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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큰아기들의 5월, 여고 체육대회 풍경

by 낮달2018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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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의 체육대회 풍경

▲ 운동장에서 치러지는 경기 때문인지, 작년에는 보이지 않았던 깃발이 등장했다. 줄다리기 경기에 나와 경기를 독려하고 있는 깃발들.

어제 학교에선 체육대회가 베풀어졌다. 자투리 시간조차 쉽게 낼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한나절 동안의 망중한을 즐겼다. 체육대회라곤 하지만, 정작 정식 체육 종목은 이어달리기 정도이고 나머지는 줄다리기, 피구, 발야구, 6인 7각 등 놀이 형식이다.

 

지난해 전입해서 맞은 첫 체육대회 때에 나는 으레 운동장에서 치러지는 행사일 거로 생각하여 야전 복장으로 출근했다. 그러나 학교에 와서야 그게 내 ‘무감각의 소치’라는 걸 깨달았다. 수업 시간에도 부지런히 거울을 보아야 하는 큰아기들에게 ‘오월 땡볕’은 ‘공공의 적’이다. 당연히 모든 종목이 체육관의 ‘안전한 그늘’에서 치러진 것이다.

 

그러나 올 체육대회에선 줄다리기와 이어달리기 종목은 운동장을 이용했다. 햇살은 맑고 신선했다. 끊임없이 함성을 질러대면서 아이들은 이 정도쯤이라면 참아줄 수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전체 학생들은 학년과 반을 고려하여 네 개의 팀으로 재구성되었다. 올해의 트렌드는 4자성어 형식인 모양이다. ‘기절초풍’, ‘파란만장’, ‘바나나킥’, ‘혈압상승’이 그 네 팀의 이름이다. 각 팀은 상징색으로 무장했다. 각 팀의 상징색이 무엇인가 맞혀 보시라. ‘바나나킥’은 노랑, ‘혈압상승’은 빨강(이건 쉽다), ‘기절초풍’은 초록, ‘파란만장’은 파랑이다. 글자가 다르지 않으냐고 하다간 아이들에게 ‘지적 장애’로 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 반이 속한 팀은 ‘바나나킥’이었다. 아이들은 줄창, 노란 꽃술과 응원봉을 흔들어대며 악을 썼지만, 첫 경기 피구에서의 우승한 걸 빼고 나머지 종목은 죽을 쑤었다. 종합순위는 3위. 그래도 나는 훌륭했다고 아이들을 치하했다.

 

체육관 안에는 빛도 충분하지 못한 데다 움직이는 피사체를 렌즈에 담는 건 쉽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찍은 사진이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발칙할수록 기분 좋다. 그러나 ‘범생이’들이어서 그런가(우리 학교는 비평준화 지역의 이른바 ‘명문 학교’다.) 그 ‘발칙성’은 해마다 순화되는 느낌이다.

 

일사불란한 응원과 경기 결과에 광분(?)하는 아이들, 지치지도 않고 악을 써 대는 아이들의 모습은 고스란히 우리 현행 입시교육의 그늘을 반증해 준다. 아이들의 펄펄 살아 날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꺼워하면서도 연민의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

 

5월, 아이들이 입은 유니폼과 함께 빛나는 원색의 향연은 눈부시다.

▲ 체육관 2층 응원단. 상징 색깔로 도배를 했다. '혈압상승' 팀은 이름 끝자를 '이길 승(勝)' 자로 바꾸었다. 결국, 이 팀이 종합우승을 했다.
▲ 팀별 티셔츠마다 새긴 글귀가 다양하다. 다분히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BK측근'에서 'BK'는 담임 이름의 첫머리 글자(이니셜)이다 .
▲ 별의별 이름이 다 나왔다. 개 이름도, 승부에 초연하다는 걸 강조한 이름도 있다. 그러나 이 팀은 '봐주면서 하다 피구에서 우리에게 졌다 .
▲ 담임도 아이들이 입으라면 꼼짝없다. 'BK 측근'들이 준 BK의 유니폼에는 '독재가 붙었고, 쉰을 넘긴 담임에게 '신생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 한자로 커다랗게 '기(氣)'를 새긴 팀이 동양적이라면 '초토화'는 다분히 전투적(!) 이다.
▲경기는 늘 긴장되는가.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총도 대포도 없지만, 달아오른 경기장에는 총성과 포연이 자욱하다 .
▲ 여자아이들은 늘 이렇게 예쁘게 꾸미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머리에 두른 반짝이가 화관처럼 빛난다.

 

2008. 5.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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