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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상트페테르부르크]예르미타시, 러시아 제국의 ‘영광’과 혁명의 ‘격랑’ 사이

by 낮달2018 2020.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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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① 예르미타시, 피의 일요일‘2·10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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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여행기를 쓰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복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도 같이 복기하여야 한다. 2년이 흘렀는데, 사진을 펼치니 그때의 느낌과 인상이 고스란히 복원되는 듯했다. 지워진 기억은 동행한 가족과 함께 되살려냈다.

 

이 지각 여행기를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더니, 가급적 3개월 이내(계절이 바뀌기 전, 겨울에 여름 여행 기사는 채택 하지 않음), 해외는 다녀온 지 1년 이내 정도라야 기사로 채택한다는 규정 상 싣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해 왔다.  백 번 옳은 말이다. 2년이나 게으름을 피운 결과다.

 

그래서 이 글을 러시아 근현대사를 돌아보는 역사기행 형식으로 바꾸었다. 실제 유적 견문보다는 러시아 역사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다. 원래 다섯 편 정도를 예정한 글이었는데, 알 수 없다. 이왕 늦은 거 쉬엄쉬엄 갈까 한다.

▲ 광장의 구조물 '알렉산드르의 원기둥'. 이 구조물은 제국의 영욕과 성쇠를 지켜보아야 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도. 상트는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에 버금가는 도시로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구글지도

2018년 여름, 나는 가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했다. 그것은 전혀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5월에, 딸애가 항공료가 아주 싸서 그러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은 어떠냐고 물어오면서 결정된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어디? 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 말이냐고 되물으면서 나는 거기 화답한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신도시

 

7월 24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파리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에로플로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우리는 한국의 38도보다 훨씬 위쪽인 북위 59도, 알래스카와 같은 위도상에 있는 도시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30도를 오르내릴 7월 하순의 한국보다는 적어도 5도쯤 낮았기 때문이었다.

 

네바강 하구에 19개의 운하로 연결된 아름다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에 버금가는 도시로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북방전쟁에서 승리하여 스웨덴으로부터 옛땅을 회복한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1672~1725)가 건설한 이 도시는 1712년에 러시아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수비 목적으로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베드로와 바울의 요새)를 기반으로 표트르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담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1703년 네바강 하류 삼각주의 늪지대였던 이 지역에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딴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도시를 지으려면 습지를 메우는 데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는데, 표트르는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에게 일정한 양의 돌을 가져오라는 칙령으로 이를 해결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므로 석조 토대 위에 세워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 강변에 서 있는 돌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중세의 농노제를 유지하는 등 유럽의 대표적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절대군주 표트르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표트르는 귀족들에게 서유럽인들처럼 수염을 깎고, 서유럽식 의복을 입고 댄스와 파티에 참석하며 커피 마시는 습관을 들이도록 조치했다.

 

이는 한 세대 남짓 만에 러시아의 교육받은 귀족이 유럽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됨으로써 러시아의 교육과 문화생활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는 중서부 유럽과는 전혀 다른 종교, 문자, 풍습 등으로 말미암아 ‘유럽’ 국가라기보다 아시아 국가에 더 가까웠던 러시아를 서유럽화 하기 위해 힘썼는데,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은 그 열정의 결과물이었다.

▲ 민영환은 표트르 대제를 언급하면서 조선의 강력한 군주를 꿈꾸었을지 모른다.

남다른 열망과 에너지로 ‘러시아의 유럽화’라는 명확한 목표를 추구해 갔지만, 그 이전에는 수십만 루블에 이르던 궁정 유지비를 표트르는 단 6만 루블로 낮추어 유지할 정도로 검소 검약했다. 1896년 6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최초의 외교 사절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이 쓴 글에는 당시 열강의 침입 앞에 흔들리는 나라를 근심한 충정공의 감정이 이입되어 있었다.

 

청나라 강희(康熙) 44년에 표트르 대제가 즉위하여 예로 몸을 낮추고 어진 이를 불러 나라가 이로써 크게 다스려졌다. 바닷가에 수도를 세웠으니 이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라가 비로소 강하고 커졌다.

