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32년 7월 9일, 소설가 최서해 떠나다
1932년 7월 9일, ‘탈출기’와 ‘홍염(紅焰)’의 작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가 위문 협착증 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가난과 싸웠고, 그 빈궁(貧窮)을 문학으로 형상화해 왔던 서해는 끝내 그 가난을 벗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향년 32세.
최서해의 본명은 학송(鶴松), 서해(曙海)는 설봉(雪峰) 또는 풍년(豊年) 등과 같이 쓴 아호다. 그러나 그는 소월처럼 본명보다 이름으로 주로 불린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0년 아버지가 간도 지방으로 떠나자 어머니의 손에서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내었다.
서해는 유년 시절에 한문을 배우고 성진보통학교에 3년 정도 다닌 걸 빼면 이렇다 할 학교 교육은 받지 못하였다. 지독한 가난 속에 지내면서도 소년 시절부터 <청춘(靑春)>, <학지광(學之光)> 등의 잡지를 읽으면서 문학에 눈을 떴고, 춘원 이광수를 사숙(私淑)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서해는 극빈의 삶을 벗어나고자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갔다. 막노동은 물론이거니와 두부 장사, 나무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했지만 새 아내는 딸을 낳다가 죽었다. 이 시기에 그가 겪은 빈곤 체험은 곧 서해 문학의 자양이 되었다.
1923년에는 간도를 떠나 국경지방인 회령에서 잡역부로 일하기도 한 서해는 세 번째 아내를 맞았다. 1924년 그는 작가로 입신할 각오로 노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홀로 상경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분을 쌓은 춘원은 그의 글을 읽고 평문도 써 주고 격려해 주었다.
글을 쓰면서도 떠돌이로 노동을 계속하던 서해는 춘원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내가 도망가고 그의 어린 딸은 제대로 먹이지 못해 죽었다. 다시 서울로 간 서해는 월간 문예지를 만들던 조선문단사에 들어갔다.
서해는 1924년 1월 <동아일보> 월요 난에 단편소설 ‘토혈(吐血)’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단>에 “고국(故國)”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토혈’이 첫 발표 작품이라면, ‘고국’은 등단작인 셈이었다.
등단 뒤, 그는 작가로서 주목을 받으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고 현대평론사(1927), 중외일보(1929) 등에서 기자 생활도 했다. 그러나 천형 같은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서해가 모두가 꺼리던 기생들의 잡지 <장한(長恨)>을 편집한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월급이라야 제 한 몸 건사할 정도에 불과했으니 그는 돈 때문에 잡지사 사장의 외도 심부름까지 해야 했다. 심지어 동료 문인이 기생과 자는 방 윗목에서 죽은 듯 잠자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문단의 주목을 받은 작가였지만 가난은 끈질기게 삶을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단 이래 서해가 발표한 작품은 대략 장편 1편, 단편 35편 내외다. 그의 소설은 빈궁을 소재로 하여 가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중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 체험의 결과, ‘체험의 작품화’였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세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첫째는 일제 강점하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유랑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모두 <조선문단>에 발표한 작품이다. ‘고국’(1924), ‘탈출기’(1925), ‘기아와 살육’(1925), ‘돌아가는 날’(1926), ‘홍염(紅焰’(1927)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함경도 지방의 시골을 배경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노동자나 잡역부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이다. ‘박돌(朴乭)의 죽음’(조선문단·1925), ‘큰물 진 뒤’(개벽·1925), ‘그믐밤’(신민·1926), ‘무서운 인상’(동광·1926), ‘낙백불우(落魄不遇)’(문예시대·1927), ‘인정’(신생·1929) 등이 해당한다.
셋째는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문인들의 빈궁 상을 그린 소설로 ‘8개월’(동광·1926), ‘전기(轉機)’(신생· 1929), ‘전아사(錢迓辭’(동광·1927)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그의 작품에는 그를 괴롭히던 가난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 “탈출기”와 “홍염”은 빈궁을 소재로 한 소설로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어 ‘신경향파(新傾向派)’ 소설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 이론에서 비롯한 계급 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자신의 빈곤 체험을 극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빈곤 체험의 작품화, ‘신경향파 소설’ 소설로 주목
신경향파 문학은 작품의 결말을 ‘방화와 살인’이라는 본능적 저항으로 마무리하는 구조적 특징이 있었다. 이는 신경향파 문학이 제시한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의 한 방식이었지만, 한편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궁극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탈출기”는 간도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집을 떠난 가난한 지식인인 주인공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답하는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단에 가입해 전선에 있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는 벗에게 자신이 왜 집을 탈출해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가난에서 면하고자 간도에 왔지만, 주인공과 그 가족은 여전히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농사지을 땅도, 땅을 얻을 돈도 없고 농사지을 줄도 모르는 주인공에겐 일자리도 없다.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고 생선도 팔고 두부도 팔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는다. 임신한 아내가 주림을 견디지 못한 길바닥의 귤껍질을 주워 먹을 정도였다.
