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의 풍광과 색소폰 공연까지 즐긴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PC에서 가로형 사진은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고은 시의 배경 ‘문의문화재단지’에 가다
충청도 문의(文義)에 ‘문화재단지’가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고은 시인의 시 ‘문의 마을에 가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그 지명을 각인해 왔지만, 나는 문의를 스쳐 갔을 뿐 거기 가보지 못했다. 시인이 1969년 5월 <현대시학>에 발표한 ‘문의 마을에 가서’는 ‘죽음을 통해 깨달은 삶의 경건성’, ‘삶과 죽음이 하나의 실체라는 인식’을 노래했다. 모친상을 입은 신동문(1928~1993) 시인을 조문하고자 문의를 찾았던 시인은 문의를 죽음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시적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 한 죽음을 받는 것을. / 끝까지 사절하다가 /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 모든 것은 낮아서 /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제2연
문의는 조선시대 청주 진관(鎭管)에 속해 있다가 해방 후 청원군을 거쳐 2014년 청원이 청주와 통폐합되면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이 되었다. 한때는 청주와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는 문의는 1981년 금강 본류를 가로지른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형성된 인공호수 대청호의 오른쪽 호숫가에 자리 잡으면서 주민의 반이 고향을 떠나 객지로 이주하는 아픔을 겪었다.
문의문화재단지는 1997년 문의면 문산리 10만9091m²(3만3천 평)에 문산관을 비롯하여, 전통가옥, 민속자료전시관 등의 고건물과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옛 생활 터전을 재현하여 문을 열었다. 아내와 함께, 댐이 내려다보이는 양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 문화재단지로 ‘소풍’을 떠난 것은 지난 5월의 마지막 금요일(27)이었다.
캠핑용 탁자와 의자에서 도시락 먹는 소풍을 그리며
이 나들이를 ‘소풍’이라고 말한 까닭은 우리가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나선 길이어서다. 나는 뒷날 소용이 닿으리라며 퇴직하기 전에 캠핑용 접는 의자 2개와 탁자 하나를 사서 승용차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니 왠지 그걸 써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얼마 전, 탁자가 안 보여서 부득이 중국산 접이식 탁자를 새로 들였다. 나는 어디 그늘 좋은 나무 아래 탁자를 펴고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자며 소풍을 떠나온 것이었다. 도시락은 밥에다, 김치와 참죽나물 고추장장아찌, 상추·풋고추에 쌈장 등 찬합 3개가 다였다. 아내는 ‘풀밖에 없어서’라면서 마트에서 통닭 한 마리를 사 넣었다.
정오께 문의문화재단지 주차장에 닿았는데 시간이 어중간했다. 우리는 통닭 몇 조각으로 허기를 늦추고 양성문(養性門)을 지나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문화재단지는 성문을 지나 오른쪽 산자락에 펼쳐져 있었다. 언덕을 오르니 널찍한 놀이마당이 나타났는데 자연석을 박아 만든 반원형의 관중석이 길게 이어져 마치 대학의 노천극장 같았다.
우리는 안동에 살 때,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를 여러 차례 찾아 ‘문화재단지’에 익숙한 편이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 다목적 댐을 지을 때 수몰 지역 내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개장했다. 단지에는 보물 2점 등 모두 43점의 문화재를 옮겨놓았는데, 특히 복원한 초가에 전시한 생활유물 1600여 점이 인상 깊었다.
“청풍문화재단지도 충북이야. 충주댐을 세울 때 수몰된 마을의 유산을 복원한 건데, 여기는 대청댐을 건설하면서 청풍처럼 문화재단지를 조성했네. 안동도 안동댐과 임하댐, 댐을 두 군데나 세웠지만, 문화재단지는 따로 없어. 왜 그럴까?”
“정말! 그렇네. 왜 그랬을 것 같으우?”
수몰 지역의 문화로 보전하는 방식, 충북과 경북의 차이
글쎄, 잘은 몰라도 안동은 수몰된 마을 자체를 호수 위쪽으로 옮겨 세우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외내’에서 종택과 누정(樓亭) 등 20여 채의 고택을 옮긴 데가 오천 군자마을(와룡면 군자리)이다. 외내는 광산김씨 일족이 600여 년 세거해 온 마을이었는데 수몰되면서 2km쯤 떨어진 군자리로 옮긴 것이다.(관련 기사 : 칠군자 마을에 항일지사의 빗돌이 외롭다)
도산서원 앞 분천마을에 있던 영천이씨 농암종택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도산면 가송리로 옮겨 ‘분강촌’이라 부르는 고택 마을을 완성했다. 분강촌은 규모나 역사 면에서 오천 군자마을에 버금가는 마을이다. (관련 기사 : 속세를 끊은 마을, 떠나기가 싫었네)
한편,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임동면 수곡(水谷·무실)·박곡·한들·용계마을이 수몰되자 여기 살던 전주류씨 일족이 구미시 해평면 일선마을로 집단 이주한 사례도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가가 십여 채인 이 마을은 지금 ‘일선 문화재 마을’이 되었다. 안동의 경우는 혈족들이 세거해 온 집성촌이어서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여 사는 게 가능했던 것일까.
