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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성장통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

by 낮달2018 2020.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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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카잔 성당과 피의 구원 성당, 그리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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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이사크 성당. 성 이사크의 축일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어서 그를 수호성인으로 삼은 표트르는 이 성당을 그에게 봉헌하였다.

우리 숙소가 있는 넵스키(‘네바강의 거리’란 뜻)대로는 네바강 강변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번화가다. 이곳은 원래 늪지대였는데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거리 주변에 카잔 성당과 성 이사크 성당, 피의 구원 성당뿐 아니라, 호텔,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모여 있다.

 

제정시대의 권력의 상징하는 30층 높이의 성 이사크 성당

 

성 이사크 성당을 찾은 것은 넷째 날, 페트르고프궁(여름 궁전)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이 성당은 성경 창세기의 ‘이삭’이 아니라, 달마티아의 ‘이사크’라는 성인의 이름을 딴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성 이사크의 축일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어서 그를 수호성인으로 삼은 표트르는 이 성당을 그에게 봉헌하였다.

 

성당은 표트르 대제 때 최초로 건립된 이래, 여러 차례 재건이 이루어지다가 알렉산드르 1세(1777~1825) 때 공사에 들어가 40년 후인 1858년 완공되었다. 성당은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30층 빌딩과 맞먹는 높이 101.52m에 이르는 웅장한 황금빛 돔과 하나에 64~114t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 성 이사크 성당은 높이 101.52m에 이르는 웅장한 황금빛 돔과 하나에 64~114t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인 성당에는 1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43m 높이에 주랑(柱廊, 여러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운 복도. colonnade)과 전망대가 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소련 정권이 박물관으로 운영해 왔다가 소련 해체 뒤 다시 예배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견학과 관광 서비스가 더 우선한다.

 

국외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건축물과 자연을 국내의 그것과 비교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유한 문화에서 비롯한 차이가 아니라, 그 대상의 우열로 이해할 일은 아니다. 피라미드와 신라의 황남대총을, 경복궁과 자금성, 금강산과 장자제(張家界)를 단순히 크기나 규모를 기준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얘기다. 장자제를 다녀온 사람들이 ‘거기 비기면 금강산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탄식하는데, 역대 중국인들의 ‘금강산 찬양’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 성 이사크 성당은 소련 정권이 박물관으로 이용했다. 소련 해체 뒤 다시 예배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견학과 관광 서비스가 더 우선한다.
▲ 성 이사크 성당의 천장. 12사도의 모습이 그려진 돔 천장의 모습은 이 성당이 40년이나 걸려 완공되었다는 사실을 긍정하게 한다.

신약과 구약으로 나뉘어 다양한 벽화가 그려진 벽과 천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벽화는 물론 중앙제단 위쪽의 스테인드글라스,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작품과 조각품들, 프레스코화, 동상과 부조까지 전시되고 있었다. 12사도의 모습이 그려진 돔 천장도 인상 깊었다.

 

성당에서는 박물관과 전망대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었는데, 그게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성당의 규모가 워낙 커서였을까. 사람에 밀려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자, 43m 높이에 주랑과 전망대가 나왔다. 전망대에선 멀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1946년에 이곳을 방문한 월북 작가 이태준이 쓴 것처럼 “혼자 솟은 집이 없고 혼자 낮은 집이 없”(소련 기행, 아래 같음)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오는 사람에게도 안도감을 주는 도시”라고 느꼈던 걸까.

▲ 성당의 43m 높이에 있는 주랑과 전망대로 가는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오르는 관광객들.
▲ 성 이사크 성당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종탑 위의 작은 돔. 중앙 돔 외에 사방에 황금빛 돔이 네 개나 된다.

1896년 외교 사절로 러시아에 온 민영환 방문 당시 이곳은 당시 러시아의 수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그러나 1946년 9월 25일, 조소(朝蘇)문화협회 사절단과 함께 작가 상허 이태준(1904~?)이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이곳을 찾았을 때 이 도시의 이름은 레닌그라드였다.

 

또, 니콜라이 2세의 치세였던 1896년에 러시아는 제정이었지만, 50년 뒤 월북 작가 이태준이 레닌그라드를 찾았을 때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합이었다. 민영환은 ‘인아거일(引俄拒日)’이라는 정책수행차 러시아를 찾았지만, 반세기 뒤 이태준의 방문은 “민주 조선 건설”과 “소련 인민과 조선 인민의 친선”을 위해서였다.