- 민영환, <해천추범(海天秋帆)> 116쪽(책과함께, 2007)

 

1896년 고종의 특명전권대사 민영환, 러시아 방문

 

1896년 4월 1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고종 특명전권대사로 제물포를 떠난 민영환이 중국과 일본, 캐나다와 미국, 영국과 폴란드 등을 거쳐 러시아 경내에 닿은 것은 5월 18일이었다. 나흘 후, 니콜라이 황제를 알현하고 친서와 예물을 바친 그는 내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에 맞서 ‘인아거일(引俄拒日)’ 즉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책으로 맞서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접경한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 아래 두고자 한 러시아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는데, 48일간의 여행 끝에 민영환이 러시아에 들어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서 천도해 온 1713년부터 1918년까지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다. 1914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식 명칭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 러시아 혁명(1917) 이듬해에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아갔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 ‘레닌그라드’가 되었다.

▲ 숙소는 넵스키 대로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개축한 곳이었다. 아파트에는 승강기가 없었고, 밑에 층은 마치 폐허처럼 비어 있었다.

풀코보 공항에서 우리는 우버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바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넵스키 대로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개축한 곳이었다. 페라가모, 롤렉스, 펜디, 루이뷔통 같은 명품 가게가 즐비한 거리 안의 아파트에는 승강기가 없어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밑에 층은 마치 폐허처럼 비어 있었다. 그러나 4층의 우리 숙소는 말끔하게 단장해 놓은 가정집이어서 우리는 편안하게 나흘을 묵을 수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의 첫 밤은 쉬 잠들 수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종일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30일 남짓, 햇볕 좋은 날의 2/3 이상은 5월부터 8월 초의 여름이다. 자정이 지나도 밖이 환해서 내다보니, 불 밝힌 가로등 사이로 사위는 마치 미명처럼 희끄무레했다. 6월에서 8월 사이에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종일 깜깜한 밤이 오지 않는 백야(白夜)가 이어지는 것이다. 민영환은 <해천추범>에서 이를 “해가 오전 1시에 뜨고 오후 10시에 들어갔다”라고 썼다.

▲ 겨울 궁전과 옆의 소 예르미타시와 구 예르미타시, 예르미타시 극장, 신 예르미타시 등 5개의 전시관이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구성한다.
▲ 중앙 개선문이 있는, 길이 580m의 예르미타시 신관. 주로 근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튿날, 여정은 예르미타시 박물관부터 시작되었다. 예르미타시는 제정러시아의 황궁,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겨울 궁전[동궁(冬宮)]과 그 옆의 소(小) 예르미타시와 구(舊) 예르미타시, 예르미타시 극장, 신(新) 예르미타시 등 5개의 전시관에 예술품 270만 점을 소장한, 루브르·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다.

 

알렉산드르의 원기둥, ‘제국의 영욕’을 지켜보다

 

겨울 궁전과 예르미타시 신관 사이의 궁전 광장 가운데에 알렉산드르 1세(1777~1825)가 나폴레옹과의 조국 전쟁(1812~1814)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한 47.5m의 구조물 ‘알렉산드르의 원기둥’이 서 있다. 광장은 한때는 제국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였지만, 마침내 제정의 황혼과 몰락을 지켜보아야 했다.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차르의 겨울 궁전을 향해 평화적 행진을 시작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가폰 신부(1870~1906)는 “이제 차르는 없다. 신도 없다.”라고 주장하며 행진을 주도했다. 6만 명의 참여 민중은 한목소리로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제’를 요구하였지만, 실권자 라스푸틴의 유혈 진압 지시에 따라 근위대는 비무장 시위대를 발포로 맞이했다. [관련 글 :  ‘피의 일요일’ -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불을 당기다]

사망자만 500∼600명, 부상자는 수천 명에 이른 이 날이 바로 ‘피의 일요일’이다. 이때 불붙은 혁명의 열기는 12년 뒤인 1917년 3월 8일,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노동자·사병들이 되살려냈다.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한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1868~1918)를 폐위시키고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 겨울 궁전으로 행진해 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에게 근위대는 총탄을 퍼부어 500~600명을 학살했다. 이날이 '피의 일요일'이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1단계인 2월혁명(당시 러시아의 율리우스력으로는 2월)이다. 이는 같은 해 11월,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이 이루어낸 10월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쏘아 올린,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완성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내전을 거쳐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711년 2층 목조의 첫 겨울 궁전을 건설한 표트르 대제는 두 번째 동궁에서 죽었고, 세 번째는 표트르의 두 번째 아내인 다음 황제 예카테리나 1세(1684~1727)가, 네 번째는 표트르의 딸 엘리자베타 여제(1709~1762)가 건설했다. 1천 개 이상의 방과 사방에 출입구를 낸, 러시아 바로크 건축의 절정이라 불리는 건물이 오늘의 겨울 궁전이다.

