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손가정’과 ‘정상 가족’ 구분도 ‘인권 침해’다
강원도 고성 군부대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지면서 이른바 ‘관심사병’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관심사병’이란 군 당국에서 부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이르는 말인데, 정작 그걸 판정하는 기준이 영 ‘아닌’ 것 같다는 게 요지다.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적응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기초생활 수급자’나 ‘한 부모’ 가정 출신 병사는 으레 ‘관심사병’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예 한 부모와 미혼모 단체 등으로 구성된 ‘한국한부모연합’ 회원들이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 1인시위에 나서게 되기에 이르렀다.
1인시위에 나선 한 부모들이 든 피켓에는 ‘오바마가 한국에 살았다면 그 또한 관심사병(병사)!’, ‘결손가정, 경제적 빈곤자 관심사병 분류는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다. 부모의 결별과 재혼으로 조부모 손에서 자란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한국군에 입대했다면 꼼짝없이 ‘관심병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군 생활 적응 여부와 상관없이 가족 형태나 경제적 수준, 성적 취향으로 구분해 낙인찍는 편의주의적인 발상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 “분류 기준의 ‘결손가정’ 표현은 부부 중심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빠져 다른 형태의 가정을 비정상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결손가정’과 ‘편부·편모’
‘결손가정’은 한동안 초중등학교에서도 익숙한 표현이었다. 언제부터 그게 ‘한부모 가정’이란 말로 대체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1980년대만 해도 학교에선 ‘결손가정’ 파악과 통계가 기본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 표현이 가진 의미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학년 초면 으레 그 잘난 ‘가정환경 조사’를 한다. 담임이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상태니 순전히 아이들에게 손을 들게 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안 계신 사람’,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사람’을 물으면 몇 명의 아이들이 쓸쓸한 표정으로 손을 들곤 했다.
교사들은 그런 아이들을 ‘편부, 편모’로 나누어 기록하고, 그 통계를 학교에 낸다. 그러면서도 정작 한부모 가정의 아이에게 주어지는 교육적 지원 따위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양친 중 한 사람이 없는 상황은 그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그것은 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군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부모 가정의 아이는 자신의 가족 상황 때문에 ‘관심 학생’으로 이해된다. 행여 그런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게 되면 그 원인이 ‘결손’이라는 걸 확인하는 절차다. 단지 양친 가운데 한 사람이 없다는 게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는 데 결정적인 흠결이 되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결손(缺損)’은 ‘이지러질 결(缺)’자에 ‘덜 손(損)’자를 쓰는 낱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느 부분이 없거나 잘못되어서 불완전함. ‘모자람’으로 순화.”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결손가정이란 낱말엔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없는 경우를 일종의 결함 상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물론 그 기준은 ‘양친 구존(俱存)’이 ‘정상’이라는 전제다.
우리 사회는 유독 이렇게 ‘갖추어야 하는 목록’이 많은 곳이다. 가정마다 양친이 ‘구존’(모두 살아계심)해야 하고, 아들딸과 형제자매를 고루 두어야 하고, 문벌과 학벌과 경제력도 갖추어야 한다. 예의와 인품도 갖추어야 하는 목록의 하나다.
표준은 때로 ‘배제의 준거’
갖추어야 하는 게 많다는 것은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문화’가 있다는 뜻이다. ‘표준’은 단순히 어떤 분류의 기준으로만 기능하지 않고 그 ‘경계를 벗어나는 상태’를 ‘폄하’하거나 ‘배제’하는 준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표준에 부합할 경우는 ‘정상’이고 ‘완전’한 상태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경우는 꼼짝없이 ‘비정상’, ‘불완전’ 상태로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유달리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장애나 성적 소수자, 혼혈인,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다. 결혼과 출산, 양육 따위의 선택적 삶도 성인이면 으레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이유도 같다.
5만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 로 신사임당이 선정된 것은 이 모든 논의를 웅변으로 압축하는 사례다. 신사임당이 도안 인물로 선정된 것은 한국은행 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어진 어머니, 좋은 아내[현모양처]’의 성채를 넘지 못한 것이었다.[관련 글 : 다시 난설헌을 생각한다]
위대한 정승 율곡의 어머니를 떠나서 다방면의 예술에 능했던 독립적 자아로 신사임당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허난설헌은 당대의 탁월한 여성 시인보다는 ‘규원가(閨怨歌)’를 쓴 실패한 어머니와 아내로서 기억되기 쉽다. 여성으로서 사임당이 난설헌보다 더 널리 더 긍정적으로 기려지는 이유다. 그것이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신영복)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안 인물로 류관순 열사가 탈락한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백범과 함께 후보에 올랐던 류관순이 탈락한 까닭도 난설헌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류관순은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독립운동으로 순국한 여성이니 여성의 본보기로 기려지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류관순은 어머니가 아니라 열여덟의 처녀였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가 아닌 여성은 이 땅에서 여전히 미완의 존재로 인식된다. 남성이 혼인이나 자녀의 유무와 무관하게 그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여성에게 혼인과 출산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혼인하지 않은 여성을 ‘미완’ 또는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에도 역시 ‘결핍’의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 ‘성인’·‘여성’이면서 ‘아내’와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성으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지위를 갖지 못한 ‘결핍’의 상태로 인식되는 것이다.
장애는 완전한 신체나 정신의 결핍이고, 성적 소수자는 이성애를 기준으로 한 성 정체성의 결핍이다. 혼혈이나 다문화 가정은 이른바 ‘혈통’에서의 결핍이다. 한부모 가정을 ‘결손’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런 문화적 토양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의 표준(스탠더드 standard)을 중심으로 그 경계를 벗어나는 상황을 결핍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다른 한편으로 ‘다양성’과 ‘개별성’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혼혈인이나 성적 소수자를 사회의 한 울타리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차별과 폭력이다
사회의 진전에 따라 이혼도 개인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한부모 가정’ 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가정과 가족의 형태는 사회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진화할 것이니만큼 한부모 가정을 ‘결핍’의 관점으로 보는 인식은 극복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가끔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보수화 조짐 앞에 그런 기대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성 소수자의 사랑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사랑’의 정의를 바꾸었던 국립국어원이 1년여 만에 그 정의를 되돌린 것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사회로의 한 발자국을 되돌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사랑의 ‘사전적 정의’, 이성애로 돌아가다 ]
국어원의 퇴행적 조치에 대해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포괄하지 못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차별이자 폭력”이라 질타한 국제 앰네스티 대학생 네트워크의 비판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어떠한 상황에도 독립적 인간이 아닌, 가족 형태나 경제적 수준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일은 차별과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2014. 7.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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