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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밀사 이준 분사하다

by 낮달2018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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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에서 고종 밀사 이준 분사

▲ 현지 신문 기사 사진 속의 세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인 1907년 오늘, 대한제국의 외교관 이준(李儁, 1859~1907)이 네덜란드의 헤이그 바겐슈트라트의 호텔에서 급서(急逝)하였다. 그는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었던 만국평화회의(정식 명칭은 헤이그회담, Hague Conventions)에 참여하여 외교활동 중이었다.

 

세 밀사, 헤이그에 가다

 

그는 을사늑약(1905)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하고자 헤이그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인도 지배를 묵인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대영제국의 방해와 다른 열강의 비협조 탓에 뜻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는 계획은 상동 감리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으로부터 입안되었다. 1907년 4월, 고종은 전 평리원(고등검찰청과 비슷한 기구)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그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 2회 만국평화회의(정식 명칭 헤이그 회담 Hague Conventions)

이준 외에도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1871~1917)과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1884~1924?)이 고종에게 신임장을 받았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했다. 6월 4일, 그들은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막된 것은 6월 15일이었다. 6월 19일, 이준 일행은 베를린에서 각국의 수석대표에게 보내는 호소문(항고사라고 불렀음)을 인쇄했다. 엿새 후인 6월 25일에 3인의 밀사는 마침내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 특사가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무사히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이 밀사로 파견한,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사였던 외교 고문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는 일제가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을 방해할 것을 직감하고 스위스와 프랑스를 경유하면서 한국 대표들이 회의 참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방 언론사들과 접촉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방해 때문에 평화회의 본회의에 끝내 참석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회의를 취재하던 프랑스·독일·영국·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 기자들에 의해서 보도되었다. 6월 28일, 이준 일행은 을사늑약이 일본의 무력에 의한 협박 아래 체결된 조약이라는 사실을 적시한 호소문을 일본을 제외한 회의 참가국 대표에게 보냈고 이는 같은 날짜의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게재되었다.

 

6월 29일 일행은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수석대표 넬리도프(Aleksandr I.Nelidov)를 방문했으나 ‘그런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면회를 거절당했다. 다음날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를 찾아가지만, 이들도 지원을 거부했다. 7월 1일에는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의 소개가 없으면 면담은 힘들며, 평화회의 참가를 인정할 수 없다’라는 통보를 받아야 했다.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려는 밀사들에게 이들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이양한 을사늑약을 이유로 회의 참가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이미 밀사의 존재는 그들이 접촉한 열강 측을 통해 일본에 통보되어 있었다.

 

7월 9일에는 기자협회에 귀빈으로 초청되어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주제로 연설할 수 있었다. 이 연설 내용은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어 주목받았으나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 세 밀사. 왼쪽부터 이준(1859~1907), 이상설(1871~1917), 이위종(1884~1924?)

밀사들의 좌절과 이준의 분사

 

이위종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 이틀 뒤인 7월 14일, 이준은 숙소인 융 호텔(Hotel De Jong)에서 급서했다. 이튿날,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이준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 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사흘 뒤인 7월 17일, 이상설은 호텔 주인과 함께 이준을 헤이그 교외의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향년 48세. 황제의 밀명을 받고 낯선 나라에 파견되었던 대한제국의 외교관 이준은 그렇게 덧없이 갔다.

 

7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급거 헤이그로 돌아온 이위종은 이튿날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를 떠났다. 같은 날, 일본 정부는 각의에서 결정된 ‘대한(對韓) 처리방침’에 따라 급파한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상이 경성에 도착했다.

7월 초, 밀사들의 헤이그 활동을 보고받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 없다.’라며 고종을 힐책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폐위를 준비시켜 왔다. 이토의 협박을 받은 뒤, 열린 어전회의에서 송병준과 이완용은 ‘밀사 사건의 책임은 고종에게 있고, 고종이 자결해야 국가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은 ‘경은 누구의 신하냐’고 책망하는 게 고작이었다.

