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밀양, 2006년 8월(2)

by 낮달2018 2019. 3. 11.
728x90

초임 학교에서 가르친 ‘첫 제자’, 큰아기들을 만나다

▲ 점필재 김종직의 생가

친구들과 작별하고 교동 사무소 앞 쉼터에서 만난 다섯 아이(부인이라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하겠지만, 여전히 그녀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사제라는 관계망을 벗어나지 못한다)와 나는 성급한 안부를 나누는 거로 말문을 텄다.

 

영주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한 아이와 밀양에 살고 있는 친구를 빼면 나머지 셋은 꼭 1년이 모자라는 20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이들이 졸업의 노래를 합창하고 여학교를 떠난 게 19872월이고, 지금은 2006년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던, 넘치는 열정 때문에 좌충우돌하던 청년 교사는 쉰 세대가 되어, 이제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불혹을 바라보는 성숙한 부인이 된 옛 여고생들과 다시 만난 것이다. 고삐 없는 세월은 살같이 흘렀던가.

 

두 사람은, 얼굴에서 옛 모습을 대번에 찾아냈지만, 한 친구는 혼란스러웠는데, 나중에야 그게 살 빠진 얼굴 탓임을 알았다. 여자들의 얼굴은 쉬 알아볼 수 없는데도 단박에 스무 해 전의 기억과 얼굴을 고스란히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세 해를 내리 가르친 사이여서다.

 

20년 만의 해후지만, 마땅히 나눌 안부가 마땅치 않다. 그들의 삶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녀들에 대해서 묻는 것으로 그들의 삶을 엿보려 했다. 공교롭게도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아들만 둘 두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중학생과 초등학생. 이들은 여고 시절을 추억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서울에서 살다 부산으로 옮긴 친구, 대학공부를 하던 부산에서 내처 사는 친구……. 내 삶의 굴곡이 만만찮았던 것처럼 그들의 삶에 어찌 곡절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녀들의 조신한 몸짓과 말씨 때문이 아니라도 나는 그들이 매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볍게 웃으며 가만가만 말하고 있었지만, 그 틈새로 나는 그녀들이 좋은 어머니요, 행복한 아내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챘다.

 

그리고 표충사 입구의 한적한 식당에서 나눈 몇 시간. 나는 제자가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했고, 정말 그들을 그렇게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이미 꿈 많던 여고생이 아니라, 삶의 신산(辛酸)을 겪고 이해하는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염소 불고기와 산채를 안주 삼아 나는 소주를, 그들은 동동주를 마셨는데, 스무 해쯤의 세월을 한꺼번에 거슬러 오르는 기분은 거나했던 듯하다. 시간과 모처럼의 해후가 주는 감격에 겨워서일까, 나는 취했다. 때때로 아이들의 현재가 나의 과거로 연결된다는 깨달음은 쓸쓸하면서도 행복하다.

▲ 1986년 12월 졸업여행 중 남해대교 앞에서 찍은 우리 반 단체 사진.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무사 귀환을 알리는 문자를 보내자, 저마다 답신을 보내왔다. 좋은 시간이었다고, 아내와 함께 놀러 오라는. 다음 날, 나는 카메라에 담긴, 그녀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다섯 명의 여인들의 모습에서 20년쯤의 세월을 빼 보았다. 그건 현재의 내 모습에서 역시 20년을 빼 보기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나는 20년 전 그녀들의 소녀일 적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나는 제자로서가 아니라, 함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싶은 까닭이다.

 

일 년쯤 전에 영주와 밀양에 살던, 그들 중의 두 친구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렇게 썼다. “추억은 언제나 고통과 슬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시간을 뛰어넘어 그것을 공유한 사람을 동등한 시선과 눈높이로 사로잡아 버린다.”

 

그렇다. 이제 그들과 나는 이 땅, 바로 여기, 이 삶의 한길로 함께 가는 동행인 것이다.

 

 

2006. 8. 5. 낮달


 지난해 말이었나위에 쓴밀양의 제자는 대구로 옮겼다이제 밀양서 이들을 만날 일은 없어졌다는 뜻이다그런데도 이들 중 하나는 올해도 밀양에 오는가고 내게 묻는다얼마 전에는 이 친구들이 함께 금정산성으로 놀러 간다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멀리 객지에서 옛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얼마나 살가울까.

 

지난 6월 초에는 이 친구들과 동기인대구에 사는 세 명의 제자가 찾아왔다모두 중고생을 둔 어머니여서 아이들 교육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논술에 관한 옛 스승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하면서 이들은 내가 20여 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며 놀라워했다.

 

높고 강한 목소리과장된 몸짓늘 망설임 없이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특유의 화법들나는 나이 먹으며 부드러워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웬걸 여전히 나는 예전의 큰 애기들 앞에선 청년 교사로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 전에는 우연히 창고를 정리하다 이들의 여학교 사진첩을 발견해 뒤적여 보았다세상에, 1학년 때만 내 반이었다고 믿었던 친구들이 3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다비교적 정확하다고 믿은 내 기억력은 별로 신뢰할 만한 게 못 되는 모양이었다대부분 얼굴과 이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그 아이들이 보였던 특징적인 모습이나 성격이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았다이십 년이란 단순히 시간과 세월의 집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그 스무 해란 물리적 시간과 그것의 지층 속에 켜켜이 쌓인 곡절들거기 어룽진 기쁨과 슬픔간난(艱難)과 신산(辛酸)의 총합이니 말이다.

 

올해도 밀양을 갈 것인지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다어제 받은 1()의 전화에서 나는 8월 초순 이후에나 시간이 난다고 말했다아마 올 3장 1박의 모임은 그 이후에나 가능할 듯하다아직 영화 <밀양>은 보지 못했다밀양을 다시 가든 가지 않든그 조그만 도시는 여전히 내 마음에 애잔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2007. 6. 22. 낮달

 

그때 찍은 사진 속의 제자들은 젊었었다. 그들은 마흔이 채 되지 않았다. 내가 50고개를 갓 넘길 때였으니. 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내 나이를 막연히 돌아보았던 것 같다.  그때 그 사진을 이 글에 쓰지 않은 것은 사생활이나 초상권 같은 걸 염두에 두어서다. 

 

그 친구들 가운데 한 아이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그 이듬해였나... 난 모르고 있었는데 친구를 배웅하고 나서 아이들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마흔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건 뭐고, 그걸 배웅해야 하는 벗들은 뭔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잃어야 하는 옛 스승은 또 뭔가 말이다.

 

나와 띠동갑이었던 이 친구들은 올해  13년 전의 내 나이보다 한 살을 더 먹었다. 어제 이 글을 새로 읽다가 두 아이와 통화를 했다. 꽃이 피면 한번 보자고 했지만, 꽃이 피면 과연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지척에 두고도 쉽게 만나지 못하는 게 사람살이 아니던가 말이다.

 

2019. 3. 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