산자락 위 평지에는 조선 중기 관아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조선시대 문의현의 객사 문산관(文山館)이 우뚝 서 있다. 한양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 사용한 문산관은 1728(영조 4)년에 중건한 뒤 이리로 옮겨 오면서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했다.
문화재단지 둘러보기
문산관 앞 정자에서는 아름다운 호수 대청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수면에 분수 하나와 꽃창포, 노랑꽃창포, 갈대 등을 재배하는 열 개의 ‘인공 수초 재배 섬’이 떠 있었다. ‘대청호’는 대전(동구, 대덕구)과 충북(청원, 옥천, 보은)에 걸쳐 있는 약 220km의 도보 길인 ‘대청호 오백 리길’을 거느린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호수다.
단지 안에 재현해 지은 집은 양반 가옥과 서민 가옥 3동 정도로 청풍에 비기면 간소했다. 가옥 주변엔 토담, 주막, 대장간, 성곽, 연자방아, 서낭당, 여막, 약수터 등을 조성했다. 관내의 고인돌과 효자각·충신각, 문의지역에 있던 옛 비석도 이전해 놓았다.
단지 내 옹기전수관은 충북 무형문화재 박재환 옹기장이 상주하면서 옹기 제작, 시연, 전시, 전수 활동 등을 한다고 하는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전시된 옹기를 구경했는데, 아내는 고추장 단지로 쓸 만한 옹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수관 아래 대청호미술관은 문은 열고 있지 않았고 미술관 앞 조각공원에 ‘애국지사 일곱 분의 상’이 서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신규식·신채호 선생을 비롯하여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손병희·권병덕(동학), 신석구·신홍식(기독교), 그리고 한말 의병장 한봉수 선생 등 청주·청원 출신의 애국지사들이시다.
성문으로 나가는 길가에 신동문(1928~1993) 시인의 시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을 새긴 돌비가 서 있었다. 당대의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시인은 4·19혁명을 직접 참여한 뒤,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 피 비린 정오의 / 포도에 포복하며 /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群)들”을 뜨겁게 노래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기본 모티브로 하되, 시인은 다윗(다비데)에 접미사 ‘군(群)’을 붙여 개인이 아닌, 익명의 군중으로 이를 확대 형상화했다. 1960년대 후반 절필한 뒤 낙향해 있을 때 그는 모친을 잃었고, 조문을 다녀간 동료 시인은 ‘문의 마을에 가서’를 썼다.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민화정 앞에서 연주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청주문화원이 지원하는 ‘거리 아티스트’ 공연이었는데 우리는 7명의 동호인이 연주해주는 색소폰 공연 등을 호젓하게 즐길 수 있었다. 2010년 가을 청풍문화재단지를 찾았을 때도 현악 4중주를 감상할 수 있었으니 이래저래 문화재단지는 서로 닮았다. (관련 기사 : 물에 잠길 뻔한 문화재, 이리 보니 반갑네)
색소폰 공연까지 즐겼으나 도시락은 청주의 주차장 차 안에서
거의 유일한 청중으로 공연을 즐기다 보니 오후 2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아쉽지만 일어설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시장기를 견디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단지 입구의 쉼터에서 도시락을 먹을까 했는데, 아내는 손을 홰홰 저었다. 밥 먹을 마땅한 장소를 찾으면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청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었다. 우리는 탁자를 차려놓고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소풍 대신 청주고인쇄박물관 주차장의 차 안에서 나란히 앉아 뒤늦은 점심 도시락을 해치울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우리는 찬합을 뚝딱 비우고, 마주 보면서 웃고 말았다. 문의에서 청주까지, 아내와 나의 첫 소풍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2022. 6. 11.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 운조루(雲鳥樓), 혹은 열린 쌀독, ‘타인능해’의 집 (0) | 2022.07.20 |
---|---|
가야산 부근, 돌탑에서 야생화식물원까지 (0) | 2022.06.24 |
성공회에서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지은 뜻은… (0) | 2022.06.04 |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 국립수목원에도 있다 (2) | 2022.05.29 |
자투리 시간에 찾은 해안 절경 ‘섭지코지’ (0) | 2022.05.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