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① 구례 운조루(雲鳥樓) 고택(2019.10.30.)
*PC에서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지리산자락으로 아내와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온 게 2019년 10월 말이다. 10월의 마지막 날 출발하여 11월 1일에 돌아오는 짧은 여정이었으나, 우리는 꽤 여러 곳을 돌았다. 연곡사와 피아골 단풍을 구경했고, 하동 최참판댁과 박경리 문학을 들렀었다.
섬진강을 따라 구례-하동길을 지났고, 이튿날에는 아내를 독려해가며 처음으로 지리산 노고단에도 올랐었다. 늘 그렇듯 나름대로 빼먹지 않고 명승과 고적을 돌았는데 정작 그걸 전혀 갈무리하지 못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기를 쓰는 그렇고 그런 차례를 지겹게 여긴 탓이었을까.
3년 만에 짧게나마 그 여행을 갈무리할까 싶은 생각에 그때의 사진을 꺼내놓고 그 시간과 기억을 복기해 보았다. 이는 누군가 읽기를 바라서 쓰는 글이라기보다 마음속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여정을 마친다는 뜻에서다. 내 여행은 늘 시간의 복기와 글쓰기로 마감하곤 했으니 말이다. [관련 글 : ‘시간의 복기’와 ‘글쓰기’로 마감되는 여행의 발견]
지리산자락으로 떠났던 3년 전의 여정을 여정과 상관없이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기억이 나면 나는 대로, 나지 않으면 또 그것대로 묵은 사진을 따라 설렁설렁 발길을 시작할까 한다.
최참판댁과 연곡사를 거쳐 구례 운조루에 닿은 것은 10월 30일, 오후 5시가 겨워서였다. 운조루 고택은 그날 밤 고택 음악회 ‘추수(秋秀)’를 여는 준비를 하느라고 어수선했다. 앰프 따위의 설비를 설치하는 젊은이들이 연신 드나드느라고 고택은 장터 같았다.
좀 진득하게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보면, 곳곳에 장애물이 걸렸다. 집안은 사람이 사는 흔적이 곳곳에 넘쳤고, 그것은 전혀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드러나 있었다. 250년 묵은 고가는 방문자를 위해서 굳이 자신을 전혀 포장하고 있지 않았다.
조선조 중기의 고가 ‘운조루’
나는 설렁설렁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둘러 다시 길을 떠나버렸다. 나중에, 언제 조용할 때 다시 오지 뭐. 그게 늘 변명이고 핑계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운조루를 떠났다. 삼 년이 지나, 다시 운조루를 불러낸 것은 이제 지각답사기라도 쓸 때가 되었기 때문일까.
구례 운조루 고택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고가다.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무신 유이주(柳爾胄)가 지었다. 유이주는 본관이 문화(文化), 대구 입석동에서 태어났다. 힘이 천하장사였다는 그는 1753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낙안군수로 있을 때, 낙안의 세선(稅船)이 부서져 조세가 제때 올라오지 않자 배를 파손한 죄로 유배되었다. 말하자면 관리의 책임을 물었다는 뜻이겠다.
이듬해 풀려나서 구례 토지 오미리로 이주하였다. 벼슬아치로 대규모 국가 건축공사를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운조루를 설계하였다. 1776년 9월 16일에 상량식을 한 뒤 6년만인 1782년에 유이주가 용천부사 있을 때 운조루가 완성되었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의 구절에서 첫머리 두 글자 ’운조(雲鳥)‘를 취해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
금가락지 떨어진 자리에 지은 ‘구름 속 새’의 집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곳은 ‘금가락지가 떨어진 자리[금환락지(金環落地)]’라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건축 당시는 78칸이었으나 현재는 연건평 371.9㎡(112.5평)에 55칸의 목조기와집이다. ‘ㅁ’자형 안채를 두고 있는 안동지방 저택의 영향을 받은 구조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에 안채, 왼쪽에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고, 앞쪽에 행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T’자형을 하고 있는데 왼쪽 끝에 누마루를 두고 있다. 이 누마루를 ‘운조루’라 부른다. 안채 쪽에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작은 사랑채가 있다. 안채는 ‘ㅁ’자형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방과 부엌, 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에는 불천위(不遷位) 조상을 모신 사당을 두었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예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운조루는 1968년 11월 25일에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운조루를 유명하게 하는 건 단순히 그걸 지은 사람이나 건축물의 규모, 구조 따위가 아니다. 종3품 지방관인 용천 부사를 지낸 유이주는 고관대작이라 할 수 없고, 그의 학문이나 무예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수준도 아니다. 남들과 비교해 엄청난 자산가도 물론 아니다. 99칸 집이 드물지 않은데 55칸이 무슨 대수며, 수백 년 묵은 고가도 적지 않으니 2백몇십 년도 굳이 눈에 띄는 특징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운조루의 나눔 쌀독, ‘타인능해’
운조루를 사람들이 입에 올려 우러르는 것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갖다 놓은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쌀독 덕분이다. 운조루에서는 마을의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 독에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짓도록 허용했다. 마을의 가난한 이가 끼닛거리가 떨어지면 이 쌀독을 열어 쌀을 퍼 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으로 이웃, 즉 지역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대대로 이어온 경상도 경주 최부자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특권층의 도덕적 의무)와 다르지 않다. 운조루가 수백 년 동안 각종 민란과 동학,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운조루가 그 이름만큼의 낭만과 운치에 취해 일가와 일신의 안일만을 추구했다면, 운조루는 한낱 유복한 벼슬아치의 호사 취미로 그쳤을 터이다. 그러나 운조루는 그것 대신 공동체의 안녕에 대한 자기 몫의 의무를 잊지 않고 ‘선린(善隣)’을 생활 속에 실천함으로써, 구름 속 새의 집이 아니라 ‘타인능해’의 집으로 기억되어온 것이다. 하늘 아래 티끌만 한 재물이라도 그게 ‘모두의 것’이 아니지 않은 일은 없지 아니한가 말이다.
2022. 7. 18. 낮달
[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②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③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매천사(梅泉祠)
[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④ 지리산 연곡사(鷰谷寺)
'이 풍진 세상에 >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천사, 망국의 치욕에 선비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0) | 2022.07.23 |
---|---|
약속한 지 20년 만에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다 (1) | 2022.07.21 |
가야산 부근, 돌탑에서 야생화식물원까지 (0) | 2022.06.24 |
‘소풍’은 문의 마을로 가서 ‘도시락’은 차 안에서 먹었다 (0) | 2022.06.10 |
성공회에서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지은 뜻은… (0) | 2022.06.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