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271 ‘임을 위한 행진곡’에 담긴 건 피로 얼룩진 ‘역사와 진실’이다 정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내치겠다고?보훈처, 새 ‘오월의 노래’를 제정한다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진보진영의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민중 의례’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것은 그 노래의 역사성과 노랫말에 어린 격정과 비장미가 참가자들의 마음을 격동케 해 주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통하여 사람들은 5·18 민중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으면서 개인적 자아를 역사적 자아로 상승시키는 심리적 체험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공식 추모곡’의 지위를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보도(경향신문 12월 1일 자)에 따르면 “정부가 내년 광주 민주화 항쟁 30주년을 맞아 5·18 기념식장에서 부를 ‘5월의 노래’를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가사.. 2025. 5. 25. [2025 텃밭 농사] ③ 감자 꽃따기, 고추 지지대 세우기 보름여 만에 들른 텃밭- 감자와 고추*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묵히려 하다가 감자를 심었는데, 감자는 저 혼자서도 잘 자랐다는 얘기는 지난번에 이미 했었다. 마땅히 심을 만한 작물이 떠오르지 않아서 6월 말에 수확하는 데다가 따로 보살펴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감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4월 말에 들렀다가 거의 보름 만에 다시 텃밭을 찾았다. [관련 글 : 흉내만 냈는데도 감자는 무럭무럭 자랐다] 손바닥만 한 텃밭 두 곳에, 감자는 무성한 줄기를 뻗으며 왕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포기마다 하얗고 노란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아내는 바로 밭에 들어가 꽃을 따주기 시작했다. 감자 꽃을 따주는 건 잎이나 꽃에 영양분이 낭비되어 감자 덩이줄기(감자알)가 굵.. 2025. 5. 23. 2009년, 노무현 이야기 둘 노무현, 남은 자들의 성찰과 참회어느새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다. 2009년 그의 죽음은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를, 국민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쳤고, 그를 지지한 국민에겐 정치적 지지의 시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었다.그러나 여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노무현은 적어도 지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은 길이어서, 스스로 가야 할 길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길을 간 지도자다. 그를 따르려던 정치인들은 그 길이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가 떠난 지 8년 뒤에 그의 비서실장이던 ‘친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정치적 동지들이.. 2025. 5. 23. 카프 영화의 상징 김유영, 잊혀서 외로운 별로 남았다 구미 출신 사회주의 영화인 김유영 약전(略傳)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원호초등학교 뒷담과 도로 사이의 공터에는 기념비 하나와 화강암 조형물이 몇 기가 세워져 있다. 길에 바투 붙어 있어도 행인이든 지나는 차량에서든 눈에 띄는 자리가 아니어서 거기 그런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은 지역 주민들도 잘 모른다. 당연히 찾는 이들도 거의 없다. 카프 영화의 상징적 존재 김유영기념비의 주인공은 원호리 출신의 영화인 김유영(金幽影, 본명 영득, 1908~1940)이다. 그는 “영화를 작가의 것이 아닌 민중의 것, 사회주의적 교화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시각”(김종원)으로 ‘무기로서의 예술론’을 견지한 카프(KAPF) 영화의 상징적 존재였다.원호리에서 천석지기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구미 공립보통학교를 나와 대구 공립고등보.. 2025. 5. 22. 작약, 혹은 ‘초모란(草牡丹)’을 찾아서 [사진] 목작약(모란)은 지고 초모란(작약)의 때*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모란은 나무고, 작약은 풀이라는 점을 빼면 모란과 작약은 같은 미나리아재빗과 속하는 식물로 서로 많이 닮았다. 그래서 모란은 ‘나무 작약’이라 하여 ‘목작약(木芍藥)’이라 하고, 작약은 ‘풀 모란’이라 하여 ‘초모란(草牡丹)’이라 불리기도 한다. [관련 글 : ‘꽃 중의 꽃’ 모란(牡丹)과 작약(芍藥)] 꽃 중의 꽃으로 일컬어지지만, 모란은 일상에서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는 꽃은 아니다. 내가 오가는 봉곡동과 부곡동에 모란이 피는 집은 단 두 집밖에 없다. 꽃이 피어 있을 때가 아니면, 대부분 무심히 지나치기 쉬워서 그렇고, 꽃이 피어 있는 시기가 그리 길지 않아서이기도 .. 2025. 5. 21. ⑧ 소만(小滿), 밭에선 보리가 익어가고 여름의 두 번째 절기 소만(小滿)5월 21일(2025년도도 같음)은 여름의 두 번째 절기 소만이다. ‘작을 소(小), 찰 만(滿)’자를 써서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차다’는 뜻이다. 소만 즈음이면 더위가 시작되고 보리가 익어가며 부엉이가 울어 예기 시작한다. 모내기와 보리 수확 따위가 이어지는 농번기다. 에 ‘4월이라 맹하(孟夏) 소만(小滿) 절기로다.’라 노래했지만 사실 소만은 다른 절기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절대빈곤 시대의 아픈 상처 ‘보릿고개’[춘궁기(春窮期)]의 때다. 내남없이 지난해 추수한 양식은 바닥나고 올해 지은 보리농사는 미처 여물지 않은 상태 말이다. ‘보릿고개’와 자주감자 맥령기(麥嶺期)라고도 부른 이 어려운 시기는 특히 식량 수탈에 시달리던 일제 .. 2025. 5. 