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 연작소설 <푸른 혼>
김원일의 소설을 처음 만난 건 고교 졸업 후, 장편 <어둠의 축제>와 어느 문고판 단편집을 통해서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지라 ‘분단’을 다루고 있던 그의 장편보다 ‘파라암’과 같은, 매우 정교한 묘사와 탁월한 완성도의 단편들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한 여인의 파란 많은 삶을 묘사한, ‘썩어가면서 더욱 부드러워지는 살의 마비’라는 표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0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마음의 감옥"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삶과 그 진정성’을 성찰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에 감동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다. 이 소설은 빈민을 위해 살다간 아우의 순교자적 죽음을 계기로 핍박받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에 동참하게 되는, 방관자적 중산층 형의 인식 전환을 다루고 있는 중편이다.
마음의 감옥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서사 구조의 극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 곡진하게 숨어 있는 ‘삶의 진정성’ 탓이었다. ‘마음의 감옥’이란, 한갓진 가족애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와 도덕적 책무’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의 감옥>, 동시대인의 ‘연대와 도덕적 책무’
알다시피 그는 운동권도 아니고, 이른바 ‘민중 작가’ 계열에 드는 이도 아니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좌익 활동에 참여한 부친을 둔 ‘원죄’를 갖고 태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냉전 이데올로기와 ‘레드콤플렉스’가 개인과 일가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아 버린 세월이 우리 현대사였을진대, ‘빨갱이 자식’으로 세상살이를 배웠던 이들 작가의 성장사는 그것 자체로도 끔찍한 비극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한 그들의 대응 방식은 같지 않은 듯하다. 작가 이문열이 자신의 부친과 그 세대의 사상적 방황과 선택, 시대적 이념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적대시하면서 자신의 스탠스(stance)를 압도적 다수인 강자의 자리에 두었다면, 김원일을 비롯한 김주영, 이문구, 김성종 같은 이들이 선 자리는 그 반대편에 있거나 최소한 멀찌감치 그것과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문열이 아버지 세대의 삶과 시대를 부정하면서 반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극우 냉전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어정쩡한 이데올로그임을 자처하는 것은 그의 사상적 이념적 선택일 터이지만,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태도로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그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한, 그의 멘탈리티와 그가 필시 겪어 왔을 고통과 번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분단 시대의 작가로서 우리 시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숱한 모순과 과제에 대해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할 기회를 거부하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단순 반복 재생산에 나선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김원일, 부친의 시대와 이념을 수용하고, 시대의 보편적 과제로 승화한 작가
김원일은 부친이 살았던 시대와 이념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시대의 보편적 과제로 확대 상승시켜 낸 작가이다. 그는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이해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 대립을 넘어서고자 한 작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 그가 국가의 사법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인혁당 사건’을 다룬 연작소설집 <푸른 혼>을 펴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 투쟁을 조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 활동을 했다며, 대구·경북지역의 혁신계 인사 8명을 대법원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지 20여 시간 만에 전격 처형한 사건이다. 이후,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선포하는 등, 국내는 물론 국제 여론도 들끓었다. [관련 글 : 야만의 현대사-인혁당 피고 8인 사형 집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니 애비의 행실을 보더라도 정치 같은 데는 일체 한눈팔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귀따갑게 들으며 성장했다고 밝히면서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되었고 한국의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관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사건을 직면하자 그동안 몇 편 써 온 소설이 집안 가족사 일부를 상상력과 결합시킨 시대에 주눅 들린 겉치장임을 부끄럽게 돌아보았고, 당면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한다는 데 각성하게 되었다” 고 고백한다.
그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의식했던 듯하다. 2002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고 2003년부터 이태에 걸쳐 쓴 중편 여섯 편을 묶은 이 소설집의 내용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는 “처형당한 실제 인물에서 빌려왔고, 사건의 발단부터 종결까지 재판기록과 증언을 참고하여 사실에 근거하다 보니 동어반복을 피하는 방편으로 각 편마다 사건 자체와는 거리를 두어 착점과 형식을 조금씩 달리했고, 작가가 임의로 내용을 재구성하여 창작된 부분이 많아 주인공들을 실제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의 소명, 김원일의 ‘헌사’
그러면서 “아직도 구천에서 원혼의 넋으로 떠돌고 있을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여덟 분의 영전에 이승을 뜬 지 30주기를 맞아 이 책자를 바친다.”는 헌사를 잊지 않았다.
‘팔공산’, ‘두 동무’, ‘여의남 평전’, ‘청맹과니’, ‘투명한 푸른 얼굴’, ‘임을 위한 진혼곡’ 등 모두 여섯 편의 중편 중에서 ‘임을 위한 진혼곡’은 하재완의 부인을 서술자로 한 작품이다. 유족들이 ‘간첩’이거나 ‘빨갱이’로 손가락질받으며 살아야 했던 통한의 세월, 죽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개되고 있다. 작품의 행간마다 흥건히 고인 피눈물을 어찌 몇 줄로 줄일 수 있으랴. 이들에게 ‘나라’는, 그리고 ‘역사’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누기 어렵다.
마지막 재판이 벌어진 법정에서 이루어진 시노트 신부의 절규는 진실이다. “신성한 법정이라구? 여긴 그저 오물이 쌓여 있는 곳이라구!” 한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해서 역사와 진실과 정의가 유린되던 시대, 그게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일 뿐이다.
세월이 헛되지 않았는가. 2002년 9월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사건”이라고 결정했고, 이에 근거해 그해 12월에는 재심청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난해(2005) 12월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재심”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관련 글 : ‘인혁당’ 묘역에서 ‘통일’을 다시 생각한다]
소설집으로는 드물게 각 작품의 제목을 단 지면마다 케테 콜비츠의 조각과 판화를 싣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으로 불린 이 예술가가 절규한 진실과 20세기 한반도의 남쪽 반을 꿰뚫고 간 역사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것인지.
2006. 2. 4. 낮달
정말 세월이 헛되지 않았나.
오늘, 32년 만에 법정에 다시 오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1975년 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로 사형이 선고돼 숨진 고(故) 우홍선 씨 등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사법살인’이라는 규정은 진실로 증명된 셈이다. 그때, 그 단죄의 현장을 주재한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가공할 고문과 투옥의 공포정치를 통해 종신 집권을 꿈꾸던 독재자는 몇 년 후, 제 심복의 총탄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리고 그의 딸이 부친이 남긴 부채는 외면한 채, 아버지의 망령을 아우라처럼 두르고 차기의 권력을 꿈꾸고 있고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은 그녀에게 환호하고 있다.
역사, 지금 이 땅의 역사는 어디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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