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교유를 잇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늙어가기
지난해 2월 25일, 동료 교사들이 마련해 준 ‘퇴임 모임’에 인근에 사는 제자들 여덟 명이 함께 해 주었다. 모임을 끝내고 난 뒤에도 우리는 자리를 옮겨 얼마간 시간을 더 나누고 헤어졌었다. 그리고 1년이 훌쩍 지나갔다. [관련 글 : 걸어온 길, 걸어갈 길]
1988년, 두 번째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었다. 함께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교외 시화전을 치르고, 문집을 펴내면서 인연을 맺었다. 거기서 이태를 채우지 못하고 해직되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교유를 이어오고 있다. 좀 쓸쓸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우리를 더 묶었는지도 모른다. [관련 글 :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1)], [교사의 ‘격려’와 ‘질책’ 사이]
함께한 세월, 29년
해직 5년, 해마다 이사를 하면서도 나는 그 소읍에서 버텼다.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통학하면서 아이들은 길목에 있는 우리 집(1년쯤 조그만 책방을 열고 있을 때다.)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오면 늘 밥이나 라면 따위로 끼니를 챙겨주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거의 30여 년 전의 일이다. 글쎄, 대도시에선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때 우리네 풍속은 그랬다. 때 되어 오는 손에게 끼니를 챙겨주는 일은 접빈객(接賓客)의 기본이었으니 말이다. 없는 살림에 밥을 해대는 아내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웃으면서 그러셨다. 얘야, 그래서 감당이 되겠냐? 맛 내지 말고 대충해 주어라.
교단의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해 준 아이들이 고마웠고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내가 그랬다. 글쎄, 아내는 성가시겠지만 나는 아이들과 밥을 같이 먹으면서 우리가 지나왔던 30여 년 전을 떠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밥 먹은 지 오래됐지? 언제 날 받아 한 번 부르마.”
“아이고, 불러주시면 저희야 재깍 달려가겠습니다.”
처음에는 5월쯤(지난해) 하자고 했다가 아이들 시간을 맞추는 과정에서 6월로 밀렸다. 다시 한여름을 피한다고 하다 어쩌다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11월 말, 대구의 촛불집회에 갔다가 만난 여제자에게 조만간 날을 받을게 약속해 놓고 또 부도를 냈다.
지난 5월, 소성리 3차 국민행동 집회에서 다시 만난 아이에게 나는 이번에도 흰소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며 이달 안으로 연락을 하마고 약속했다. 그리고 아내와 상의한 끝에 허락을 얻어 25, 26일 양일 가운데 하루를 받자고 단체대화방으로 연락을 했다.
내 인생에 약속을 부도낸 경우는 잘 없는데 우리 집밥 한번 대접하겠다는 말만 꺼내놓고 1년이 지났다. 일을 추진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이리된 건 순전히 나이 탓이다. 결정권이 내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로 간 탓이다.
정권도 바뀐 5월, 넘기지 말자.
아이들은 아내가 힘들어할까 봐 ‘배달 음식’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거면 집에 청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나는 오랜 세월 저편, 아이들과 도란도란 앉았던 밥상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아내가 진을 뺐고, 나는 옆에서 눈치를 살피며 거드는 시늉을 하다 말았다.
예전엔 음식 마련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재바르게 일을 치러내던 아내도 늙었다. 일도 손에서 뜨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서도 아내는 종일 주방을 떠나지 않았다. 손은 많이 갔지만 정작 차린 음식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내는 ‘어디 보우. 요새 누가 집에서 음식을 하는가. 해 놓으니 표시나 나나?’하고 내내 타박을 했다.
밥과 술로 ‘동시대를 나누다’
그래서 지난 26일 밤에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왔다. ‘아이들’이라고 했지만, 이들은 이제 중고생 자녀를 둔 중년의 가장들이다. 첫 제자인 아이들이 마흔일곱, 그 밑의 아이들이 마흔다섯이다. 휴지 꾸러미와 쌀 한 포대를 들고 들어서는 이 군의 정수리가 훤했다. 나잇살을 먹어 배가 적당히 나왔고 노틀 티가 났다.
