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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나무와 숲은 결코 ‘거저’가 아니다

by 낮달2018 2020.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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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 여행, ‘천리포수목원’을 다녀와서

▲ 천리포수목원의 수생식물원 부근. 고요에 묻힌 수목원의 공기는 차분했다.

지난 7월 16일부터 1박 2일 동안 나는 충남 서산과 태안 일원을 돌고 있었다. 여름방학에 들면서 동료들과 함께한 여행길이었다. 공주를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우리가 만리포를 떠날 때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우리는 폭우 속에서 예산 수덕사와 해미읍성을 둘러보았고 잠깐 비가 그친 틈을 타 서산 마애 삼존불을 답사했다. 가야산 중턱에서 만나게 된 예의 ‘백제의 미소’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삼존불의 아름다운 미소는 마음에 새겨 두기로 한다. 서툰 몇 줄의 글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어리석은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 서산 마애 삼존불. 이 신비로운 백제의 미소는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좋다.
▲ 만리포 해변.  해변에  2007년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관련한 기념 시설이 들어서 있다.

만리포 인근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우리는 태안군 소원면 의향리의 천리포수목원을 찾았다. 나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기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 외에 수목원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대구수목원은 내가 가 본 유일한 수목원이다.

 

천리포수목원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표를 사는 동안 우리는 차에서 내리며 객쩍은 대화를 나누었다.

 

“만리포 옆에 천리포인가? 불과 지근 거린데 9천 리 차이가 나네.”

“입장료가 8천 원이네. 너무 비싼 거 아냐?”

“8천 원어치의 가치가 있는 거로 봐야지, 뭐.”

 

매표소 너머 왼쪽이 바다였다. 거기가 천리포일 것이고 그 바다는 만리포와 이어질 것이었다. 오른쪽 소나무가 우거진 나지막한 언덕 사이로 난 탐방로로 들어섰다. 천리포수목원은 바닷가 주변의 야산과 언덕에 자연스레 가꾸어진 식물원이었다.

 

나무와 식물을 위한 수목원, 천리포수목원

 

숲 사이로 낸 탐방로는 군데군데 계단을 만들기도 하고 판자로 길섶을 표시하는 등 사람의 손길이 드러난다. 그러나 수목원에 닿은 ‘가공’은 그 정도일 뿐이다. 곳곳에 말뚝을 박고 말뚝 사이를 밧줄로 이어 길과 숲을 구분한 것이나 나무 앞에 해설 표지가 세워진 것은 ‘수목원’이니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이 표방하는 ‘사람을 위한 수목원’이 아니라 ‘나무와 식물을 위한 수목원’이라는 철학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잠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우리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수목원 안으로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일부러 가꾼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숲에 자라고 있는 나무와 풀꽃은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작은 연못 주변에는 수국이 활짝 피어 있었고, 가끔 뿌리는 실비에 번지는 연못의 파문도 신비로웠다.

 

천리포수목원에는 목련류(총 500종류), 감탕나무류(총 600종류), 동백나무류(총 400종류), 무궁화(총 250품종), 단풍나무류(총 300종류), 침엽수류 등 모두 13,2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름을 기억하는 나무나 풀꽃 1백 개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경이로운 숫자다.

 

미국인 칼 밀러의 40년 삶과 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은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 받은 곳이다. 국내 최대의 식물종을 보유하고 있는 이 수목원은 국내외 학술교류와 수목원 전문가 양성과정 등 연구·교육 중심의 민간 수목원이라고 한다.

▲ 천리포수목원 창립자 고 임산 민병갈 원장(1921∼2002)

정부로부터 공익목적 수목원으로 지정되기도 한 이 수목원은 1945년 해군 통역장교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한 미국인(칼 밀러 Carl Ferris Miller)이 수십 년 동안 투여한 열정적 삶의 흔적이다. 그것은 1962년, 불모지나 다름없는 모래언덕이었던 천리포 해변에 2ha의 토지를 사들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1979년 민병갈(閔丙渴, 1921~2002)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그는 서울에서 재개발로 해체된 한옥을 천리포로 운송하여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희귀종이나 국내 자생종은 빠지지 않고 수집했는데 특히 호랑가시나무와 목련, 단풍나무, 동백, 무궁화를 주요 5속으로 꼽아 관리했다. 그는 남해안 답사를 통해 감탕나무(Ilex)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교잡으로 생긴 신종 식물의 발견자로 국제학회에 이를 등록했는데 이 식물이 바로 ‘완도호랑가시’다.

 

천리포수목원은 전 세계 500여 종의 목련류 가운데 410여 종을 보유해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1997년 4월 국제목련학회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열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민병갈은 한 번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수목원 조성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2002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4월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그는 사후에 미국 프리덤재단(Freedo ms Foundation)에서 평화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우정의 메달을 수상했다. 이방인으로 이 땅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려 그는 2005년 국립수목원 안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되었다. 그가 천리포에 쏟은 40년의 삶은 고스란히 수목원의 나무와 숲, 그리고 공기로 남았다.

 

그는 ‘개구리’의 오랜 팬이었다고 한다. 그는 큰 연못과 논두렁에 개구리가 합창을 하는 때가 돌아오면 일과가 끝나도 숙소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년에 병이 깊어졌을 때도 개구리 울음소리가 커지는 밤이 되면 오래도록 연못가에 머물렀다고 한다.

 

수생식물원에는 ‘죽어서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하던 그를 기리는 안내판과 돌로 조각한 개구리 한 마리가 있다. 부들과 수련이 우거진 연못가 넓적한 바위 위에 납작 엎드린 개구리는 금방 튀어나올 듯한 자세로 탐방객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늘 ‘거저’ 돌려주지만, 자연은 결코 ‘거저’가 아니다

 

수목원을 한 바퀴 도는 데는 1시간 반쯤이 걸렸다. 그러나 사람의 손길을 덜 들인, 자연스럽고 예스러운 길과 나무와 숲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살갑게 다가왔다. 비가 오락가락하는데도 적지 않은 탐방객들이 잇따랐지만 수목원이 차분하게 연출하는 고요를 깨지는 못했다.

 

다시 매표소 쪽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코스, 수생식물원과 습지원 주변 풍경이 자아내는 정취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우리 일행이 탐방을 마치고 버스에 오를 즈음, 거짓말처럼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빗속에 멀어지는 천리포수목원을 오래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아주 손쉽게 나무와 숲을 바라본다. 그게 언제나 거기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세상에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외경으로 가꾸고 기른 나무와 숲이 적지 않다. 그것은 그냥 씨를 뿌리거나 묘목을 심으면 절로 자라고 무성해지지 않는다. 그 ‘울울창창’과 ‘무성’은 민병갈 같은 사람들의 열정과 겸양이 빚어낸 자연의 축복이다. 자연은 늘 거저인 것 같지만 결코 ‘거저’만은 아닌 것이다.

 

여행길에서 찍어 온 사진을 정리하고 보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천리포수목원을 다시 느꼈다. 오락가락하는 비와 습기 때문에 사진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나는 사진을 통해서 우중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복기해 냈다.

 

우리는 빗속에 만리포와 태안을 떠났고 돌아와서야 우리가 머문 이틀간 거기 내린 비가 319mm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리포 주변의 내마다 콸콸콸 흘러가던 황톳빛 흙탕물이 마침내 넘치지 않았기를 나는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 반도를 다시 찾으리라고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다짐했다.

 

 

2010. 7.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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