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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성적 차별, 학교도 ‘계급사회’로 가는가

by 낮달2018 2021.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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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차별’하는 학교들

▲ 어떠한 이유로 아이들은 학교나 사회에서 성적을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교육의 제일의라 해도 무방하다.

어버이날을 전후하여 들려오는 소식들이 귀에 어지럽다. 또 60대 부부가 자녀들이 여행을 간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고맙고 미안하다.” 이들이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이 아프게 시야에 박힌다. 어떤 아들은 대변 못 가린다며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때려 숨지게 했고, 40대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사는 게 고단해서라고 말하기도 하고,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라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세상은 나날이 깨어가고 편리해지는데도 정작 살아가는 건, 이 가파른 무한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여전히 힘겹기만 한 것일까.

 

학교의 ‘억압과 차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며칠 전 <한겨레> 기사는 학교에 ‘성적순 차별’이 만연해 있으며 아이들은 시나브로 그런 억압과 차별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전한다. ‘억압과 차별 없는 사회’를 가르치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배우는 학교에서 오히려 그것이 자행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슬프다.

 

성적을 잣대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이루어지는 차별은 학교별로 각양각색이다. 금지된 ‘우수반의 폐쇄적 운영’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성적은 학습실 책상의 크기를 결정하고 하다못해 신발장 배정의 준거가 되기도 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에겐 컴퓨터까지 주어지는 정도라니 학내 차별은 어느새 일상이 된 것 같다.

 

‘성적’을 잣대로든 다른 무엇으로 이루어지든 ‘차별’은 ‘교육적’이지 않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나마 성적으로 아이들을 차별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현 정부 들면서 치닫고 있는 경쟁 일변도의 정책은 아예 드러내놓고 아이들의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일제고사 성적, 서울대 입학자 수와 수능성적에 따라 이루어지는 ‘학교 차별’은 다시 ‘아이들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소식을 전해 듣는 기분은 씁쓸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차별을 ‘용인’하고 그것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데 이르면 불편해지는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중고교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초등학교조차 아이들은 ‘차별’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의 어떤 학교에서는 학년별로 1등부터 50등까지 성적순으로 독서실 지정석을 만들어 그들과 51~100등 사이에는 칸막이를 설치해 학생들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자신들을 ‘알짜배기’(1~50등)와 ‘예비인력’(51~100등), 그리고 ‘잉여’(100등 밖)로 나눈다고 했다. 성적에 따라 자신들을 가르면서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절대다수일 ‘잉여’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아이들은 그런 학교의 차별 조치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자신의 지능과 학력을 자책한다고 했다. 차별에 반발하는 대신 그 차별을 넘기 위해서는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과 차별에 대해서 저항하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분노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이들을 무력감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알짜배기’(1~50등)와 ‘예비인력’(51~100등), 그리고 ‘잉여’(100등 밖)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기실 ‘성적에 따른 차별’은 꽤 오래된 것이다. 1980년 후반, 우열반이 편성된 사립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온갖 모순을 한꺼번에 깨달아버렸다. 그 학교에서의 교육은 경쟁지상주의에 깊숙이 빠진 이 나라의 비틀린 중등교육의 미니어처 같았다. [관련 글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무심하게 넘기기 쉽지만, 학교에서 ‘성적에 따른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학급 반장이나 학생회장의 입후보 자격에 ‘생뚱맞게’ 들어 있는 성적조항이 대표적이었다. 전체 30% 이내가 마지노선이었는데, 성적이 그보다 낮은 아이들의 ‘학생회장 시험 쳐서 뽑지, 그러냐’는 비아냥거림이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구성된 우수반과는 달리 ‘평반’이라 불린 ‘열등반’에는 체벌로도 다스리지 못할 말썽꾼들이 적지 않아서 담임들은 바람 잘 날이 없는 일 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열등반을 맡으면서 호되게 ‘선생 공부’를 새로 한 나는 이듬해 출범한 교원노조에 기꺼이 동참했다.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제도’를 통해서만이 학교가 바뀔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성적 피라미드. ⓒ <한겨레>

우열반은 성적에 따른 학급편성으로 비슷한 학력 수준의 학생들을 모아놓은 것이긴 하지만 그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성적을 잣대로 ‘될 아이와 안 될 아이’를 구분하는 것이며, 학교에서 주어지는 온갖 차별적 혜택의 원천이 되곤 했다.

 

나아가 열등반 아이들은 면학 분위기를 해치거나 학교의 평균 성적을 까먹는 등 학교가 명문교로 발돋움하는 데는 별로 쓸모가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여러 가지 사고나 말썽을 도맡아 저지르니 이 아이들이 예쁘게 보일 리가 없다. 아이들은 학교가 자신들은 투명 인간처럼 바라보는 금방 눈치챈다. 자존감을 잃은 아이들 가운데 일부는 점차 엇길로 빠지곤 했다.

