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 산막이옛길과 ‘반(反) 자연’
‘호숫가 숲길’이라면 굳이 여행을 즐기는 이가 아니라도 솔깃한 유혹일 수 있겠다. 거기다가 그 길이 내륙 깊숙한 골짜기의 막다른 마을로 가는 산길이라면 흥미는 자연 배가될 수밖에 없다. 토요일 오후 두 시, 어중간한 시간에 우리 내외가 산막이옛길을 찾아 나선 건 그런 까닭에서였다.
지난 목요일 <한겨레> ‘ESC’에서 소개한 충북 괴산의 ‘산막이마을과 길’ 이야기다. 기사가 전한 ‘숲길 걷기’가 당겼던 것도 있지만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모처럼 쉬게 된 토요 휴무일을 적당한 여행으로 채우고 싶어서였던 데다가 괴산이 한두 시간에 닿을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이었던 까닭이다.
마을과 길에 붙은 ‘산막이’라는 이름은 뜻이 두 가지다. 하나는 ‘산으로 막힌 곳’, 다른 하나는 도자기 굽던 ‘움막이 있던 곳’이란 뜻이다. 산으로 막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산막이(산맥이)마을은 외진 두메산골이다. 예전에 도자기를 구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마을 주변에서는 자기 파편이 숱하게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산막이 길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있는 ‘산막이마을’로 가는 괴산호 물가에 낸 인공 길이다. 괴산호는 남한강 줄기인 달천에 1952년 우리나라 기술진이 건설한 첫 수력발전소인 괴산댐으로 조성된 인공호다. 호수의 물빛을 따라 낸 산막이 길은 위태하기 이를 데 없는 깎아지른 비탈에다 흔히들 ‘나무데크’라 부르는 나무판자를 깔아 낸 길이다.
오후 두 시가 넘어 길을 떠난 우리가 산막이길 어귀의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네 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기온은 높지 않았지만, 습도가 만만찮아서 살갗에 닿는 눅눅해진 공기가 부담스러웠다. 넘치는 주차장을 피해 도로 주변에 줄지어 차를 대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모이고 있었다.
산막이옛길은, 그러나 인공 길이다
저들도 우리처럼 신문 기사를 읽었던 것일까. 요즘 답사객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운동도 여가도 ‘전쟁’처럼 치르는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비슷한 복장과 차림을 함으로써 이 ‘레저시대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절대 싸지 않은 등산복도 요즘의 트렌드다. 집만 나서면, 이를테면 ‘아웃도어’에는 등산화가 기본이고, 배낭을 하나씩 메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개중에는 그쪽 방면의 내공이 저절로 드러나는 이들이 적잖지만, 대부분은 외양을 제대로 갖추어 입음으로써 ‘주류의 자유’를 누리려 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 틈에 우리 내외는 좀 이단자 같았다. 노타이 남방셔츠와 반바지에 샌들을 신었는데 아내는 어울리지 않게 파라솔까지 펴들었다. 기사에서는 산막이마을로 가는 3.5㎞의 산길 중 2.3㎞가 나무 데크 길이라 했다. 아내는 걸을 거라고 미리 말했으면 운동화를 신고 왔을 게 아니냐고 투덜댔다. 나는 짐짓 ‘가볍고 짧은 길’이라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이정표마다 붙은 이 길의 이름은 ‘산막이옛길’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파르고 위태하던 옛길 위에다 2009년에 새로 만든 길이다. 그러나 그게 뭐 대수인가. 옛길 위에 덮은 새길을 걸으면서 옛길의 정취를 느끼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그냥 앞사람의 뒤를 따르며 새로 난 옛길을 밟아가면 되는 것이다.
산막이길 들머리에는 참나무 ‘연리지’를 만난다. 연리지(連理枝)는 말 그대로 ‘두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중간에서 이어진’ 나무다. 그 생김새에 주목해 사람들은 ‘사랑의 상징’으로 연리지를 바라본다. 중년의 남녀가 연리지 앞에서 교대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심드렁하게 연리지를 지나쳤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오르자 잘 자란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저 끝자락에는 괴산호가 내려다보였다. 소나무 사이로 벤치, 출렁다리, 그네 따위의 시설물이 흩어져 있는데 그 앉음새가 어쩐지 요상하다. 필시 업자들의 아이디어이리라. 시설물은 곳곳에 미끈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
숲길엔 나무에 대한 ‘배려’가 없다
벤치는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앉히되 소나무가 ‘다리’ 노릇을 하는 형식이다. 길쭉한 판자 양쪽을 굵은 밧줄로 이어서 소나무에 친친 동여맨 것이다. 밧줄을 동여맬 소나무에 여러 겹의 천을 감아 놓은 것이 나무에 대한 유일한 배려다. 아내는 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본다.
