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인사위원회 앞 노숙 항의
지난 7월 25일 오후, 나는 복원된 청계천 시작점 옆, 한 빌딩 앞 인도에 마련된 야외용 매트에 동료 50여 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길 건너 동아일보사 건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보수의 성채인 양 위압적으로 서 있었고, 끊임없이 오가는 행인들 너머 인도턱에 바투 세워 놓은 이동경찰서 차량(이른바 ‘닭장차’) 세 대가 차도에서 달려드는 매연을 막아주고 있었다.
지휘관인 듯한 사복 차림의 중년 사내가 주변을 서성거렸고 헬멧을 덮어쓴 대여섯 명의 의경들이 우리가 등지고 있는 건물의 현관 앞에서 방패를 앞세우고 마치 로마의 검투사처럼 서 있었다. 그들의 무표정한 눈빛 너머 현관 입구에는 ‘중앙인사위원회’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중앙인사위원회에 복직 교사 원상회복을 요구하기 위해 24일부터 현관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것이었다.
농성에 참여한 동료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희끗희껏하거나, 고단한 삶을 감내한 게 분명한 표정을 가진 4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는 중년들이었다. 가장 연상은 내년 2월에 정년을 맞는 우리 지역의 선배 교사였다.
곧 40여 년을 봉직한 교단을 떠나게 되지만, 그에게는 일시금으로 주어지는 소액의 퇴직금 말고는 연금의 혜택이 없다. 잃어버린 5년의 세월 때문이다. 거기 더러는 무표정하게 더러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들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합하면 꼼짝없이 수백 년이 될 게다.
배달되어 온 아욱국이 시원했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 차례 집회를 마친 밤 10시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 장마는 끈질기다. 예보를 통해 비 소식을 알고 있긴 했지만, 막상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모두 기분이 을씨년스러워졌다.
황급히 옆 빌딩의 발코니형 현관으로 대피했다. 어느 은행의 365일 코너였다. 고광도의 불빛이 눈부셨고, 강력한 냉방기 바람이 줄곧 뿜어져 나와 거기 잠자리를 정한 이들은 침구를 덮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숙인 것이다. 17년 전, 명동성당에서의 노숙 이후, 얼마 만인가. 그때는 음식마저 끊었었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매트 위에 가로세로 누운 동료들을 바라보던 이들도 작정한 듯 저마다 메고 온 가방과 배낭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비는 밤새 오락가락, 퍼붓다가 거치고 다시 퍼붓곤 했다.
빗소리와 심야에도 끊이지 않고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 속에서 나는 선잠을 잤다. 현관 가장자리라 오른쪽 다리 쪽에 가끔 빗물이 날려 오기도 했다. 실컷 잤다 싶어서 시계를 보면 1시간 반이, 또 실컷 자고 일어나면 고작 1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연하게 담배를 한 대 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만이었다. 담배를 끊은 지 벌써 이태가 훌쩍 지난 것이다. 인근의 지하의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김천 지역의 선배 교사가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우다가 내게 커피 한 잔을 권했다. 밤의 커피에 예민한 편이라, 잠깐 주저했지만, 까짓것 새 잠은 글러 버린 것, 달게 마시며 우리는 두서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난 지금 갈래. 서울역에 가면 열차가 있으니……. 그러시우, 하고 받았는데, 새삼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우리가 17년이나 싸워 왔는데, 아직도 싸워야 하나……. 말꼬리를 흐리며 그는 떠났다.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건 우리의 실존이다. 30대 초반의 혈기방장했던 청년들이 오십 줄의 중년이 된 게 현실이라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얽매고 있는 온갖 조건들은 꼼짝없이 우리의 실존이다.
2006. 7. 28. 낮달
한가위 잘 쇠고, 청승을 떠는 이유는 <교육희망>(전교조 기관지)의 윤근혁 기자가 올린 기사 때문이다. 괜한 글을 올리는가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으로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나는 1989년에 8월에 학교를 떠났다가 정확히 1994년 3월에 복직했다. 공백은 4년 6개월이다. 물론 그 공백은 새로 산정한 내 호봉에 포함되지 않았다. 2007년 현재 내 호봉은 30호봉. 최초 임용이 늦어서 5~6년 후배들보다 호봉에서 뒤진다. 임금에서 월 40여만 원의 차이가 있는데, 다른 수당까지 포함하면 연간 7, 8백만 원 정도쯤 덜 받는다.
호봉 순으로 기재된 교원 명렬표에서 내 순위는 20번이어서 나는 ‘나이도 호봉 순으로 먹느냐’고 농을 하곤 한다. 물론 나는 나이순으로는 5번이어야 맞다. 복직한 해부터 지금까지 13년째 근무 중이니,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려면 앞으로 8년을 더 근무해야 한다.
연금수령 연한인 20년을 채울 수 있으니 나는 그나마 행운아다. 올 2월에 정년으로 물러나신 선배 교사는 1억에 훨씬 못 미치는 퇴직일시금을 받는 거로 30년이 넘는 교단생활을 마감했다. 물론 연금은 없다. 주변에도 조만간 정년을 맞을 선배가 계시는데, 역시 이대로라면 연금수령 자격 미달이다. 뵐 때마다 안쓰럽기 짝이 없다.
교육부에서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희생’ 운운하면서 초를 치고 있는 모양인데, 물론 1989년의 살벌한 공안정국 아래서 희생을 감수한 교사들은 보상 따위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1989년의 ‘사태’를 단지 ‘젊음의 열정이나 객기’쯤으로 바라본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한 시대와 그 시대를 관통하던 정신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대에 걸친 군부독재 아래 더는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계속할 수 없다는 교육의 중립과 해방 선언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굴종과 예속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교사 개인의 인간 선언이기도 했다. 1987년만 해도 교사는 전두환의 호헌선언을 반상회에 가서 홍보하라는 교장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사학에서는 여교사들이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쓰는 게 불문율이었고, 학교 도서관에는 싸구려 덤핑 서적만 가득했다. 학교 건물은 대개 부실 구조물이었다.
역사의 진전이란 반드시 일방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날이 모습을 바꿔가던 교육의 민주화는 여러 정치·사회·경제적 곡절을 거치면서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전교조도 합법 조직으로 바뀌면서 국민적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육과 학교의 민주화는 우리 사회가 이루어야 할 공동선이고, 그것의 가치도 변하지 않았다. 사회의 보수화나 우경화가 그러한 정의와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걸 위한 우리 사회의 지향은 계속되어야 한다.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이다. 여러 가지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 불쑥 ‘깎아 달라’고 머릴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희생(이라고 하자, 낯간지럽긴 하지만)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한 선배 교사들이 교육계의 선배로서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당시, 40대의 중견 교사로서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2, 30대 후배 교사들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버린 분들이다.
그들이 후배 교사들보다 낮은 대우를 받으며, 연금 혜택도 받을 수 없게 하는 것은 어쩌면 역사에 대한 무례일지 모른다. 역사란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이해와는 무관한. 정의를 지향한 시간의 집적이라면 말이다.
2007. 9.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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