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홀로’지만 ‘독도(獨島)’는 외롭지 않다

by 낮달2018 2025. 7. 7.

[울릉도·독도 답사] ② 독도, 그 화산섬은 이제 민족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독도 사진가 김재도 선생이 찍은 독도 사진. 아마 헬기를 타고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김재도

도동리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독도를 가는 배에 올랐다. 1시간 반쯤 걸리고, 접안할 수 있으면 배를 대고 입도하여 20여 분 머물다 바로 다시 배에 올라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독도 부근 해상의 기상 상황에 따라 접안 가능 여부가 판단되는데, 그간 회항률이 20%가 넘을 정도로 허탕을 치는 일도 잦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날이 너무 맑았으므로 우리는 아무도 그걸 염려하지 않았다. 모두 독도를 처음 찾는 거여서 그런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민문연 본부의 인솔자는 독도 앞바다의 파도가 거칠어서 많은 사람이 멀미로 고생하는 걸 봤다고 은근히 겁을 주었지만, 그게 귀에 솔깃하게 담기지는 않았다.

▲ 독도는 평균 수심 2천m의 해양 평원에 솟아 있는 화산섬이다. 동도(앞), 서도를 중심으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나무위키
▲ 서도의 모습. 가운데에 주민숙소가 보인다. 서도에는 주민, 울릉군청 직원 각2명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125년 전 칙령으로 영토를 공식 선포한 독도

앞선 글에서 썼듯이 우리가 울릉도를 찾은 것은 서울시 은평구에서 후원한 ‘독도 영유권 칙령 반포 125주년 기념 울릉도·독도 답사를 위해서다. ‘독도 영유권 칙령’이란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2일, 내각회의에 제출한,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가 10월 24일 의정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뒤, 10월 25일 반포된 ‘칙령(勅令) 41호’를 이른다.

 

‘칙령 41호’는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울릉도를 정식 지방 관제에 편입하고, 제2조에 울도 군수의 관할구역으로 석도(石島)를 명시했다. 석도는 우리말로 하면 ‘돌섬’인데 독도를 이르는 다른 이름이다. 19세기 말부터 전라도 지방 어민들은 ‘돌’을 ‘독’이라고 하여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다. 독도는 독섬(돌섬)의 ‘독’ 자를 한자 독(獨)으로, ‘섬’을 한자 ‘도(島)’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 대한제국이 독도를 우리 영토로 공식 선언했음을 보여주는 칙령 제 41호(1900년 10월 25일)

칙령 41호는 대한제국이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공식 선언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4년여 앞선다. 또 관보에 게재되지 않은 회람용 문서인 ‘시마네현 고시’와 달리 ‘칙령 41호’는 발효 2일 뒤 관보에 게재, 국내외에 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케시마(독도)는 주인이 없는 무주지이므로 일본령으로 편입한다’는 시마네현(島根縣)의 고시 40호는 1905년 2월 22일에 발령된 것으로,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령으로 확인되는 독도 영유권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이후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내린 지령인 SCAPIN(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에 의해 규정되었다.

 

SCAPIN 제677호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부속 지도에서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명확히 경계선을 설정하여 구분하고 있다. 이후 1946년 6월 22일 발표된 SCAPIN 제1033호 3항의 일부 내용[“웃츠로 섬(울릉도), 리앙쿠르 암(독도), 쿠엘파트 섬(제주도)은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 또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 ‘리앙쿠르’는 제3국에서는 독도 분쟁을 고려하여 1849년에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선박인 ‘리앙쿠르 호’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 암초(프랑스어: Rochers Liancourt, 영어: Liancourt Rocks)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독도선착장. 1997년 11월에 완공된 이 시설로 관광객들도 짧은 시간이나마 독도에 입도할 수 있게 되었다. 뒤쪽의 섬이 서도다.

1953년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독도에 순시선이나 시험선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독도에서 한국과 일본의 대립은 심화하였다. 일본은 독도가 시마네현에 속하며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 접근하는 것을 금한다는 표주와 팻말을 독도에 설치하고, 한국인의 독도 어로 활동을 위협했다.

일본의 도발로 1954년 독도경비대 창설

▲ 독도행 승선권. 독도까지나는 1시간 30분쯤 걸렸다.

이에 울릉도민이 자발적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 상주 경비를 시작했고 일본 순시선을 퇴거시켰다. 1954년 7월에는 독도경비대가 창설되어 국가 정책으로 독도 상주 경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독도경비는 유사시 국제적인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군대가 아닌 경북경찰청 소속 경찰이 맡고 있다. [참고 : 독도박물관]

 

독도(獨島)는 평균 수심 2,000m의 해양 평원에 솟아 있는 화산섬이다. 두 개의 큰 섬인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중심으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도와 서도 사이의 거리는 151m이다. 울릉도에서 뱃길로 20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일본 정부에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현재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우리 영토다.  

