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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민중 목판화의 오윤, 마흔에 지다

by 낮달2018 2024.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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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화가 오윤(1946 ~ 1986. 7. 5.)

▲ 오윤, <지리산 Ⅱ>(1984, 목판 채색)

1986년 오늘(7월 5일),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대표했던 화가 오윤(吳潤, 1946~1986)이 마흔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서슬 푸른 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자행되던 1980년대에 리얼리즘 미술운동으로 맞섰던 현대 판화의 선구자였다.

 

그는 단편소설 <갯마을>의 작가 오영수(1909~1979)의 장남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소설가 오영수는 경남여고 미술 교사였는데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바다가 보이는 부산 동구 수정동의 경남여고 관사에서 자랐다.

 

내성적이어서 조용한 아이였던 오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누나를 통해 시인 김지하를 알았고 1965년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미술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상징적 존재

 

그는 1969년 서울대 미술대학 선후배 사이던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현실’ 동인을 결성하여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제창하고,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 동인 제1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학 졸업 후 입대했다가 의병 제대한 뒤 그는 경주에서 전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흙을 다루는 기술을 공부했고 1977년에는 선화예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79년 11월,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오윤은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1980년대에 그는 김지하 시집 <오적(五賊)>과 이원수 전래 동화집 <땅 속 나라 도둑 귀신>의 판화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고 정치적 민주화 운동과 투쟁을 지원하는 포스터와 대형 걸개그림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뒷날 민중 판화의 전형으로 평가받게 되는 그의 목판화의 터치는 거칠고 투박했다. 대신 ‘간결하고 힘찬 선묘(線描)와 화면을 꽉 채운 밀도 높은 구성’으로 창조한 ‘개성적 도상’(이상 김미정)이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인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운동권 매체에 등장했던 그의 판화 덕분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의 판화를 ‘무섭다’고 평가하곤 했는데 그것은 날카로운 칼질로 태어난 강렬한 선이 만들어내는 느낌, 인물의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 따위에서 드러나는 긴장 탓이 아닐까 싶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삶과 예술의 결합을 주장한 80년대 리얼리즘 미술운동으로 그는 80년대를 관통한 사회적 모순에 감연히 맞섰다.

 

▲김지하 시집 표지의 판화 '소리꾼'

그는 리얼리즘 미술을 위하여 무속과 불교, 속화(俗畫)와 민화 등 전통문화에서 다양한 영감을 이끌어냈다. 전통 미술의 형식을 빌려 강렬한 선과 형태로 민중의 삶과 애환, 분노를 표현한 그의 판화는 가히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전통 미술의 형식을 빌린 독보적 민중 판화

 

오윤은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 계속 참여하면서, 1982년에는 석형산, 김호득 등과 함께 서대문미술학원을 설립하여 아이들에게 조소를 지도했다. 이후 잦은 음주와 흡연 등으로 건강이 악화하였고 1983년에는 간경화로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퇴원하여 민간요법으로 치료했으나 1984년에 다시 상태가 악화하여 그는 진도로 요양을 떠났다. 그가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85년이다. 이듬해인 1986년 5월 3일 오윤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다.

▲ 판화 '애비와 아들'(1983)
▲ 판화 '춤'
▲ 1985년에 낸 오윤 판화집 <칼 노래>
▲ 오윤의 목판화들
▲ 판화 '칼노래 4'(1985)
▲ 수채 스케치 '개도치'(1971)

판화집 <칼 노래>를 출간하고, 화실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던 오윤은 1986년 7월 5일, 갑자기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40세. ‘천재 판화가’로 불렸던 그도 끝내 수명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생전에 오윤은 자신을 ‘개도치’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개도치는 월북 소설가 벽초 홍명희가 쓴 대하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인물이다. 오윤은 ‘개나 도야지’를 뜻하는 ‘개도치’처럼 자신을 ‘좀 미련하면서 우직한 사람’이라 낮추어 부르는 걸 즐긴 것이다.

 

‘전통이란 전승되지 못한 단절된 세계의 발견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 일’로 여겼던 오윤은 ‘동학 정신에서 출발하여 남사당, 민화와 같이 열린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일에 짧은 생애를 바쳤다. 그의 미술은 80년대 이후 민중·민족미술을 풍요롭게 해 주면서 지금도 발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7. 7. 4. 낮달

 

* 참고

· <위키 백과>

· 김미정, ‘1960년대 민족·민중 문화운동과 오윤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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