 

1946년 7월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이태준은 8월부터 두 달여의 소련방문 후 발표한 <소련 기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일러 “제정 때 서울이며 붉은 10월의 서울”이라 썼고, 러시아와의 만남을 “참으로 황홀한 수개월이었다. 인간의 낡고 악한 모든 것은 사라졌고 새 사람들의 새 생활, 새 관습, 새 문화의 새 세계였다”라고 술회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과 체제를 선택한 작가 이태준이 시종 흥분과 감동으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 바친 경의와 찬양이었다.

 

둘째 날,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나와 곧바로 찾은 곳이 카잔 성당이다. 모스크바 동남쪽 500km, 타타르스탄 지방의 도시인 카잔에서 발견된 성상화(聖像畵, 이콘) ‘카잔의 성모’에게 봉헌한 성당이라서 ‘카잔’ 이름이 붙은 성당이다. 이태준이 <소련 기행>에서 “꾸뚜쏘브(쿠투조프) 동상이 선, 이것도 나폴레옹과의 전승기념인 듯한 대 원주낭하(圓柱廊下)로 둘린” 곳이다.

 

1860년대 혁명의 열기에 들뜬 대학생들의 출정 집회 장소로 유명한 카잔 성당

▲ 카잔 성당은 96개의 코린트식 열주(列柱)가 넵스키 대로를 향해 반원형으로 서 있는 정교회 성당.
▲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운 카잔 성당에는 조국 전쟁에서 승리한 쿠투조프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카잔 성당은 96개의 코린트식 열주(列柱)가 넵스키 대로를 향해 반원형으로 서 있는 정교회 성당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해 세웠다. 나폴레옹과의 조국 전쟁(1812~1814)에서 승리한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의 유해가 안장된 곳으로 성당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카잔 성당 앞은 1860년대 혁명의 열기에 들뜬 대학생들의 출정 집회 장소로 유명한데,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겨울 궁전까지 거리 시위를 벌이곤 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러시아엔 차르의 전제정치가 계속되었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배제된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르 2세(1818~1881)는 1861년,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 해방령을 공포하여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로 칭송받은 농노제 폐지로 4천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이는 절반의 자유에 불과했다.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상실한 토지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받은 농민은 49년 동안 토지 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 이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적었으며, 상환금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결국, 이익은 귀족에게 돌아가고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로 편입되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에 동궁을 향해 행진한 노동자는 바로 이들이었다.

▲ 카잔 성당의 내부에는 거장들이 그린 이콘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카잔의 마리아상이 유명하다. 성당 이름이 카잔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농노 해방령 외에도 알렉산드르 2세는 배심원 제도가 포함된 사법 개혁과 국민 징병제를 시행하여 귀족과 평민에게도 병역을 부과하는 등 구체제에서 고착된 계급 간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적 개혁 정책을 폈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 혁명운동 조직인 ‘인민의 의지’ 활동가들이 던진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알렉산드르가 피흘리며 죽은 곳에 세운 피의 구원 성당

 

알렉산드르 2세가 중상을 입고 피 흘린 지점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1845~1894)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교회가 ‘피의 구원 성당’(예수 부활 성당)이다. 카잔 성당 맞은편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따라가면 나오는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길이 57, 높이 81m의 러시아 스타일의 정교회다. 25년간 공사하여 1907년에 완공된 교회는 건물 전체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그 면적은 교회 내외부를 합해 7천㎡나 되며 교회 안에는 알렉산드르 2세의 흉상이 있다.

 

25년이란 시간이 저런 아름다움을 창조한 것일까, 모자이크로 장식한 성당의 아름다움은 달리 설명하지 않는다.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이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추모한 것까진 좋았지만, 그의 시대는 퇴행과 반동으로 일관되었다.

▲카잔 성당 맞은편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따라가면 나오는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길이 57, 높이 81m의 러시아 스타일의 정교회다.
▲ 건물 전체가 모자이크로 장식된 피의 구원 성당은 면적이 교회 내외부를 합해 7천㎡나 되며 안에는 알렉산드르 2세의 흉상이 있다.

그는 전제군주제를 강화하고 수호하였으며 초기에는 선제(先帝)의 개혁 분위기를 이어갔으나, 곧 본격적인 반동 정치를 시행하였다. 의회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보통교육 등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마저 용인하지 않았으며 정치범들에 대한 혹독한 복수도 잊지 않았다.