 

3월에 만났을 때 불과 4, 5명이었던 말썽꾼은 이듬해 2월 진급을 앞두었을 때 거의 반수에 가깝게 늘어 있었다.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갈라놓은 학교의 시스템은 소수의 우등생을 만들었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문제아를 낳았다. 그 녀석들과 헤어질 때 느꼈던 열패감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새벽이면 역에 나와 수화물 하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에 오면 내내 자던 아이들, 자다가 두들겨 맞던 아이들……. 그들 편이었다는 내 확신은 행여 착각은 아니었을까. 아이들과 헤어진 후, 그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군부 독재기에 ‘승인받지 못한 제도’ 아래서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집단’도 무력했다.

 

실패한 시스템, ‘열등반’의 추억

 

그리고 다시 20년이 지났다. 예의 학교는 여전히 ‘우열반’을 편성해 ‘입시 전선’에서 ‘순항’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듣는다. 공립학교에선 우열반 대신 교묘한 방식으로 우등생에게 특혜를 주는 시스템을 고안해 냈다. 지역 명문인 이웃 남학교에는 일찌감치 ‘스카이(SKY)’반이 도입되었고, 소수의 성적우수자에게 특별 열람실 이용 자격을 주는 형식으로 ‘공부 선수’들을 기르고 있다.

 

그런 형식의 차별이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건 다행인 셈인가. 그러나 학교가 ‘사교육 없는 학교’로 지정되어 적지 않은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아이들은 자못 혼란스럽다. 아이들 스스로 스터디그룹을 만들고 운영계획을 내면 이를 심사하여 도서구입비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이 프로그램은 과목별로 1등급인 아이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지원되었는데 아이들은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차별에 불만이 컸던 모양이다. 올해도 같은 프로그램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나는 이의를 제기했다. 굳이 지원이 성적우수자에게만 제한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원했다가 탈락한 아이들이 받는 상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원 자격을 없애라…….

 

결국 프로그램의 지원 자격은 3등급까지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불만은 내연하고 있었던가. 수업 중에 성적 차별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나는 저간의 사정을 해명해 주었는데 그게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었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성적에 따른 차별은 이런저런 형식으로 강도를 더해가는데 아이들은 그것에 저항하고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고 있다는 보도 앞에서 울적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제도의 모순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의 세 주체 가운데 학부모는 물론이고 교사들조차 이런 차별의 논리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글쎄, 모르긴 해도 한 십 년 전쯤이라면 공립학교에서 이런 형식의 차별은 발을 붙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만 해도 학교 운영에 있어서 비민주적 요소들은 교사들의 논의를 통해 최소한으로 걸러지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교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교사들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불러왔을까. 예전 같으면 교사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의가 벌어져도 시원찮은 의제들이 아무 갈등 없이 지나가 버린다. 그런데도 그런 익숙지 않은 변화를 교사들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성적에 따른 차별은 ‘샐러리맨’이 아닌 ‘교육 노동자’로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던 교사들이 이상이 아닌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변화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그 변화를 용인하면 할수록 학교와 교사의 위상과 역할은 낮아지고 약화하며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 무너진다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어제 경기도의 어떤 고등학교에서는 교사가 우수반 학생들에게 시험 답안지를 고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답안지를 고쳐 쓰게 한 그 교사에겐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이 경쟁의 능력조차 잃어버린 ‘투명인간’처럼 보였던 것일까.

 

20여 년 전, 예의 학교에서는 우수반 담임들이 말썽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열등반 담임들을 위로하는 한결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수고 많지요? 그러나 뒤는 당신이 더 나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오.

이놈들(우수반 아이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지만 지금뿐이잖우?

나중에 졸업하고 술병이라도 들고 찾아오는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아니고 당신네 ‘골통’들이니 말이야…….”

 

글쎄, 그들의 얘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건 쉽게 일반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부분 교사들이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성적 우수한 아이들에게 특혜를 베푸는 것이 기실은 ‘절 모르고 한 시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작 교사들의 훈도(薰陶)를 기억하는 아이들이 그들이 버렸던 열등생이라는 것은 엄청난 ‘역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나라 교육의 허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주는 씁쓸한 단면이다. 애오라지 성적우수자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학교와 교사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었던 왜곡된 교육의 뒤끝은 허망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차별에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 ‘뒷날의 술병’을 기대하는 것은 가당찮다. 특혜를 받았던 아이들은 그 특혜를 감사히 여기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고 투명인간 대접을 받았던 아이들에게도 교사는 투명 인간일 가능성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2011. 5.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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