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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성공회에서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지은 뜻은…

by 낮달2018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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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여행 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성공회 강화읍 성당(2022.5.5.)

*PC에서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 강화성당. '천왕성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천왕'은 곧 '하느님'이다. 이 건물은 1900년에 건립되었으니 나이가 120살이 넘었다.

강화도는 서울 인근에 있지만, 경상도 사람에게는 꽤 멀다. 그건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인 듯하다. 1969년 강화대교로 육지와 이어졌지만, 다른 시도 사람들에게는 강화도는 여전히 섬이기 때문이다.

 

12년 만에 다시 찾은 강화도

 

내가 처음 강화도를 찾은 것은 2010년 1월이다.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연수가 거기서 열렸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들어가 연수에 참여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얀데, 안개까지 끼어 아주 먼 데로 온 느낌이었다.

 

그게 마니산도, 정족산성도, 전등사도 가보지 못한 내 강화도 초행의 기억이다. 아들아이가 승용차를 마련해 맞춤한 여행이나 하자며 우리 내외와 딸애가 아이의 집을 찾은 게 지난 5월 4일 밤이었다. 다음날 강화도에 가기로 하였는데, 멀지 않다고 꾸물대다 보니 거의 11시 돼서 집을 나섰다.

 

내 나름으로는 제대로 한번 다녀보겠다고, 몇 군데 들를 곳을 염두에 두었지만, 여의찮아서 갑곶돈대와 강화성당, 고려궁지, 그리고 강화고인돌공원 정도를 돌아보았다. 시간에 쫓기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고, 답사라고 하기보다는 구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 갑곶돈대. 바다 앞쪽 총안 앞에 보이는 게 블랑기와 대포다. 성벽 너머 물길이 '염하'라고도 불리는 강화해협이다.

사적 306호 갑곶돈대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돈대(墩臺)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인데,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진(鎭) 5개, 보(堡) 7개, 돈대 53개가 섬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갑곶돈대에서 환기한 제국 침략사

 

예로부터 외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던 이곳에 설치된 갑곶돈대는 숙종 5년(1679) 5월에 완성된 48 돈대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는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1977년 복원한 돈대 아래는 강화대교가 지나는 강화해협이었다. ‘염하(鹽河 : 짠 물)라고도 불리는 김포와 강화의 경계 수역인 강화해협은 바다라기보다는 강처럼 보였다. 돈대에 설치된 대포 몇 문으로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던 역사를 환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맛집인 해물찜 집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찾은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싱싱한 해물에다 양도 많아서 매우 행복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 후 바로 대한성공회 강화읍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은 사적 424호로 지정된 곳이다.

▲ 대한성공회 강화읍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외삼문. 강화성당이라는 현판만 아니면 절집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모습이다.
▲ 강화성당의 외삼문.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
▲ 강화성당의 내심문. 팔작지붕의 평대문으로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다 .
▲ 120살이 넘은 성당 건물은 동서길이 10 칸 , 남북길이 4 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사찰 양식을 조합하여 지었다 .

오르막길을 오르자, 꽤 물매가 큰 언덕바지에 한옥으로 지은 대한성공회(聖公會)의 강화읍 성당이 나타났다. 1900년에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C.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니 자그마치 두 갑자, 120살이 넘었다.

 

초대 고요한 주교, 불교사찰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조합하여 성당을 짓다

 

▲ 성공회 인천내동성당의 고요한 주교 흉상

당시만 해도 외딴 섬이었던 강화도에 성당이 지어지게 된 것은 1896년(고종 33)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00년 11월 15일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은 ‘성 베드로와 바울로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당은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 양식을 과감하게 조합하여 지었다. 로마 시대 법정이나 집회장으로 사용되던 대규모 건축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바실리케(basilikè)’에서 유래한 바실리카양식은 서양식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사각형 예배당 모습이다. 바실리카양식이 흔히 ‘삼랑식(三廊式)’이라 불림은 중앙에 제단과 신도석(信徒席), 양옆에 회랑(回廊)을 두어 공간을 셋으로 나누어 쓰기 때문이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지만, 외관과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불교사찰의 형태다. 성당 건물은 동서길이 10칸, 남북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건물의 배치는 서쪽(앞)에 출입문을 두어 서구 형태의 이층성당을 배치하였다.

▲ 성당 내부. 중앙은 제단과 신도석, 좌우의 복도와 함께 삼랑(三廊)을 이룬다.
▲ 성당의 제대와 세례대. "수기 세심 거악 작선"이라 적혀 있다.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으며,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 성당의 제단 모습. 십자가 예수가 매달려 있고, 등불이 걸려 있다. 아래에 보이는 것이 제단이다.
▲ 성당의 제단이다. '만유진원', 만물의 참된 근원이라고 적혀 있다. 만유진원은 '하느님'이다.
▲성당 전경. 세 부분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음이 한눈에 드러난다.
▲ 성당의 오른쪽 복도. 성당의 역사와 관련한 사진들이 의자 위에 전시되고 있다.