 

최종덕이 1965년 3월부터 최초 거주한 이래로 김성도 부부와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 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명 등 약 40명이 거주하고 있다. 2005년 동도에 대한 입도 신고제 도입 이후 2021년 4월 기준 약 200만 명이 방문하였고, 1일 평균 500명이 섬을 찾고 있다.

▲ 도동항의 선착장. 위가 타고 갈 독도행 배편인 씨스타 11호. 사람들이 저마다 태극기를 1장씩 들고 있다.
▲ 독도 선착장에 하선한 입도객들. 사람들이 들고 내린 태극기만이 아니라, 갈매기들이 싸 놓은 똥도 셀 수조차 없었다.

독도는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최동단 영토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무인도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는 가운데, 결국 경찰이 경비하고, 민간인들로 최소 필요 인원이 거주하는 유인도가 되었다.

일제의 억지 주장으로 깊어지는 독도 사랑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각별하다. 평소엔 국가나 민족의식 따위를 굳이 가져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의 억지 주장 앞에서 아주 강경한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게 전국민적 의식으로 확산하게 한 것은 1980년대에 나온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다. 일제의 영유권 망언에 분개한 방송국 프로듀서가 노래를 만들고 당시 개그맨으로 활동하던 정광태가 이를 녹음하면서 가수가 되었고 이 노래는 사람들에게 널리 불리어졌다.

 

아주 단순한 멜로디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독도에 관한 정보들이 흥미로운데, 이 노래는 80년대 이후 거의 국민가요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가사를 다 외지는 못해도 가사가 있으면 바로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이 노래에 익숙하다. 독도를 생각하는 한국인의 의식을 규정하는 이 노래 덕분에 독도는 외로운 섬이 아니라, 늘 사람들이 따뜻한 사랑을 보내는 섬이 되었다.

 

독도로 가는 유람선 씨스타 11호는 7시 20분에 도동항을 출발하여 9시쯤 독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안내 방송에서 바다가 잔잔하여 배를 댈 수 있다며 독도에서는 20분간 머문다고 알렸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쳤고, 배를 대자 서둘러 하선했다.

▲ 선착장에서 바라본 부채바위. 먼바다 쪽에서 보면 마치 부채를 펼친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 입도객들은 구경보다는 이른바 인증 샷 찍기에 바빴다. 앞의 작은 바위가 숫돌바위다.
▲ 선착장에서 바라본 서도. 가운데 아래 주민 숙소가 보인다.
▲ 선착장에서 바라본 촛대바위(왼쪽에서 두 번째)와 삼형제굴 바위.
▲ 선착장에서 올려다본 동도. 오른쪽에 화물 운반용 케이블이 보인다.
▲ 부채바위 아래 갈매기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울음소리가 고양이를 닮았다고 '괭이갈매기'로 부르는 이 갈매기는 독도가 주 서석지다.
▲ 칼을 갈 때 사용하는 숫돌과 암질이 비슷해 숫돌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숫돌바위. 독도 의용수비대원들이 생활할 당시 여기에 칼을 갈았다고 한다.
▲ 동도에는 선착장 말고도 독도등대, 위성 안테나, 독도 경비대 숙소 등의 시설물이 있다.

동도에 500톤급 선박이 접안 가능한 80m 길이의 주 부두와 20m의 간이 부두, 그리고 100m의 진입로로 구성된 접안 시설이 준공된 것은 1997년 11월이다. 접안 시설은 독도 방위와 물자 수송 등 독도 출입항 선박의 안전을 위해서 건설되었고, 준공 기념비도 세워졌다.

독도에 휘날리는 입도객들의 태극기

하선이 끝나자, 접안 시설은 금방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승객들로 가득 찼고, 그들 수효만큼의 소형 태극기도 곳곳에서 휘날렸다. 독도를 방문하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소형 국기를 하나씩 지녔고, 그 밖에도 사진 촬영을 위한 미니 펼침막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들 숫자보다 더 많은 게 접안 시설의 콘크리트 위의 괭이갈매기 똥이었다.

 

독도는 동해안에 서식하는 새의 번식지로, 특히 울음소리가 고양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괭이갈매기’로 불리는 갈매기는 선착장의 무법자다. 동도와 서도는 물론 촛대바위에까지 떼 지어 앉아 있고, 선착장 주변에는 괭이갈매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이들이 쉴 새 없이 떨어뜨리는 ‘똥 폭탄’은 쉽게 피해 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느라 선착장 주변을 이리저리 돌던 나는 다행히 그 폭탄 세례는 피해 갈 수 있었다. 거기서 무려 100컷 이상의 사진을 찍었지만, 카메라의 화각 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한정적이었다. 모두가 사진 찍느라 부산하여 걸음을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아서, 화각 안에 가능하면 사람들을 넣지 않기도 힘들었다.

