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③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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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일정은 예카테리나 궁전이었다. 우리는 버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푸시킨의 피서지인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는 예카테리나 궁전에 닿았다. 푸시킨? 그렇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를 쓴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1799~1837)이 한때 머문 이 도시는 1937년에 그의 이름을 따 푸시킨 시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푸시킨시에 있다
버스 승객들은 물론 대부분 궁전으로 가는 관광객이었다. 관광객은 우리가 탄 버스만 아니었다. 현지에는 전세 버스로 닿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떠들썩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딸애가 입장권을 사는 동안 우리는 거의 한 시간 반쯤 궁전 입구의 정원에서 기다려야 했다.
예카테리나 궁전은 표트르 대제가 황후 예카테리나(1684~1727)에게 선물한 여름별궁이었다. 본명이 헬레나 스코브론스카인 그녀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는 본부인인 황후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를 폐위하고 나서 두 번째 부인으로 그녀를 맞아들였다. 헬레나는 1712년에 황후에 오르면서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1725년 표트르가 요로결석으로 사망하자 표트르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2대 황제(재위 1725~1727)에 올랐다. 표트르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가 1718년의 반란 가담으로 황태자 지위를 박탈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 2세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와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 페트로브나는 뒷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1709~1762는) 뒷날 어머니를 이어 6대 황제(1741~1762)가 되었다.
표트르의 명령으로 공사를 시작했으나 완성한 이는 옐리자베타
예카테리나 궁전은 표트르의 명령으로 1717년 공사를 시작했으나, 완성된 것은 1743년 4대 황제 안나 이바노브나 때였다. 그러나 궁전은 1756년 5월 예카테리나의 딸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명령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라스트렐리의 감독 아래 옛 구조물을 철거하고 대규모적인 규모로 훨씬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견주어지기도 하는 예카테리나 궁전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호사는 따로 서술하지 않는다. 무려 7t의 호박 보석으로 치장된 ‘호박 방’, 표트르 대제 때 프로이센과의 동맹의 표시로 받은 선물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때 사라지고 말았다. 나치가 벽 전체를 뜯어갔다고도 하는데, 2003년 러시아의 기술로 복원하여 현재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호화의 극치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현란한 장식의 궁전 내부를 둘러보면서 관광객들은 그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함에 탄복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구경거리 이상이 되지 못한다. 글쎄, 예카테리나 궁전을 둘러보면서 러시아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예카테리나와 옐리자베타 치세의 영욕을 돌아보는 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도 여느 관광객처럼 탄성을 지르면서 러시아 제정의 위세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예카테리나 궁전 주변은 기하학적 평면으로 구성하거나 가로수를 일정한 방향으로 심어 축을 만든 프랑스식 정원이다. 프랑스 정원은 규칙적 질서와 정돈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오니아 양식의 하얀색 열주가 늘어선 회랑, 카메론 갤러리와 호수 주변의 정원은 풍경을 중시하는 영국식 정원이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자연주의 풍조의 영향을 받은 영국 정원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풍경을 살리려는 형식이라고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것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중시한 한국의 정원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역시 영국식이 취향에 맞다. 이오니아 양식의 흰 열주와 체스판 모양의 대리석 바닥, 양옆으로 늘어선 러시아 제국 영웅들의 흉상이 한데 어우러진 카메룬 갤러리의 회랑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의 풍경은 최고였다. 우리는 그 주변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이름은 예카테리나지만, 예카테리나 사후에 완공된 궁전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1756년 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였다. 1741년부터 21년간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그녀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난 여러 궁전을 차례로 세웠다.
제정 러시아는 1721년 표트르 대제가 자신의 칭호를 ‘임페라토르’라 칭하면서 그 전 시대의 차르제 러시아와 구분되는 전제군주 국가다. 황제의 칭호를 바꾸면서 새로운 국가로 출발했지만, ‘차르’ 칭호는 그 뒤 일상적·관습적으로 사용되었다.
1721년 표트르가 선포한 ‘러시아 제국’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멸할 때까지 196년간 14명의 황제가 다스리며 존속했다. 네 명의 여제(女帝) 가운데 옐리자베타는 계몽주의 문화의 전성기를 열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는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96)에 이어 두 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데 21년간 치세에 러시아가 강국으로 발전해 가는 기틀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국 러시아의 기틀을 놓은 옐리자베타 여제
아름답고 지적이며 발랄함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3대 표트르 2세와 4대 안나 치세만 해도 그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1740년 안나 이브노브나가 사망하면서 유언에 따라 안나의 조카 레오폴도브나의 아들 이반 6세가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5대 황제가 되었다.
레오폴도브나는 이반 6세의 섭정을 맡으면서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옐리자베타는 1741년 11월 지지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측근들을 체포한 뒤 관료들과 고위성직자들을 소집하여 자신을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옐리자베타는 아버지 표트르의 통치 원칙과 전통으로 돌아가려 했다. 내각회의를 폐지하고 원로원을 재구성하였지만, 그것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상의 통치는 고문과 총신들에게 맡겼다. 그 사이 부친이 시행한 주요 개혁의 일부는 철폐되었고 덕분에 지주들은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렸다.
