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선글라스’, 장신구에서 눈 보호기기까지

by 낮달2018 2020. 7. 21.
728x90

선글라스 이야기

선글라스의 계절이다.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선글라스는 극소수의 한량들이나 끼는, 일종의 특권적 장신구였다. 5·16 쿠데타 후에 찍은 사진 속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와 그 휘하 장교들의 모습이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당시에 그걸 선글라스라고 부른 이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그걸 ‘색안경’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보안경’과 함께 지금 ‘선글라스’를 대체하는 우리말 순화어가 되었다. 그 무렵, 선글라스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라이방’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이웃 마을의 동무들에게서 들었다. 그들은 한창 멋을 부리는 형들 덕분에 새로운 유행어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안경’의 어두운 기억들

 

단순히 색안경과 동의어라고 알고 있었던 ‘라이방’은 선글라스의 대명사인 ‘레이 밴(Ray-Ban)’의 우리 식 표현인데 이는 국어사전에도 올랐다. 라이방은 미 육군항공단 소속의 장교 존 매클레인이 고공비행 때 강렬한 태양 빛으로 인한 심한 구토와 두통으로 고생하다가 한 회사에 의뢰해 만든 보안경에서 비롯했다.

 

바슈롬사에서 1920년에 개발한, 빛과 자외선, 적외선의 침투를 조절하는 녹색 렌즈가 바로 선글라스의 기원이다. 이 보안경이 조종사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유용하리라고 생각한 바슈롬사가 이 안경을 ‘라이방’이라는 정식 브랜드로 만들어 시판하기 시작한 것은 1936년이었다. 결국, 선글라스의 역사는 7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 선글라스의 대명사가 된 ‘라이방’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선글라스의 대중화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1990년대만 해도 선글라스를 낀 사람은 여전히 음험한 느낌의 ‘기관원’이거나 구태여 자기 신분을 감추고자 했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한여름의 해수욕장 같은 데서는 비교적 자연스러웠지만, 일상에서 선글라스를 늘 착용하는 것은 여전히 낯설었다는 뜻이다.

 

선글라스에 관한 내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논산훈련소의 악랄한 조교는 선글라스 속에서 병사들의 행동거지를 낱낱이 살폈고, 해직 시절에 주위를 서성대며 정보를 얻고 싶어 했던 지역 경찰서 소속 형사도 늘 색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자신의 눈을 구태여 감추는 형식과 그 무채색의 빛깔이 싫었다. 사람을 만날 때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인간적으로나 예절로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내가 선글라스를 쓸 일은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을 것이다.

 

햇빛을 마주 안고 가며 운전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도 햇빛 가리개를 내리는 거로 그런 상황을 견뎌냈다. 대여섯 해 전이다. 딸애가 선글라스를 선물했을 때 그걸 순순히 받아들인 건 그 같은 선글라스에 대한 편견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던 까닭이었을까.

▲  색안경은 음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유용한 수단이다. ⓒ 장봉군(2013.7.1.)

처음엔 운전하면서 가끔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안경의 짙은 렌즈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거나 사람을 만날 때면 언제나 나는 안경을 벗었다. 색안경을 낀 채로 누군가와 마주한다는 게 여전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도 색안경을 벗지 않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식구들과 낯선 사람들은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 앞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서기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나는 운전할 때와 우리 가족끼리 있을 때만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딸애의 말이다.

 

“제 친구 아빠는 사람들 없을 때만 선글라스를 낀대요. ㅋㅋ”

 

친구 아빠 얘기할 것도 없이 내가 그랬다. 나는 선글라스가 필요한 야외활동, 소풍이나 체육대회 같은 행사에 선글라스를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그나마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살갗을 보호하기 위해 선크림을 바르게 된 게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햇볕에 피부를 그을리는 데 무심했던 내가 선크림을 바르라는 충고를 받아들인 건 장시간 햇볕에 노출된 피부가 아리고 쓰리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였다.

 

필요는 용기를 낳는다. 나는 어느 날부턴가 미리 선크림을 바르고 야외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피부가 그을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장시간 햇볕에 노출한 피부가 아릿한 통증을 수반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좀 망연자실했다. 그것도 필경 노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선글라스 쓰기가 몸에 익으면서 그것도 강렬한 햇볕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만만찮은 예방행위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강한 볕 앞에서 눈을 가늘게 뜨거나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우리 몸이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는 활동이었다는 얘기다.

 

교회 노인대학의 노인들을 모시고 순천을 다녀왔던 아내는 동행한 수십 명의 교사 가운데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던 사람은 자신뿐이었다고 말했다. 거개가 3, 40대의 젊은 여성들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제 선글라스는 중뿔난 장신구가 아니라 바야흐로 생활의 필수품으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나의 ‘선글라스’ 커밍아웃(?)

 

지난달 초순, 김천에서 열린 방송고 연합체육대회에서 나는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끼었다. 천막 안은 햇볕에 달아 후끈했고, 거기서 바라보는 운동장에 쏟아지는 햇살은 강렬했다. 배낭에 선글라스를 챙기면서도 정말 쓸 일이 있으려나 했는데, 의자에 앉아서 운동장을 바라보기가 제법 힘이 들었다. 나는 무심히 안경을 꺼내 썼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선글라스를 쓴 내 모습을 주시하지 않았다. 제각기 선글라스를 착용한 다른 남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경기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그리고 간식과 점심을 먹었다. 안경을 끼기 전과 후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안경을 끼면서 멋쩍어할 자신의 모습을 저어했지만, 렌즈 너머 나는 내 흔들리는 눈빛을 감출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매우 맥 빠진 커밍아웃이었던 셈이다.

 

어저께는 퇴근하는데 정면으로 햇볕이 달려들었다. 나는 신호를 기다리면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햇빛 가리개보다 훨씬 수월하게 나는 전방을 주시하면서 편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어느덧 나는 한때는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이 색안경을 생활의 이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앞서 얘기한 노인대학 노인들의 순천 여행 중 일화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간 젊은 교사와 도우미들이 제각기 선글라스로 무장했다는 건 이미 말한 바다. 잠깐 상상해 보라. 다투어 멋을 내듯 갖가지 모양의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인들의 모습과 이들이 모시고 간 7, 80대 노인들의 모습을. 그들은 봉사자가 아니라 마치 감시자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이들의 모습에 어떤 안노인께서 분통을 터뜨렸단다.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먼.

노인들 모시고 온 사람들이

온통 시커먼 안경을 끼고 눈 한번 못 맞추게 하니,

이게 뭣들 하는 게야!

아무리 유행이 좋다고 해도

예의는 지켜야 할 거 아니야!”

 

다음에 펼쳐진 장면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사람들은 황급히 안경을 벗어 사죄하고 머리를 조아렸다나. 그 장면은 여전히 선글라스를 멋을 내는 ‘장신구’로 바라보는 노인 세대와 햇볕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고자 하는 젊은 세대 간 인식 차를 유감없이 드러낸 셈이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일제히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던 젊은이들이 노인 세대로 옮겨가면 더는 이 같은 인식의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2013. 7. 21.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