21. [오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역사 공부 ‘오늘’]1935년 5월 20일, 카프 해산1935년 5월 20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표방하며 활동해 오다가 일제의 탄압, 자체 내의 내분과 전향 등으로 휘청이던 사회주의 문학단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 자진 해산했다. 이날, 서기장 임화(1908~1953)가 동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카프 해산을 신고함으로써 1925년 8월 결성되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카프의 활동은 1931년과 1934년에 이어진 일제의 1·2차 검거를 통한 극심한 탄압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이어진 일제의 탄압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조직원들의 전향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해체에 이른 것이었다.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로 결성된 조선.. 2025. 5. 20. 그 도시가 맞은 45년 뒤, 더 선명해지는 ‘항쟁의 기억’들 광주, 2025년 5월 17일*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광주, 그리고 다시 45년2022년 기준 대한민국 내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2024년 12월 기준으로 총인구는 140만 8,222명이다. 한때는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光州) 이야기다. 통일신라 시기엔 무주(武州)로 부르던 이름이 광주로 바뀌게 된 것은 940년 고려 태조 때다.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와 함께 호남(湖南) 지방을 구성하였지만, 광주가 호남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광주가 이 지방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서울과 호남을 잇는 호남선(湖南線)이 광주를 관통하면서부터다. 광주는 1986년 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와 별도의 행정 체계로.. 2025. 5. 18. [오늘] 5·18, 무도한 군부의 ‘학살’에 맞선 ‘시민들의 응전’ 5월항쟁 뒤 43년, 여전히 ‘항쟁의 폄훼와 왜곡’은 끝나지 않았다*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5·18’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기에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5·18은 너무 ‘끔찍한 사건’이었다. ‘5·18 민주화운동’과 ‘광주 민중항쟁’ 사이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이 정치적 비극의 본질은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정치군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쏜 사건이다. 그리고 이에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키고자 분연히 봉기.. 2025. 5. 16. [오늘] <민족일보> 폐간과 조용수 [역사 공부 ‘오늘’] 1961년 5월 19일, 진보 일간지 강제 폐간1961년 오늘(5월 19일), 진보 성향의 일간지 민족일보>가 강제 폐간되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끈 5월 16일의 쿠데타 사흘 만이었다. 그것은 민족일보>의 발행인 조용수와 논설위원 송지영을 비롯한 민족일보 관계자 열 사람을 구속한 다음 조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용공 분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진보 인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노동자 탄압을 비판해 오던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1961년 2월 13일, 우여곡절 끝에 창간된 이 진보지는 5월 19일 92호를 마지막으로 석 달여 만에 폐간되었다. 1961년 5월 19일, 민족일보> 강제 폐간 4월혁명 이듬해 민족일보>는 진보.. 2025. 5. 16. 밀양, 2006년 8월(2) 초임 학교에서 가르친 ‘첫 제자’, 큰아기들을 만나다친구들과 작별하고 교동 사무소 앞 쉼터에서 만난 다섯 아이(부인이라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하겠지만, 여전히 그녀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사제’라는 관계망을 벗어나지 못한다)와 나는 성급한 안부를 나누는 거로 말문을 텄다. 영주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한 아이와 밀양에 살고 있는 친구를 빼면 나머지 셋은 꼭 1년이 모자라는 20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이들이 졸업의 노래를 합창하고 여학교를 떠난 게 1987년 2월이고, 지금은 2006년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던, 넘치는 열정 때문에 좌충우돌하던 청년 교사는 ‘쉰 세대’가 되어, 이제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불혹을 바라보는 성숙한 부인이 된 옛 여고생들과 .. 2025. 5. 15. ‘오월 광주의 진실’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나 시 ‘아아 광주여!…’와 , 그리고 대중가요 ‘바위섬’1980년 5월에 나는 대학에 복학하여 1학년이었다.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더니 바로 소집 영장(입영통지서)이 나와 입대해 33개월간 복무한 나는 1980년 2월에 만기 전역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당시 집에서 받던 를 읽으면서 복학생들과 함께 정국을 멀찌감치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겪은 1980년 5월 20대 초반을 군대에서 짬밥을 먹다가 돌아와 다섯 살 아래의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게 된 나는 무엇인가 위태위태한 일촉즉발의 위기가 내연하고 있는 듯한 학교 분위기가 마뜩잖았다. 단과대학 게시판에 날마다 울긋불긋하게 매직으로 갈겨쓴 대자보가 전해주는 낯선 소식들과 노천극장에서 시작된 집회의 함성 앞에 얼마간 주눅이.. 2025. 5. 14. 이전 1 2 3 4 ··· 19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