살아생전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는 정치보다는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에 열중했으며, 유럽에서 값비싼 옷을 사들이는 등의 낭비로 러시아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켰다. 러시아 최초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교(1755)와 예술 아카데미를 세웠으며 엄청난 비용을 들여 겨울 궁전을 지었다.
한편 그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여,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1741년에 스웨덴이 침공했지만,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 싸워 이겨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다. 말년인 1762년에는 7년 전쟁에서 베를린을 침공하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러나 동맹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로이센을 붕괴시키기 전에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제위는 조카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표토르 3세는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이니, 옐리자베타는 이모다. 옐리자베타는 1742년에 일찌감치 표트르 3세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었는데,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친 프로이센 성향이었던 그를 후계로 지명한 것은 아버지였던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매우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표트르 3세는 옐리자베타의 상중에도 내내 사람들 앞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가 하면, 추도 기간이 끝난 후 즉시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을 중지해, 멸망 직전에 몰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을 구해주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우상처럼 숭배하고, 러시아군의 제복을 프로이센과 비슷하게 바꾸어버리는 등 자국의 이익보다는 프로이센의 안위를 더 걱정했다.
표트르 3세의 황후로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
표트르 3세는 실정과 방탕한 생활로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지만, 14살 때 결혼한 황후 조피 프리데리케는 친러시아 성향과 교양 있는 행동으로 점차 민중의 환심을 얻었다. 결국, 그는 1762년 1월 5일 제위에 올라 불과 6개월 후인 7월 9일,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스스로 제위에 오른 아내 조피에게 쫓겨나 폐위되었다.
제위에 오른 조피는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는 러시아의 계몽주의 문화의 전성기를 연 군주다. 러시아의 역사가 클류체프스키가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에 육체를 부여했다면 예카테리나 여제는 영혼을 불어넣었다.”라고 하였듯, 그의 시대는 문화‧정신적인 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예카테리나 궁전이 지나치게 꾸밈이 많고 시대에 뒤진다고 생각해 자신이 총애하던 건축가 찰스 카메론을 불러들여 건물을 새로이 단장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거주할 ‘마노의 방’을 짓도록 했다. 카메론 갤러리는 바로 이 건축가의 이름을 딴 건물이다.
그는 교육과 문학을 장려하여 음유시인과 철학자 등을 궁정에 초대했는데, 프랑스의 볼테르, 디드로 등과도 친구가 되었다. 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특히 러시아 발레의 진흥과 육성에 힘써, 러시아의 발레는 국가 제도처럼 그 지위를 확고히 했고 이는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치세에 러시아 안에 진보적인 성격을 띤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책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러시아의 계몽주의자들은 러시아 사회의 봉건주의·전제주의의 폐단과 지주들의 전횡과 민중의 고통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서유럽보다 훨씬 뒤처진 러시아를 문명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국민에게 문학, 예술, 과학을 장려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려고 힘썼다. 대규모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고 수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기본 노선이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인데도 지배 계층과의 타협한 그의 농민 정책은 사실상 농노제의 발달과 확장을 용인하고 있었다.
강해진 만큼 모순도 누적된 제정 러시아, 19세기를 향하다
깊어진 농노제에 대한 불만은 1733년 농노해방·인두세 폐지 등을 주창한 푸가초프의 농민 대반란(1773~1775년)으로 폭발했다. 2년 뒤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는 그가 신봉하고 있던 계몽사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의 틈새를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1785년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 특권 인가장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했고,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했다.
만년에 프랑스 혁명(1789~1799)이 일어나자 예카테리나 2세는 젊은 시절의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러시아에 도입하려 했던 자유 사상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유럽의 여러 군주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랑스에 군주제를 부활하자고 호소했으니 그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1793년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당황했고 예카테리나 2세는 건강이 악화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했지만, 1796년 예카테리나 2세는 여기 차르스코예 셀로의 별궁에서 요양 중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하였다 하여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혁명 이후까지도 예카테리나 2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결함은 그의 치세에서 심화하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황제가 된 그는 귀족들의 특권을 강화해 주어야 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자유로워졌다고 할 만큼 통제되지 않는 특권을 누린 것이다. 봉건 러시아의 누적된 모순은 가공할 폭발력을 키우면서 시대는 19세기를 향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궁전과 관련된 러시아의 역사는 역동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우리는 거기 매우 편안하게 거기 머무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드넓고 아름다운 정원은 우리가 낯선 나라의 낯선 땅에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작 러시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푸시킨이 1931년에 그가 아내와 함께 지냈던 집으로 꾸민 푸시킨 기념박물관을 들르지 못했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그걸 깨닫고 무릎을 쳐야 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여행이란 늘 그렇게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우리는 매점에서 산 토스트로 점심을 때웠다. 한나절 넘어 예카테리나 궁전을 돌아다닌 우리는 잔뜩 지쳐서 우버 택시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2020. 8. 1. 낮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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