이 시기의 교회 건축은 장방형(직사각형) 평면에 중층 팔작 기와지붕의 순수한 한옥 구조로 재래 한옥과 달리 정면을 장방형의 짧은 쪽에, 즉 재래건물의 측면에 두었다. 이는 서양 교회 건축의 기본인 바실리카(삼랑식)양식의 평면구성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당 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方舟)로서의 의미를 분명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뱃머리에 해당하는 서쪽에는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종을 두었고 성당 뒤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였다. 불교사찰의 외관에 바실리카양식으로 내부를 꾸민 이 성당은 우리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압록강에서 가져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도편수)가 건축을 맡았다고 한다.

▲ 강화읍 성당의 전경. ①외삼문, ②내삼문, ③ 성당, ④ 사제관. 이들 건물은 성당 계단부터 가로축의 직선을 이룬다. ⓒ 강화군
▲ 내삼문 서쪽칸에 있는 성당의 종. 전통양식으로 만든 종이다.
▲ 성당 건물은 뒷모습도 아름답다. 성당 구내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보리수 두 그루도 심어져 있다. 역시 지역 문화와 전통 존중의 뜻이다.

성당의 입구로 오르는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동남향 가로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과 닮았다. 성당이라고 씌어 있지만, 마치 절집을 찾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래서인 듯하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평대문 팔작지붕의 내삼문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다.

 

마당에 심은 보리수 2그루도 ‘토착화 신학의 선교 정신’이 바탕

 

성당 앞마당 오른쪽 담장 옆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1900년 영국 선교사 트롤코프 신부가 인도에서 10년생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다. 보리수는 석가모니가 그 뿌리에 앉아서 참선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인 보리수를 성당 앞마당에 심은 뜻은 각 나라와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토착화 신학의 선교 정신으로 성당을 한식으로 지은 것과 같은 뜻에서다.

 

성당은 마룻바닥인데, 중앙에 제단이 있고 신도들이 앉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고층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갈무리하는 구조를 통하여 내부공간을 성스럽게 구성한 것이다. 양옆은 복도로 의자 위에다 강화성당의 역사 관련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성당 뒤쪽의 사제관 앞에 ‘라브린스(Labyrinth)’라고 부르는, 벽돌을 박아 만든 미로가 있다. 둥근 원이 뱅뱅 돌면서 중심부로 들어가다가 이내 주변부로 빠지는 것과 같은 미로가 이어지는 시설이다. 라브린스는 조용히 명상하거나 기도하며 천천히 걸어서 중앙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서 나오게 된 구조다. 이는 성찰과 반성으로 신과의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위한 시설인 셈이다.

▲ 성당의 사제관. 왼쪽 마당에 박힌 벽돌로 만든 원은 라브린스 (Labyrinth)라 부르는 미로다.
▲ 사제관 담장 끝에 보이는 십자가 묘비. 내용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강화성당의, 여느 성당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와 외관은 단순히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적용한 건물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록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름으로써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지만,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강화성당은 외관과 외부 구조는 비록 한국의 전통 불교사찰의 그것을 따랐지만, 내부에는 교회 기능에 충실한 공간을 연출했다. 절집에 온 듯한 기분으로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성당 안에 들어서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제단의 십자가와 예수상 등으로 개신 교회를 분명하게 환기하게 되는 이유다.

 

▲ 성공회 관구 문양 이미지 ⓒ 대한성공회

성공회의 역사

 

성공회는 서방교회가 중세를 거치면서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다시 큰 분열을 겪는데, 하나였던 서방교회가 천주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분열로 알려진 1054년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에 이은 두 번째 분열이었다.

 

성공회는 현재 영국의 국교여서 ‘영국 국교회’로 불리기도 하는데,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와 사제들도 혼인할 수 있는 개신교단이다. 그러나 성공회에서는 “‘개혁된 가톨릭’ ‘교황 없는 천주교’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 ‘가톨릭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라고 해도 좋”(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누리집)다고 말한다.

 

전 세계 164개국에 퍼져 있는 성공회는 세계적으로 단일한 교단이다. 이 세계 성공회를 ‘앵글리칸 커뮤니언(the Anglican Communion)’이라고 부른다. ‘친교(communion)’라는 말로 교단 이름을 정한 교회는 성공회밖에 없다. 단일 교단으로서 성공회는 세계에서 천주교와 러시아 정교회 다음으로 교세가 크지만, 한국에서는 전교의 역사에 비겨 신도가 5만에 그친다.

 

대한성공회 2001년에는 최초로 여성에게 사제를 서품하는 등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함께 교회일치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교단으로 ‘진보 교단’으로 분류한다. 성공회는 다양성을 중시해 다른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물론 천주교와 정교회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타 교단에 대해서 웬만해서는 이단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강화도 길상면에도 온수리 성공회 성당이 있다. 강화성당이 건립되고 6년 후인 1906(고종 43)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초기 서양 기독교의 교회양식을 볼 수 있는 목조건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당은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목조의 예배당과 2층 종탑 2동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성당 가운데 바실리카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몇 더 있다. 가톨릭의 청주 수동 성당도 바실리카양식이다. 온수리 성당을 만나는 건 미래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2022. 6.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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