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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그 ‘신화의 이면’

by 낮달2018 2023.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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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한 지 2년 5개월여 만에 완공되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1970년 오늘, 1968년 2월 1일 첫 삽을 떴던 경부고속도로가 2년 5개월여 만에 완공되어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부산광역시 금정구를 기점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가 종점인 대한민국 고속국도 제1호선이고,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일본~불가리아) 구간의 일부다.

 

경부고속도로는 대전과 대구, 울산 등 3개 광역시를 거칠 뿐만 아니라 수도권 대도시, 지역 거점 도시들을 거치기 때문에 ‘국토의 대동맥’이라 비유되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수원·오산·천안·대전·영동·황간·김천·구미·왜관·대구·영천·경주·언양·양산·부산 등 주요 지역을 거쳐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토목사업 29개월 만에 준공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대국토 건설계획’을 밝힘으로써 일반 국민에게 알려졌다. 박정희는 대국토 건설계획을 발전시켜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1967~1971) 내에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를 완공한다는 시행계획을 입안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에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후보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은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잇는 사업으로, 기공 전에는 현실성 등의 이유로 야당이 반대하는 등 논란이 적지 않았다.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건설현장에 드러눕는 등 공사를 방해했다는 ‘유언비어’는 지금도 살아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군 건설공병단까지 투입하는 등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군사작전처럼 진행해 나갔다. 총 길이 428km, 총공사비 429억 원, 동원 인력 900만 명, 중장비 165만 대, 철근 5만 톤, 공사 중 사망자 77명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공사는 일정보다 1년을 단축한 29개월 만에 끝나고 전 구간이 개통되는 ‘신화’를 완성했다.

▲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박정희. ⓒ 국가기록원
▲ 박정희는 대통령선거 유세 중에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밝혔고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 국가기록원

이 신화는 추풍령휴게소 상행선 방향에 세운 30.8m 높이의 웅장한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으로 형상화된다. 뒷면에 건설부 장관이 바치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에 대한 칭송이 새겨진 탑은 추풍령 위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굽어보며 서 있다.

 

그러나 죽음으로 그 신화를 이루는데 이바지했던 노동자 77명의 희생을 기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거기서 한참이나 떨어진 금강휴게소 맞은편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다. 그것도 마치 ‘자신이 만든 고속도로를 훔쳐보는’ 모습으로.[관련 기사 참조]

▲준공기념탑(왼쪽, 추풍령휴게소)과 건설순직자 위령탑(금강휴게소)은 다른 위치에 세워져 있다.

‘신화’의 표리-희생자 77명의 진실

 

그러나 일흔일곱 명의 희생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은 엇갈리고 있다. “더 많이 죽었다”와 “감히 조작했겠느냐”가 부딪히고 있다.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파견된 육군과 건설부 출신 공사 감독관들의 모임인 ‘77회’ 총무를 맡은 이성규의 증언이다. [관련 기사 참조]

 

“숱하게 죽었다. 한 구간이 약 10㎞이다. 하루에 1000명 넘게 투입됐다. 지금은 제대로 된 장비가 있지만, 그때는 거의 다 사람 손으로 했다. 그렇게 2년 5개월을 했다. 사망자는 770명일 수도 있고 890명일 수도 있다.”
“왜 77명인가. 7월 7일(준공식 일자)에 맞춘 것이다.”
“사망자들을 엄선해 77명만 위령탑 명단에 넣기로 했다.”

 

같은 모임의 방동식 회장은 이에 반대한다. 그는 77명으로 추렸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무근, “현장에서 올라온 보고대로 처리했을 뿐 위에서 조정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진실은 둘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임의로 확정할 수 없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가 일정보다 1년을 앞당겨 완공된 것은 ‘군사작전’처럼 추진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사는 ‘빨리빨리’에 내몰려 휴일도 없이 매일 19시간 이상 강행군으로 계속되었으니 부실을 낳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개통 뒤 1년 뒤부터 보수공사가 시작돼 10년 뒤에는 보수비용이 건설 총비용을 상회할 정도라는 게 이 신화의 ‘이면’이다. [관련 기사 참조]

 

그러나 국가 기록은 승자의 것이다. 국가기록원은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 항목에서 고속도로 준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속도로가 미치는 효과는 물류비용 및 운송시간을 감축하여 생산원가를 저하시켜 생산성 향상 및 경쟁력 강화를 낳게 함은 물론 도시화 촉진, 국토이용 효율성 증진, 지역분화 가속, 생산효율 증진에 의한 물가안정 및 하락, 고속도로의 건설 및 이용 산업과 관련된 기술혁신, 지역 고유성의 붕괴, 개방화, 삶의 행태 및 가치관 변화 등 다양하다.

