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과 돌장승의 절집, 관룡사(觀龍寺) 기행
고통스러운 중생의 삶이 ‘이 언덕(차안:此岸)’에 있다면 바다 건너 ‘저 기슭’이 바로 피안(彼岸)이다. 그것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일’, 즉 바라밀다이다. 피안은 생사의 바다를 건넌 깨달음과 진리, 무위(無爲)의 언덕을 뜻하니, 열반 곧 니르바나의 경지를 이르기도 한다.
‘번뇌가 소멸하여 삶과 죽음마저 초월한 상태로서의 피안’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바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고통 없는 피안의 세상으로 건너갈 때 타는 상상의 배가 바로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반야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 ‘바라밀다(彼羅蜜多)’는 ‘피안의 세계로 간다’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절집은 흔히 깨달음을 얻어 도달해야 할 피안의 세계를 향하는 배와 같은 모습, 즉 반야용선의 모습을 보이는 데가 많다. 법당 어간(御間: 전면의 중앙 칸)의 양쪽에 용머리를 장식하여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뱃머리(선수:船首)라는 걸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법당이 곧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반야용선의 뜻을 살린 절집은 대체로 법당의 공포에 용머리와 용 꼬리를 장식하거나 법당 앞 돌계단에 용을 새기는 방식을 취한다. 앞의 방식은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이 취했고, 여천 흥국사 대웅전과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은 뒤의 방식을 따랐다. 어떤 방식이든 진리를 깨닫고 피안으로 가고자 하는 불자들의 서원은 다르지 않으리라.
7월의 첫 주말 일행과 함께 찾은 경남 창녕 화왕산 줄기 구룡산 기슭의 오래된 절집, 관룡사(觀龍寺)는 ‘용을 보았다’라는 절이다. 관룡사는 원효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신라 8대 종찰(宗刹)의 하나다. 전설에 원효가 제자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 삼지(月影三池)로부터 아홉 마리 용이 오색 채운이 영롱한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관룡사와 구룡산(또는 관룡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용은 예사 용이 아니라 극락정토로 가는 배, 반야용선을 이끄는 호위 용이었던 모양이다. 관룡사 요사채 뒤 숲길을 따라 20여 분 정도 산을 오르면 가파른 물매의 능선, 우뚝한 바위 봉우리에 석조 석가여래 좌상(보물 295호)이 산 아랫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여기가 바로 관룡사 용선대(龍船臺)다.
이 바위 봉우리는 기막힌 자연 법당이니, 곧 사바의 고해를 건너 열반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이다. 연화 좌대에 앉은 부처님 앞쪽이 용머리로 이물(선수:船首), 뒤편이 용 꼬리인 고물(선미:船尾)격인데, 물론 선장은 부처님이다. 부처의 인도와 ‘진리를 깨달은 지혜’(반야)는 사바의 쓴 바다[고해(苦海)]를 건널 단단한 바위 배도 깃털처럼 가벼이 하였으리라.
석불 앞에 서면 눈 아래 완만한 산기슭과 골짜기 사이로 마을과 논밭이 무슨 신기루처럼 펼쳐진다. 석가세존의 시선에 잡힌 사바의 풍경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터. 풍만하고 단아한 인상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그대로 자비로운 불심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불상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앉았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그러나 석굴암 본존불처럼 ‘마군(魔軍)을 항복시킨’ 용맹한 석가세존의 자비는 발아래 펼쳐진 산자락의 물결 너머 세간의 온갖 풍상과 번뇌를 잠재우고도 남음이 있다. 해돋이나 해넘이 때에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세상을 굽어볼 돌부처의 모습은 그 상상만으로도 장엄하다.
일행은 석불 뒤편의 평평한 바위 위에 퍼대고 앉아 간식을 먹으며 주절대기 시작했다.
“일주문 대신 세운 돌문 있잖아, 그거 얼마나 갈까…,불사는 계속될 텐데,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장담 못 하지. 절집의 모양과 품위는 주석하는 승려의 수준에 달려 있거든. 그걸 허물고 높고 덩그런 일주문을 짓고 싶어 안달이 나면 별수 없지.”
“불사를 해야 시주가 늘고, 그래야 또 다른 불사를 벌일 수 있다는 악순환이 여기라고 비켜 갈까….”