산등성이에서 저 아래 숲길로 이어지는 비탈에 걸린 건 ‘소나무 출렁다리’다. 묘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다. 출렁다리는 중간 몇 군데에 나무 구조물을 설치한 것 외에는 모두 주변의 소나무에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리는 위아래는 물론이고 옆으로도 밧줄로 엮여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밧줄로 묶은 부분에는 벤치와 마찬가지로 여러 겹의 헝겊을 대긴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벗겨지는 걸 막느라 거기 억지로 두른 노란 비닐 테이프가 그 증거다. 이 숲길이 알려지면 질수록,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 늘수록 소나무가 고스란히 져야 하는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무판자로 만든 ‘데크’ 길은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호숫가를 따라 이어졌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있는가 하면 호수 쪽으로 돌출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전망대와 쉬면서 목을 축일 수 있는 샘터도 있다. 비록 주황빛 판자로 꾸민 인공의 길이긴 하지만, 바닷가로 늘어진 노송과 잔잔한 호심(湖心)을 일별하면서 걸을 수 있는 숲길은 스스로 호젓하다.
나무 데크는 비탈진 호숫가에 콘크리트를 박아서 만들었다. 호숫가 아름다운 풍광과 그것을 즐기기 위한 인간의 욕망쯤은 그러나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무줄기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서 물이 나오게 한 것은 좀 심했다. 비록 무한을 질주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금도(襟度)를 갖추어 할 터이기 때문이다.
준비 없이 걷게 된 걸 투덜대던 아내는 이내 나무판자 길을 따라 전개되는 주변의 경치에 마음을 빼앗겼다. 글쎄, 우리가 사는 경상도가 아닌 타관이어서일까. 펼쳐지는 풍광이 주는 느낌은 색다르다. 아내는 정작 가 보지도 못한 중국의 산길을 걷는 기분이라고도 말했다.
그래도 호숫가 숲길은 아름답다
각이 지긴 했지만 길은 평탄하다.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들도, 자식들의 부축을 받는 노인들도 힘들이지 않고 숲길을 걸어간다. 데크가 없는 한갓진 길에는 잘게 부순 나뭇조각들이 마치 양탄자처럼 깔렸다. 길 중간에 만들어 놓은 쉼터에 느긋하게 앉은 중년 부인 셋의 실루엣이 아주 정겨웠다.
분홍빛과 빨간색 셔츠를 갖춰 입고 저무는 호수를 바라보는 세 여인이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들은 한 동네의 동무들일까, 아니면 여고 동창생쯤이라도 되는 걸까. 나는 그들의 누리는 느슨한 시간을 깨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우리는 산막이옛길을 끝까지 가지 못했다. 해가 지기에는 한 뼘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산속의 낮은 짧은 것,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꼭 그렇게 봐서 그런 건 아닌데, 길섶에 선 소나무에 걸린 밧줄과 밧줄을 묶은 커다란 볼트와 너트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아쉽네. 언제 식구들과 함께 다시 한번 와요.”
“그려. 가을이면 좋겠네. 단풍 든 숲길은 정말 아름다울 거야.”
숲길 입구로 되짚어 오는데도 역시 소나무 출렁다리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저렇게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몸을 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시골 탓일까. 만약 이런 모습이 서울 같은 대도시였다면 눈 밝은 시민들의 질타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지방자치 시대가 전개되면서 바야흐로 백화제방, 만화방창의 시대다. 자치단체마다 조세나 관광 수입에 목을 매달게 되면서 골프장을 유치하고 거리만 있으면 관광 상품으로 포장해 파는 데 급급한 시대가 된 것이다.
자기 고장의 성가를 올리기 위해서 지자체들은 온갖 꾀를 짜낸다. 자기 고장이 고전 소설의 배경이거나, 주인공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거나 그런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 소송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지경이니 지역에 내놓을 만한 명승이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10년 6월 현재, 인구 3만6천에 그치는 괴산군이 ‘산막이옛길’을 숲길로 개발한 것은 오히려 뒤늦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골 동네는 유행하는 말로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던 듯하다.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게 ‘반 자연’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돌아와서의 일이다. 괴산군청 문화관광과로 전화를 걸었다. 몇 가지 궁금한 걸 묻고 나서 나는 산막이옛길에 있는 ‘반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유감이라고 말했다. 매우 겸손하게 전화를 받은 담당 직원은 가끔 산막이 길을 찾은 손님들이 항의하는 때가 있다면서 출렁다리 중간에 고정 구조물을 세운 것은 그래서라고 말했다.
전면적으로 소나무에 부담을 지우는 형식을 바꿀 계획은 없느냐니까 직원은 앞으로 고민을 해 보겠다고 말했다. 주차료도 입장료도 받지 않고 있는데 혹시 유료로 전환하려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계획은 전혀 없다고 했다. 시골의 인심은 어디나 같다. 꾀바른 도시였다면 일찌감치 주차장을 늘리고 입구를 막아서 돈을 받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오마고 했지만 산막이옛길을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다. 그러나 단풍이 흐드러진 시월 어느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그 숲길을 다시 걷고 싶다. 그때쯤에는 밧줄에 친친 매인 소나무 둥치들이 자유롭게 놓여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2010. 7.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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