경부고속도로는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주거·산업의 절반 이상이 밀집된 노선으로 국가산업·경제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경부선은 ①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는 산업고속도로 ② 국토의 남북을 관통함으로써 지역 간 교류를 가장 확대시킬 수 있는 국가 기간도로망으로서의 역할을 담당 ③ 농어촌 개발과 지역 격차를 해소하고 국민에게 편익을 주는 생활·경제 고속도로이다.”
   - 국가기록원 ‘관련 기록’ 중에서

▲ 고속국도 1호선 표지

 

국가기록원은 경부고속도로가 ‘정신개혁에 기여했다’고도 기술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에 따른 가난과 폐허로 인한 패배의식과 상실감 그리고 좌절감이 팽배하였’던 국민에게 우리 기술력으로 완공한 고속도로를 통해 ‘민족의 저력’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신념 아래 에멜무지로 진행된 공기 단축 따위의 ‘빨리빨리’ 문화의 종착역은 때로 웃지 못할 희비극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1990년대 성수대교(1994)와 삼풍백화점(1995)의 붕괴라는 부끄러운 비극은 바로 그 같은 군대식 구호의 종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화의 어두운 이면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가 국민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고속도로는 공업발전을 가속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축적된 경험과 기술력을 통해 건설 산업의 발전을 기할 수도 있었다.

고속도로에 관한 ‘개인적 추억’

 

내 고향 마을 앞에는 낙동강과 나란히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기차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궁벽한 시골 마을은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마을 앞으로 몰려든 건설 중장비의 소음으로 화들짝 깨어났다. 그 공사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되어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 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각종 건설 중장비를 부리는 기사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건설 광경. ⓒ 국가기록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각종 건설 중장비를 부리는 기사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집마다 노는 방을 세 놓았고 이들의 식사를 위해 마을 안 주막이 밥집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쓰는 돈은 시골 마을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었다. 대신 시골 마을의 완고한 윤리 공동체도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외지에서 온 ‘노가다’들은 거칠기도 했지만 닳고 닳은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객지에 흘러온 혈기왕성한 사내들이었다. 이들은 늘 여자를 원했지만, 마을의 술집에서 그런 수요를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에 대한 이들의 욕망이 마을 주민들에게로 옮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년 후 이들이 떠날 때 마을에선 한두 명의 처녀들이 그들을 따라갔다. 더러는 혼인을 해서, 더러는 혼인보다 살림을 먼저 차린 상태로.

 

시골에서 더 좋은 신랑감을 찾기 어려웠던 처녀들에게 그들은 맞춤한 신랑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연애만으로 끝난 관계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 가운데 총각이라고 속인 유부남이 드물지 않았는데 이들은 순진한 시골 처녀들을 데리고 놀기만 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고속도로만 난 게 아니라 처녀들 몸에도 길이 났다’고 빈정거리는 근거다. 내 고향마을이 그랬을진대 400Km가 넘는 경부고속도로 주변 마을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온전히 그것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경부고속도로는 그 연도에 있는 시골 마을의 윤리 공동체를 허물어뜨린 실마리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고속도로가 허문 윤리 공동체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박정희가 추진하던 근대화는 가속화되었다. 마을에 남아 있던 처녀들이 하나둘 대구의 직물공장으로 구미의 일터로 떠나가게 되면서 농촌은 비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그렇게 변모한 고향은 내게서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내 고향 마을. 왼쪽이 낙동강이다. 마을쪽으로 방음벽이 세워져 있다.

왕복 2차선으로 건설되었지만 내 고향 앞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는 대구에서 구미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면서 3차선으로 확장되었다. 고속도로와 나란히 흐르던 낙동강도 이명박의 4대강 사업으로 본 데 없는 강으로 바뀌었다. 멋없이 넓혀져 흐르는 강물은 더는 우리가 예전에 멱을 감으며 놀던 그 강물이 아니다.

 

어쩌다 차를 끌고 대구에 갈 땐 나는 경부고속도로로 오른다. 대구까지 가는 데 고속도로만 타는 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도로에 차를 올려 고향 마을을 지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바깥을 기웃거린다. 이미 고향의 옛집은 헐리고 낯선 슬래브 집이 들어섰지만 나는 아련하게 내 유소년 시절의 우리 집을 그려보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단순히 자동차가 통행하는 길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국가기록원이 기술한 대로 우리에게 진전된 근대, 그 ‘삶의 행태 및 가치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자동차 전용도로가 단축한 것도 이동시간만은 아닐 터이다. 그것은 시나브로 우리의 고유한 정서와 삶에 대한 태도까지 바꾸어 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2016. 7.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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