관룡사는 ‘신라의 8대 종찰’이었다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작고 아담한 전각들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절집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삼국통일 뒤, 원효가 일천 명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이룩한 대 도량’이었다는 내력을 찾기는 쉽지 않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이 절집은 349년에 창건되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사실이라면, 정사에 기록된 불교의 전래(372년)보다 23년이나 앞서니 역사를 고쳐 써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는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의 창건 설화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에 전해졌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그간 여러 차례의 중창·중건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堂宇)가 소실되었다. 1704년(숙종 30) 가을에는 대홍수가 구룡산 기슭을 덮쳤다. 금당과 부도 등의 유실은 물론 20여 인의 승려가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뒤 1712년에 대웅전과 기타 당우들을 재건하였다.
대웅전은 원래 본존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그러나 관룡사 대웅전(보물 212호)엔 비로자나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보수공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앞면, 옆면이 모두 3칸인 이 전각은 조선 태종 때(1401)에 짓고, 임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1617)에 고쳐 세웠다고 한다.
대웅전 아래 왼편 담장 앞의 약사전(보물 146호)은 임란 때 관룡사에서 유일하게 전화(戰火)를 면한 전각이다. 이 전각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보는데, 앞과 옆면이 모두 1칸인 자그마한 불당이다. 주심포 맞배지붕 양식의 이 전각은 간살(주간:柱間,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에 비해 지붕 폭이 훨씬 큰 특이한 비례를 보여준다.
그래서 얼른 보면 아이가 어른 모자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도 지붕 면보다 조금 넉넉한 너비의 석축 기단이 주는 안정감과 기단 아래 아담하게 선 삼층석탑을 내려다보는 안존한 배치 덕일까, 약사전을 바라보는 눈길은 금방 균형감을 되찾는다. 경내를 한바퀴 돌아와 다시 바라보면 처음 느꼈던 이질감은 어느새 시나브로 녹고 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관룡사는 산기슭의 높고 낮은 지면에 기대어 전각을 배치했다. 그래서인가, 유난히 돌담과 돌계단이 많다. 대웅전 뒤란도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이고, 높낮이가 다른 전각마다 높이를 맞추느라 돌로 축대를 쌓았는데 그 오밀조밀한 배치는 답답한 느낌을 주기보다는 정겹고 수더분하게 다가온다.
관룡사의 ‘수더분’은 돌담과 일주문을 대신한, 기와지붕을 얹은 돌문에서도 확인된다. 돌담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돌문과 함께 세간과 출세간을 경계 짓는 표지일 뿐이다. 기둥 대신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쌓았는데 나지막한 그 돌문을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낮아지고 겸허해질지도 모르겠다.
일주문 돌계단 아래 옛 오솔길에 한 쌍의 화강암 장승이 서 있다.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석표와 수문신(守門神)의 구실로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벅수는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남녀 장승 모두 꼭 다문 입술 사이로 돋을새김한 송곳니 2개를 드러내고 있는데, 짐작했겠지만 그래서 더 무섭거나 위엄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남 장승이 관모를 쓴 걸 빼면 두 벅수는 튀어나온 왕방울 눈, 주먹코, 콧구멍과 턱 등이 서로 닮았다. 특히 골짜기를 등지고 선 여장승은 왕방울 눈을 음전하게 내리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다 송곳니를 드러내긴 했지만 합죽한 입매 덕분에 억지로 얌전한 척하고 있는 장난기 넘치는 새색시처럼 보인다.
절에 잡귀가 드나드는 것을 막아주고 풍수지리적으로는 허한 곳을 기워주는 비보(裨補)도 겸하고 있다는 이 소박한 석장승은 바로 관룡사 ‘수더분’의 절정이다. 오후 6시,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구룡산 기슭을 고즈넉이 적신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종을 울리는 이는 놀랍게도 스님이 아니다. 그래도 그걸 구경하는 이들의 얼굴은 범상하기만 하다.
까짓것, 그럼 어떤가. 스님은 무언가로 바삐 출타하며, 모처럼 절집을 찾은 갸륵한 불자에게 종을 두드리는 기회를 주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 조그마한 절집에 서린 ‘수더분’이, 반야용선을 바라보는 사부대중의 소박한 믿음과 함께 오래 여기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절집에 들이닥칠 중창 불사의 바람이 낮은 돌담과 돌문을 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귀로에 올랐다.
2007. 7.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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