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상트페테르부르크]왕족 휴양소에서 노동자 휴양소로, 그리고 …페테르고프 여름 별궁

by 낮달2018 2020. 8. 8.
728x90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④ 표트르 대제와 페테르고프 궁전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대궁전에서 내려다본 운하. 저 끝은 선착장이다.
▲ 이 궁전은 표트르의 명령으로 1714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동원하여 지은 황제의 여름 별궁이다. 대궁전과 분수대.

다섯째 날의 여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 서부에 있는 페테르고프 궁전이었다. 흔히 ‘여름 궁전’으로 널리 알려진 이 궁전으로 가는 방법은 육로와 해로 두 가진데, 딸애는 일찌감치 바닷길을 선택해 두었었다. 운임이 싼 대신 이동 시간이 긴 육로보다 비싸지만, 시간이 덜 드는 여객선을 고른 것이다.

 

표트르의 궁전 페테르고프, 황제의 여름 별궁

 

숙소에서 우버 택시로 이사크 성당 근처의 선착장으로 가서 우리는 배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네바 강변을 산책했다. 선착장에선 스웨덴의 공격을 방어하고자 네바강 하중도(河中島) 자야치섬에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가 건너다보였다. 군데군데 푸른 나무 사이로 요새 안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123.2m 종탑과 몇 개의 돔 지붕이 선명했다.

 

이 요새 조성을 계기로 표트르 대제는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죽어서 이 요새에 묻혔다. 21년이나 걸려 완공한 성당의 부속 황실 묘역에는 표트르 2세와 이반 6세를 제외한, 표트르 대제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의 차르와 황후 및 황족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 선착장 근처에서는 네바강 하중도 자야치섬에 건설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가 건너다보였다. 첨탑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종탑.

쾌속선은 네바강을 빠져나와 핀란드만 해안을 따라 달리더니 불과 3, 40분 만에 우리를 페테르고프 궁전의 선착장에 내려주었다. 여객선은 드문드문 자리가 남았었는데, 페테르고프에 닿으니, 어디선가 꾸역꾸역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궁전으로 가는 운하 옆길은 금세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국외 유명 여행지마다 한국인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된 시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개인 여행자만 가끔 만났었는데, 여름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중국인 단체 관광객처럼 단박에 국적이 드러나지 않는 걸 보면 떠들썩하던 단체관광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모양이다.

 

페테르고프는 독일어로 ‘페테르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페테르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사도 베드로의 독일식 발음인데, 러시아에서는 ‘표트르’라 불린다. 이 궁전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1714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를 동원하여 9년 동안 지은 황제의 여름 별궁이다. 분수와 폭포, 그리고 정원으로 유명해진 궁전은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페테르고프 궁전은 100헥타르의 드넓은 부지 곳곳에 오래된 숲이 펼쳐진다. 다른 무엇보다 숲을 통해 우리는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 아랫정원 분수대의 분수쇼. 중앙의 삼손 분수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 '폴타바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시설이다.

선착장에서 궁전으로 오르는 일직선의 운하 양옆으로는 크고 아름다운 숲이 이어졌다. 그 그늘을 밟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여정은 충분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물길의 끝에 대궁전이 버티고 섰는데, 그 앞의 아랫정원에는 세 개의 폭포가 있는 수영장이 있고, 수영장 안에는 삼손 조각상과 64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광객을 부르는 여름 궁전의 분수대

 

여름 궁전의 분수대는 세계에서 가장 큰데, 이 분수 시스템은 18세기에 설계되었으며 분수를 작동시키기 위해 펌프를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 분수는 5월부터 10월 중순 사이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물을 뿜는데, 이 시기에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리는 이유다.

 

1802년 건축가 고즈롭스키가 만든 삼손 조각상은 높이 3.3m에 무게가 5t으로, 금박의 사자 입에서 뿜어 나오는 물은 20m 공중에 솟는다. 스웨덴 왕의 문장(紋章)인 사자의 입을 찢는 삼손 분수는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 승전 25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졌다.

 

대분수를 장식하는 금상들은 올림포스 산정에 사는 그리스 신과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영웅들이다. 고둥 나팔을 부는 트리톤,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 주신 디오니소스에 제신의 왕 제우스와 꽃의 여신 플로라, 그리고 헤라,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 등이다. 이들은 모두 중앙의 삼손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과 영웅에 둘러싸인 인물이 뜬금없이 삼손인 분수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폴타바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시설이다. 승전일이 러시아 정교의 ‘성 삼손의 날’이어서 기념 분수에 삼손이 등장한 것이라고 한다.

 

오전 11시 정각, 3분가량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분수 작동식이 진행되었다. 대궁전 앞 정원의 모든 분수가 물을 뿜기 시작하는 장관에 운집한 관광객 무리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러시아 제국의 영욕, 성쇠 따위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볼거리에 이리저리 쏠리는 것이다.

