 비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교사가 저지른 서툰 판단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뒤늦게 저는 아이들 앞에 선 제 모습이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정작 그 본령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참회하기도 했습니다. 강파른 성미에다 너그럽지도, 대범하지도 못해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 속을 태우면서 저는 자신의 그릇과 한계를 깨달았었지요. [관련 글 : 고백 - 회고 혹은 참회]

 

아이들과 함께한 지난 세월 동안의 모든 회한과 뉘우침을 안고 가려 합니다. 아이들과 작별인사에서 이른 것처럼 그것이 저의 인격적, 인간적 한계의 소치임을 망설임 없이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가 옳고 정당함을 거듭 확인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서사이긴 하지만 꽃들아, 너희 마음대로 피어라를 급훈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선생님이 있었지요. (김운경 작 <옥이 이모>) 정년을 맞아 자신의 초청한 옛 제자들에게 그 선생님은 고백합니다. “여러분과 함께한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라고요.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

 

글쎄요. 지난 31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모두 황홀한 순간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삶이 그러하듯 더러는 행복했고 더러는 쓸쓸하고 외롭기도 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함께 나누고 여민 시간이 소박하게라도 빛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이들이 내게 베풀어준 사랑과 경의 덕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초임 시절에 막연하게 교직은 한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거룩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학교를 떠나면서 우정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니다. 한 인간의 삶을 바꾸지 않더라도 한 아이의 삶에 털끝만 한 영향이라도 남길 수 있었다면 내 교단에서의 삶은 충분히 성공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오는 14, 방송고 졸업식만 치르면 학교에서의 제 소임은 끝납니다. 내 교단에서의 마지막 몇 년을 방송고의 만학도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이제 뒤늦은 고교 생활을 마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시니어 학생들과 같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으니 이 인연도 가볍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작별하면서 늘 읽어주던 신영복 선생의 글귀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합니다. 이 인사는 우리 아이들과 방송고의 만학도들, 그리고 마지막 저 자신에게 일러주는 마음의 인사이기도 합니다.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기 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을 바다를 만난다. 땀 흘려 일구어 빛나는 쟁기 날이 되고, 쉼 없이 흘러 큰 바다를 만나라.”

 

 

2016. 2.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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