 

그는 후계자인 아들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였는데, 니콜라이 2세(1868~1918)는 재위(1894~1917) 23년간 제국의 변화를 두려워하여 반동 정치와 전제정치를 이어갔다. 마침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듬해 그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적군(赤軍)에게 총살되었다.

 

이태준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일러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적 노동 형태를 창조한, 레닌의 꿈을 실현한, 인류사에 신성 격으로 나타난 노동자들의 도성(都城)”이라고 썼다. 이념의 투사로 변신하여 월북하긴 했지만, 순수문학의 기수로 불리던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정서적으로 묘사한 것일까.

▲ 피의 구원 성당을 세운 알렉산드르 3세는 이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추모했지만, 퇴행과 반동으로 일관하여 마침내 혁명을 불러왔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그리고 월북 작가 이태준의 소련기행

 

기차에서는 레닌그라드 주변으로 무너진 참호들, 부서진 토치카들, 불탄 촌락, 몽둥바리가 된 거목들, 파 헐려진 땅들, 격전의 자취가 판연(判然)했는데 시내에 들어오니 29개월 동안이나 탄우(彈雨) 속에 포위되었던 자취가 별로 없다.
- 이태준, 〈소련 기행〉 90쪽(온이퍼브, 2017)

 

이태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오며 확인한 ‘격전의 자취’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900일 봉쇄’(1941.9.~1944.1.), 레닌그라드 포위전이다. 히틀러의 독일군은 독소전 초기에 심리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전략·경제적으로 중요한 소련 제2의 도시를 우선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다.

 

872일간의 봉쇄로 물, 에너지, 식량, 공공 서비스 등이 중지되어 레닌그라드 지역에 심각한 기근이 들이닥쳤다. 그 결과 군인 150만 명 이상, 주로 어린이와 여성인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 대피 중 포격과 기아로 인해 사망했다. 레닌그라드의 경제적·인적 피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의 손실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900일 봉쇄'(1941.9.~1944.1.),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다룬 영화 <레닌그라드>(2009)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들은 다행히 도시가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에 간신히 시베리아의 예카테린부르크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성 이사크 성당의 황금 돔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성당의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인간의 인내가 시험 된 전투였다. 절망의 극한을 견뎌내고 포위전이 끝났을 때 시민들과 병사들 사이에 퍼진 말은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였다. 소련 당국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고로드 게로이(영웅 도시)’라는 별칭을 부여해 시민들의 용기를 기렸다.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는 전 시민이 동참하여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하여 몇 해 안에 옛 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복원해냈다. 1958년 레닌그라드시가 도시의 수리·복원과 관련해 유럽건축대상을 받은 것은 시민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국제 사회의 추인이었다.

▲ 872일 간의 봉쇄에도 살아남아 영웅 도시가 된 레닌그라드 방어 영웅기념관. 우리는 불행히도 여기 들르지 못했다.
▲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방어영웅기념비 앞의 병사 군상.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은 소련 해체 직전인 1991년이었다. 시민들의 투표를 거쳐 마침내 67년간 써온 이름 레닌그라드를 버리고 표트르 시절의 이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은 것이다. 1990년 유네스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 지구와 관련 기념물 군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이태준과 그의 책 <소련 기행>

이태준은 “29개월, 나이 두 살 반을 먹는 동안이나 굶주림 속에서 끝끝내 결정적 입성으로 알고 있던 독군을 물리쳐내었다”라고 이 포위전의 승리를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지만, 45년 뒤에 소비에트 연합이 해체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은 독립공화국들로 쪼개졌다.

 

1896년과 1946년에 각각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두 한국인의 뒷이야기도 쓸쓸하다. 일본을 저지하거나 견제할 목적으로 손을 잡으려 했던 조선과 러시아의 시도는 러일전쟁으로 수포가 되었고, 그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자결로 망국에 대한 책임을 대신 졌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기도 했던 작가 이태준은 해방 후 월북하였지만, ‘김일성 우상화’ 글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받다가 ‘미국의 앞잡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되었고, 끝내 강원도 장동 탄광 노동자지구에서 죽었다. 역사는 때로 덧없고 쓸쓸한 것이다.

 

 

2020. 7. 25. 낮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예르미타시, ‘피의 일요일’과 ‘2월·10월 혁명’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제의 시대

표트르 대제와 페테르고프 궁전

버스와 거리,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공연

이삭, 파리에서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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