▲ 대궁전 앞에서 바라본 분수대와 운하. 운하의 끝에 선착장이 있다.
▲ 분수대의 분수는 5월부터 10월까지 매일 11시 정각에 물을 뿜기 시작한다. 관광객들이 양옆에 구름처럼 모여 있다.
▲ 아랫정원 오른쪽에서 바라본 분수대와 대궁전.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건립된 이 러시아 황제의 여름 관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독일 군대에 점령되면서 파괴되었으나 뒷날에 재건되었다. 1946년 소련을 방문했던 월북 작가 상허 이태준(1904~?)은 ‘레닌그라드의 명소’인 ‘배제레꼬브’ 분수공원을 방문하면서 목격한 전쟁의 흔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태준이 찾은 노동자 휴양소 '배제레꼬브' 분수공원

 

9월 29일. 레닌그라드의 명소. ‘배제레꼬브’ 분수공원은 레시(市) 주변의 전적(戰跡)을 구경하는 것으로 더 흥미 있었다. 핀만(灣)을 향해 우리 이수(里數)로 한 50리 남쪽으로 나간다. 폭탄과 포탄에 허물어진 건물들이 아직 그냥 있는 것도 많다. *레시(市) : 레닌그라드시, 핀만(灣) : 핀란드만

 

공장지대에 바로 네거리에선 고층 건물이 명중된 것도 많아 그때의 초연 신산(辛酸)했을 광경이 눈에 떠오른다. 이윽고 시가를 벗어나서는 벌판인데 포탄들에 맞아 부러지고 불나고 해서 모지랑비처럼 된 수목들이 어떤 가지들은 잎이 피였으나. 대체로는 말라 죽고 말았다. 전차 궤도까지 깔린 다리들이 성한 것이 별로 없어 우리 버스도 가교를 많이 건넌다.

*모지랑비 : 끝이 다 닳아서 무디어진 비

    - 이태준, 〈소련 기행〉98쪽(온이퍼브, 2017)

 

페테르고프 궁전은 궁전과 분수뿐 아니라 인근 100여 헥타르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궁전 뒤편의 윗정원은 바다의 신 넵튠을 형상화한 분수를 포함하여 총 다섯 개의 분수가 있는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의 정원이다. 아랫정원 분수대 양쪽으로도 기하학적 구도의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진다.

 

오전 내내 머문 페테르고프 궁전에서 가장 마음에 살갑게 다가온 것은 궁전도, 분수도, 조각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태준이 ‘소슬한 원림’이라고 표현한, 드넓은 분수공원 곳곳에 펼쳐져 있는 울창한 나무와 숲이었다. 숲은 예카테리나 궁전의 정원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독자적인 풍경으로 페테르고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분수공원은 1716년 표트르 1세 때 스웨덴(瑞典)과의 전승기념으로 세운 왕족 휴양소였다. 지금은 노동자 휴양소인바 이번에 독군의 레닌그라드를 향한 대포 진지로 되어 있었고. 좋은 동상은 가져간 것도 많고 분수 시설에 파괴된 것도 많았다.

 

바다를 향한 언덕을 이용하여 불란서식 궁실들이 있고 그 밑으로 바다와 통하는 운하, 그 운하 좌우에 먼 고지대로부터 호수를 끌어오는 분수가 임립(林立)해 있다. 지금도 수축 중인데 60여 분수가 뿜고 있었으나 완전히 복구되면 2천여 분수가 솟으리라 했다. 소슬한 원림 속에 처처에 분수와 아담, 이브 등의 우미한 대리석상들이 창연히 서 있었다.

    - 이태준, 위의 책 98쪽

▲ 예카테리나 궁전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페테르고프의 정원.
▲ 분수공원 한쪽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 관광객들은 무심히 그 앞을 지나간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왕족의 휴양소였지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합은 이 아름다운 공원과 궁전을 노동자에게 되돌려주었다. 혁명은 어쨌든 노동자·농민의 세상이라는 약속을 지킨 셈이었을까. 페테르고프가 노동자 휴양소로 쓰인 세월은 언제까지였을까.

 

2018년의 페테르고프는 표트르와 이태준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졌을까

▲ 선착장 잔교에서 휘날리는 러시아 국기. 제정 러시아 때 쓰던 깃발을 다시 쓰고 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의 축소와 재구성, 특히 휴양지 무료 이용 축소 등은 페테르고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페테르고프를 찾은 관광객 가운데 내국인의 비율과 그중 노동자들은 얼마쯤 될까.

 

“사회주의 국제체제로부터 이탈하여 국민 국가 형태로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과정은 한 국가 단위체의 자립화가 아니라 세계시장의 편입 형태”(국민대 정재원)라는 게 러시아의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1946년 이곳을 찾은 이태준이 목격한 당대의 현실과 페테르고프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의 꿈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걸까.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온 선착장에는 백·청·홍 삼색의 러시아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1705년 표트르의 명령에 따라 국기로 지정되어 1917년까지 사용된 러시아 국기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이 수립되면서 다시 쓰이고 있었다.

 

“극소수 지배 계급의 부의 독점 및 폭압적 지배, 사회복지제도의 약화”(정재원)로 특징지어지는 러시아의 현재는 제정 러시아에 얼마나 가까워진 것일까, 머리를 갸웃하면서 나는 배에 올랐다.

 

 

2020. 8. 8. 낮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예르미타시, ‘피의 일요일’과 ‘2월·10월 혁명’

카잔 성당과 피의 구원 성당, 그리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제의 시대

버스와 거리,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공연

이삭, 파리에서의 낮과 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