 

고종의 폐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 고종과 황태자 시절의 순종

18일 밤, 하야시는 고종의 퇴위와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결정했다. 44년간 재위한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불과 4시간여 만에 퇴위당했다. 7월 19일 새벽 2시에 양위 선언이 있었고, 한 시간 후 조칙(詔勅)이 발표되고, 오후 2시 30분 새 황제 순종이 나와 신료들을 인견하고 즉위를 공표했다.

 

7월 20일에, 경운궁(현 덕수궁) 중화전에서 기상천외의 양위식이 강행되었다. 황위를 물려주는 고종도, 황위를 이어받을 순종도 참석하지 않은 대신 환관 두 명이 대역으로 나와 치른 하례였다. 그것은 이미 국가의 지위를 빼앗겨 버린 조선왕조의 슬픈 초상이었다.

 

7월 24일, 통감의 사저에서 일본이 한층 강력한 침략 정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법령권 제정·권리 임명권·행정구의 위임 및 일본인 관리의 채용 등에 간섭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7개 조항의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측 전권 대신인 이완용과 원안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일신협약에는 각 조항의 시행에 관해 협정된 비밀 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도 그 내용의 일부였다. 조약이 체결되고 일주일이 지난 7월 31일, 순종 황제는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고, 전국 각지에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준 열사의 장례는 두 달 후인 9월 6일에야 이준의 동생과 대한제국의 외교관, 친구, 헤이그 YMCA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질 수 있었다. 경각에 달린 조국의 명운을 위해 애쓰다 분사한 외교관의 장례는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준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고, 이듬해 유해가 조국으로 봉환되어 수유리에 안장되고, 장충단공원에 열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헤이그의 옛 무덤 자리에는 흉상과 함께 ‘일성 이준 열사의 묘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세 밀사가 머물렀고 이준이 순국한 호텔에 사단법인 이준 아카데미가 보훈처의 후원과 전경련의 협찬으로 1995년 이준 열사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이준열사기념관 누리집]

▲ 군대해산(1907). 한일신협약에 따라 당시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대한제국군의 모습 .

이준의 본관은 전주, 자는 순칠(舜七), 아호는 일성(一醒)이다. 함경남도 북청 출생으로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해서는 고향 부근에서 경학원을 설립, 교육 사업에 종사하다가, 상경하여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36세에 법관양성소를 1회로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검사 5년 차에 법무대신 이하영(을사늑약에 서명)을 탄핵하였으니 그 강직함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참가해 활동하였으며, 일본 유학을 다녀와 상동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 공진회(보부상단을 모체로 하여 발족한 혁신 단체)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할복자살’이든, 아니든

 

이준을 ‘열사’로 부르는 것은 그가 할복으로 분사(憤死)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제의 고문으로 숨진 유관순 을 열사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준 열사가 할복 자살하였다는 것은 ‘민족의 공분을 끌어내기 위한 허구’였다.[ 관련 기사 : 이준열사 할복자살의 진상은? 참조]

 

그의 죽음에 대해 국내 언론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대한매일신보>)렸다거나 “복부를 할부하였다”(<황성신문>)고 보도하였다. 반면 일본의 <진서신문>은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논란이 계속되는 이준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조사했는데,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베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동료 밀사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와 가진 인터뷰에도 ‘종기’를 앓았다는 대목만 있을 뿐 할복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준의 할복자살 소식은 이미 조선 전역에 알려진 뒤여서 그의 충정에 걸맞은 죽음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의 분사는 그의 죽음을 극적으로 미화하고픈 사람들의 믿음이 만든 결과인지도 모른다.

▲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 세 밀사가 묵었고 이준이 분사한 호텔에 1995년에 문을 열었다.
▲ 헤이그 뉴우 에이크엔다우 묘지 공원에 있는 이준 열사 묘적지
▲ 서울 수유리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소.

분사이든 병사이든 사인이 이준의 애국적 삶에 대한 평가를 저하하는 것은 아니다. 헤이그에서 겪어야 했던 절망과 좌절이 사인에 따라 무겁거나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 애국정신의 상징적 교재가 됐으며 국외 한인사회 공동의 정신적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이명화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책임연구원)일 뿐이다.

 

 

2016. 7.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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