모두 여덟 명, 다섯이 동기고 나머지 셋은 후배들이다. 고향에서 일하는 친구가 셋인데 이 군은 카센터를 운영하다가 가게는 세를 놓고 농사를 짓고 있다. 나머지 형제간인 두 최 군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구미에 있는 친구는 둘, 김 군은 회사에 다니고, 박 군은 자동차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대구에 사는, 아직도 소년 같은 전 군은 아이티 계통 회사에 다니고, 한 군은 공무원이다. 장미꽃다발을 사 온 홍일점 여제자 신 군은 대구에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노조 활동으로 여러 해째 해고 중이던 그의 남편이 대법원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을 전해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밥을 먹고 소주를 마시면서 화제는 단연 지난 대선으로 모아졌다. 모두 조바심을 내면서 선거 과정을 지켜보았고 정권교체에 환호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편이었다. 뒤늦게 팟 캐스트에 입문한 나보다 아이들은 한참 선배여서 이 군은 복분자밭에서 일하면서 끊임없이 그걸 듣는 거로 현실감각을 유지했다고 했다.
옛날 고교 시절도 화제에 올랐는데, 이 군이 그 시절의 ‘편애’를 이야기해서 아니라고 부정하다가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로 물러섰다. 당사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이내 담담해졌다.
제자들과 모임을 염두에 두면서부터 나는 계속해서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꺼내놓은 말이니 주워 담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한 세월에 대해 무언가 아퀴를 짓고 싶었다. 지난해 학교를 떠나긴 했지만, 여전히 교단에서의 내 삶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미진함 같은 것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학교에서의 4년 동안, 나는 아이들을 붙이지 않았다. 담임도 아니었고, 수업만 하는 사무적 관계 이상의 사이를 굳이 맺으려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떠나오면서도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내밀한 속내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원론적 충고만 건네고 말았다. 패배나 실패의 경험도 자산이다. 열심히 살아라.
18살 소년이 중년이 된 세월이 내 ‘삶’
29년 전 열여덟 소년이 어느덧 중년의 가장이 된 세월이 내 누추한 생애였다. 나는 그 세월의 갈피 갈피마다 밴 뉘우침과 회한을 은연중 숨겨왔다. 그리 뛰어나진 못했으나 스스로 평균치는 넘긴 교사였다고 나는 자신을 매겨왔다. 그러나 그건 다만 주관적 판단이었을 뿐이다.
나는 학교사회의 완고한 권위 따위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아이들에게 권위적인 교사였는지 모른다. 편애하지 않고 공정, 공평한 교사라고 자부했지만 기실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은 교사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아이들의 평가는 별개의 것이다. 나는 뭉뚱그려 ‘인간적 한계’를 말하면서 거기 숨고 말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와 명백한 오류는 또 얼마였을까. 나는 저도 몰래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아마 제자들에게 그런 내밀한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게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변명을 추인받고 싶어 하는 내 이기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역시 ‘인간적 한계’에 그치는 몇 마디 말로 아퀴를 지었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적 한계가 명백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것에도 발끈하는 까칠한 성격에다가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너그러움이나 끈기도 없는, 기본적으로 그릇이 작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뉘우치거나 회한에 빠지지는 않을 생각이다. 쉽지 않지만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게 옳을 것 같아서. 뉘우친다고 해서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굳이 너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젊음의 한때를 같이 지나왔던 너희들에게 내 지난 생애를 돌이키면서 정리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이제 지난날의 아쉬움 따위는 떠나보낼까 싶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주어서 고맙다. 어쨌든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넉넉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도록 하자. 고맙다.”
아이들은 혈기 방장했던 젊은 시절은 물론 서른 해 가까이 내 남루한 삶을 지켜보아 주었다. 내가 그들을 통해 교단에서의 내 삶의 한 매듭을 지을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그런 요지의 이야기를 중언부언하면서 퇴직 이후 처음으로 마음의 짐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던 듯하다.
자정 넘어 아이들은 우리 내외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하고 돌아갔다. 아이들은 배웅하고 돌아오는 아파트 마당에서 나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마음의 인사를 전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단체대화방에다 쪽지를 띄웠고 아이들도 안부를 전해왔다.
“잘 돌아갔지? 변변찮은 자리에 모두 와 주어서 유쾌하고 정겨운 시간이 되었다. 너희들과 함께한 내 젊음의 시절을 되돌아보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의미를 나눌 수 있었으니 더 바랄 게 없는 시간이었다.
지난 30여 년에 못지않게 새날에도 더 깊어지고 두터워졌으면 좋겠다.
고맙다. 이날까지 이어준 우정 잊지 않으마.
열심히 살아가자. 늘 강건하고.”
아이들은 다음에는 바깥에서 저희가 우리 내외를 모시겠다고 말했다. 좋다. 언제쯤 불러줄지는 모르지만, 우리 내외는 그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 군이 보내준 그의 복분자밭 사진을 보면서 아내는 언제 밭에 들러서 복분자라도 따 주자고 말했는데, 글쎄다. 그게 언제가 될까.
2017. 6.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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