 

예르미타시, 예카테리나 여제로부터 시작

 

박물관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으나, 서구의 유명 예술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한 이는 엘리자베타 여제였는데 현재의 거대 박물관으로 발전하는 주춧돌을 놓은 이는 그의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였다. 계몽 군주 예카테리나가 1764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부채 상환금 대신 받은 225점의 그림이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1차 수집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4천 점 이상의 회화 작품을 사들였고 건물을 이어 소장 공간도 늘여갔다.

 

우리는 오전 내내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한국어 안내를 신청하지 않아서 키릴 문자 아래 병기된 로마자를 읽으며 다니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것은 ‘관람’이라기보다 기웃거렸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박물관 안에서만 ‘27km를 걷는 대장정이라는 모든 전시물 관람’은 언감생심, 우리는 힘들면 쉬어가면서 쉬엄쉬엄 이방 저방을 옮겨 다녔다.

▲ 겨울궁전의 로비에서 2층으로오르는 호화로운 계단. 겨울궁전의 호화로운 방과 장식물은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예르미타시에서 찍은 액자 속 명화들. 왼쪽부터 고흐, 고갱, 피카소의 작품이다.
▲ 예르미타시가 소장한 렘브란트의 그림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1948년 모스크바 서양미술관의 근현대 유럽 회화 작품들이 대거 이관되면서 예르미타시 박물관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회화 작품을 소장한 박물관 중 하나가 되었다. 소장한 렘브란트의 그림은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양과 질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낯익은 그림이 나오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거로 예르미타시의 회화 작품을 주마간산으로 섭렵했다.

 

예르미타시는 전 세계 예술품, 스키타이의 황금 유물부터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로마의 유물들, 르네상스, 바로크, 인상주의를 거쳐 소비에트 시기의 예술품과 동양의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소장품 태반이 약탈 문화재인 루브르나 대영박물관과 달리 예르미타시에는 정상 경로로 수집 소장한 문화재가 많다.

 

물론, 이는 세계 곳곳의 문화재를 약탈한 해상제국 영국·프랑스와 달리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육상제국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그럴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예르미타시에도 오스만 제국을 짓밟은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약탈한 문화재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나치 친위대가 유럽 전역에서 약탈한 숱한 문화재를 고스란히 되빼앗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인류가 생산한 유무형의 중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수집·보관·전시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그것은 영토 확장에 골몰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행한 피지배 국가 문화유산 약탈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문화 식민주의’의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는 문명을 만들어 냈지만, 정복자는 문화를 약탈했다.”라고 한 토머스 칼라일의 지적은 예르미타시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민영환 방문부터 한러 교류 122년

▲ 겨울 궁전 뒤편의 정원. 어딜 가도 관광객으로 넘친다.

박물관에서 나와 네바강 강변의 한국식당에서 우리는 비빔밥을 먹었다. 재료나 모양새는 얼추 흉내를 냈지만, 익숙한 맛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국에서 7천km나 떨어진 도시에서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오래된 도시로 찾아드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는 뜻일 거였다.

 

▲ 민영환의 <해천추범>, 절판되고 E북만 판매중이다.

122년 전, 러시아로 민영환을 보낸 조선의 의도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 러시아가 패함으로써 수포가 되었고, 충정공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5년 뒤, 일본의 강제병합으로 조선은 멸망했다. 민영환의 알현을 받았던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2월혁명으로 제위에서 물러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이듬해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적군(赤軍)에게 총살되었다.

 

1884년에 조·러 통상조약으로 수교했지만, 조선은 멸망했고, 러시아는 1922년 소비에트 연합의 일원이 되었다. 1950년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지원은 받은 북의 남침으로 우리는 6·25전쟁을 치렀다. 오랜 냉전 시대를 거쳐 한국은 1990년 소련과 수교했지만, 소련은 이듬해 해체되었다.

 

소련의 국제적인 권리와 국제법상 관계를 기본적으로 승계한 ‘러시아 연방’과는 오는 9월 30일, 수교 30돌을 맞게 된다. 양국의 사증 면제협정으로 우리는 비자 없이 러시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2017년 3분기 기준 러시아를 찾은 한국인은 20만 6천 명(러시아 관광청)이었다.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쯤의 간격으로 서 있는 것이다.

 

 

2020. 7. 21. 낮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카잔 성당과 피의 구원 성당, 그리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제의 시대

표트르 대제와 페테르고프 궁전

버스와 거리,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공연

이삭, 파리에서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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