김군! 이때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적당할까?
‘오죽 먹고 싶었으면 길바닥에 내던진 귤껍질을 주워 먹을까, 더욱 몸 비잖은 그가! 아아,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한 아내를 나는 의심하였구나! 이놈이 어찌하여 그러한 아내에게 불평을 품었는가. 나 같은 잔악한 놈이 어디 있으랴. 내가 양심이 부끄러워서 무슨 면목으로 아내를 볼까?’
- ‘탈출기’ 중에서
이 극도의 궁핍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주인공은 마침내 자신이 맞닥뜨린 가난이 개인적 불행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전선에서 싸우기 위해 개인적 삶을 ‘탈출’하는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세상에 대하여 충실하였다. 어디까지든지 충실하려고 하였다. 내 어머니, 내 아내까지도―뼈가 부서지고 고기가 찢기더라도 충실한 노력으로써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속였다. 우리의 충실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충실한 우리를 모욕하고 멸시하고 학대하였다.
우리는 여태까지 속아 살았다. 포악하고 허위스럽고 요사한 무리를 용납하고 옹호하는 세상인 것을 참으로 몰랐다. 우리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의식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네들은 그러한 세상의 분위기에 취하였었다. 나도 이때까지 취하였었다.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어떤 험악한 제도의 희생자로서 살아왔었다―
(…중략…)
김군!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나부터 살리려고 한다. 이때까지는 최면술에 걸린 송장이었다. 제가 죽은 송장으로 남(식구들)을 어찌 살리랴? 그러려면 나는 나에게 최면술을 걸려는 무리를, 험악한 이 공기의 원류를 쳐부수려고 하는 것이다.
- ‘탈출기’ 중에서
‘탈출기’가 발표된 때는 1925년, 일제의 식민지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조선인들의 삶이 궤멸 직전이던 시기였다.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 증식(産米增殖) 계획(1920~1934) 등으로 조선인들은 전체 인구의 80%가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전 인구의 1/6이 유이민(流離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탈출기’는 그런 상황에서 살기 위해 조국을 떠나 만주로 간 조선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체험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1930년대 들어서 만주에 조선인이 만주인보다 4배나 많아졌는데, 이들은 소작농으로 간신히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과 달리 서해는 ××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대신 국내로 들어와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 소설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소설을 쓰고, 기자 생활을 해도 여전히 그는 가난했다. ‘탈출기’를 발표한 이듬해 그는 친구인 시조 시인 조운(1900~ ?)의 누이를 네 번째 아내로 맞았다.
그러나 새 가정을 이룬 지 6년, 1931년부터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서해의 삶은 안정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듬해, 서해는 위문 협착증으로 수술에 들어갔고, 수술 중 사망했다. 서른둘, 가난과 싸우며 살아온 소설가 최학송은 죽어서 비로소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의 장례는 최초의 문단 장례식으로 치러져 그는 망우리 공원에 묻혔다. 중랑 둘레길로 들어서 500여 미터를 오르면 길 왼쪽 ‘작가 최학송 문학비’가 세워진 비탈에 그의 유택이 있다. 돌보는 이도 없는가, 풀이 무성한 묘지에서 작가는 주변을 지나는 등산객들을 내려다보며 고즈넉이 잠들어 있다.
신경향파 문학은 카프(KAPF)로 발전
최서해의 소설에서 시작된 신경향파 문학은 1920년대 중반 전파된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면서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발전하였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의 결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카프는 조명희, 최서해, 이기영, 한설야, 임화, 안막, 권환, 김남천 등 당대의 젊은 문인들을 회원으로 둔 강력한 문인 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내용․형식’ 논쟁 등 창작 기법과 작가의 예술관을 둘러싸고 치열한 내부 논쟁을 벌인 카프는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해산하고 말았다. [관련 글 : 1935년 오늘-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해산]
2018. 7. 7. 낮달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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