 

사방 어디든 카메라를 옮기면 파인더 안에 들어오는 풍경은 모두 아름답고, 신선하고, 상쾌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서도는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 말고는 그 전모를 더듬어볼 수조차 없었다. 거리 때문에 24~70mm 렌즈의 화각 안에 동도마저도 다 들어오지 않아서 그걸 잘린 풍경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다.

▲ 독도의 명물 괭이갈매기. 선착장을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이들 갈매기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이렇게 사진 촬영을 허용한다.
▲ 지상에서 동도의 정상에 있는 독도경비대로 이어지는 운반용 케이블이 보인다.
▲ 숫돌바위의 반대편은 마치 얕은 굴의 형상을 하고 있다.
▲ 가끔씩 도로 울타리 철제 기둥에 앉아서 입도객들의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는 괭이갈매기.
▲ 숫돌 바위 위에 갈매기가 앉아 있다. 독도 주변은 갈매기 천지다.

20분을 짧았다. 서둘러 인증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던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배에 올랐다. 배가 움직이자, 나는 선창 밖으로 멀어지는 독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정작 사람들이 거주할 수도 없는 섬인데도, 독도는 한때 우리를 식민 지배했던 일본의 몰역사적이고 억지 영유권 주장의 대상이 되면서 비로소 민족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실체가 되었다.

 

고은 시인의 시 ‘독도’는 그러한 독도의 성격을 노래한다. “단 한 번도 갓난아기 없이”, “갈매기 울음조차/쌓이는 파도 소리에 묻”히는 독도는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그토록 오래 바윗덩이의 묵언인” 독도는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어도 독도는 모든 ‘겨레의 고향 ’이다

그러나 “먼 곳으로 길 떠나 / 함부로 돌아올 수 없을 때”, 즉 힘들고 외로울 때 독도는 “고향을 넘어/어쩔 수 없는 패배로부터 일어서서/하늘가 뜨거운 낙조에 담겨 파도 소리 이상”이 된다. 그래서 그곳은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끝내 고향이었다”라는 인식의 전환으로 시는 마무리되는 것이다.

 

독도는 비록 어떤 지역적 인연의 공간은 아니지만, 한국인 모두에게 고향이 될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비록 마음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독도는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고향’을 넘어 겨레를 하나로 묶는 영원한 안식처, ‘본향(本鄕)’의 의미를 획득하는 참된 고향이 되는 것이다.

 

독도는 1982년에 섬 주변의 바다에 서식하는 다양한 해양생물을 보호하고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자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라는 이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어 동식물 전체의 식생을 관리하게 되었다.

▲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위치한 수영공원 내 안용복 동상

이사부와 안용복, 독도의 도로명에도 남았다

2006년에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은 ‘독도 천연보호구역’의 문화재 구역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01필지 187,554㎡(지정구역)”으로 정정 고시하였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엔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일번지’(울릉읍 도동 산63)라고 노래하지만, 실제 독도의 지번은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산96이고, 도로명 주소는 독도이사부길 55(독도경비대), 독도이사부길 63(독도등대)이다. 형식적인 주소가 되긴 하지만, 동도는 독도이사부길, 서도는 독도안용복길로 명명했다.

 

이사부(異斯夫)는 6세기 대에 활동한 인물로 512년(지증왕 13)에는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고 562년에는 가야(加耶)를 정복한 신라의 무장이다. 안용복은 조선 후기 어부로 1693년(숙종 19)과 1696년(숙종 22),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호키주 태수와 에도 막부(幕府)를 상대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고기잡이에 항의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당시 조정으로부터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다는 범죄자로 비난을 받았으나, 18세기 이후 재조명되어 근대에는 애국계몽운동의 일부로, 일제강점기에는 강호 수역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 울릉군에서 대지를 제공하고 삼성문화재단에서 건물을 기증해 건립된 독도박물관. 국내 유일의 영토 전문 박물관이다.

울릉도에서의 마지막 날, 울릉읍 도동리 581-1에는 울릉군에서 대지를 제공하고, 삼성문화재단에서 건물을 기증해 1997년 개관한 독도박물관에 들렀다. 독도전망대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어 다소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래선지 박물관은 한산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영토 전문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썩 훌륭한 시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좀 더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방법의 모색이야말로 여전히 모든 박물관의 과제일 터이다.

 

 

2025. 7. 8.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