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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뉴라이트와 조중동에 프랑스를 가르칩니다

by 낮달2018 2019.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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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용우 지음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역사비평사, 2008)

▲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용우 지음, 역사비평사, 2008)

새 정부 들면서 시작된 역사 인식의 퇴행은 예순세 돌 광복절을 지나면서 그 절정에 이른 듯하다.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3·1절 기념사)”맨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뒤 전개된 여러 상황은 별로 미래지향적 관계답지 못해 보인다.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적어도 새 정부의 대일 역사 인식은 여전하다는 걸 이름만 광복절이지 사실은 건국절로 치러진 8·15 행사가 증명해 주었다. 1948815일의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미화하고 싶어 하는 뉴라이트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했지만, 정부의 뜻도 기실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각종 위원회 정비, 예산 삭감, 인력 감축 등으로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를 드러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오랫동안 추진되어 온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 발표에 대해 이 대통령은 친일문제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친일파 청산에 대한 불편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나치 부역자처벌한 프랑스와 비교하면

 

829일 경술국치일을 맞아 발간하려던 <친일인명사전>의 편찬 일정도 연기되었다. ‘예상과 달리 이의신청이 다수 접수되고 친일인명사전 발행금지 가처분 소송이 제기되는 등 중대한 사유가 발생함에 따른 것이라는 게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설명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건국 60)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로 규정하는 대통령의 경축사를 가로지르고 있는 관점은 건국 신화 만들기에 바탕을 둔 역사관이라는 것은 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거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항일투쟁의 역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잘못 꿰어진 단추론을 다시 환기할 수밖에 없다. ‘건국이 아니라 해방(광복) 63돌을 맞는 오늘까지 이 땅을 덮고 있는 오욕의 역사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것이다. 그 미청산의 역사는 흔히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과 비교되면서 그 슬픔과 욕됨을 더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용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프랑스의 나치독일 부역자 숙청 문제를 분석한 연구서다. 프랑스사를 전공한 저자 이용우의 수년간에 걸친 자료 수집과 연구로 이루어진 이 책의 부제는 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실패했던 과거사 청산이 프랑스에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다.

 

책의 프롤로그는 청산해야 할 과거: 암울했던 시절(1940~1944)”이다. 이는 볼 것 없이 독일에 패한 프랑스의 독일강점기, 흔히 비시(Vichy) 체제기. 이 시기는 프랑스 과거 청산의 주 대상이 되는 시기로 대독 협력이 이어진 때다.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비시 지역에 성립된 이 정권은 흔히들 얘기하는 괴뢰정권은 아니었다. 국민의회의 투표로 성립한 이 정부의 수반은 1차대전의 영웅 페탱(Joseph Pétain) 원수였다. 비시 정권은 4년간 대독 협력이라는 이름의 부역에 참여했다.

 

의무노동제를 도입하여 65만 프랑스 노동자를 독일의 공장으로 보냈으며, 나치 독일이 적을 체포·처벌·제거하는 데 악명 높은 협력을 자행했다. 나치 독일의 적이란 곧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비시 정부 경찰의 협력으로 76천 명이 수용소로 끌려갔고 그중 단 3%만이 살아남았다.

 

준군사 조직인 프랑스 민병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탄압한 데 앞장섰고 부역자들의 대명사였던 파리 협력주의자’(콜라보 Collabo)들은 가장 극단적인 협력행위를 벌였다. 이 협력주의자들은 친독 정당을 이끈 정치인들과 파시즘을 설파한 문필가와 언론인들로 크게 나뉘는데 이 언론인들의 영향력은 정치인들보다 훨씬 컸다.

 

해방 후 여성 부역자들 머리 삭발식도

▲ 샤르트르시에서 독일군의 아기를 낳은 한 여인이 삭발을 당한 채 쫓겨나고 있다.
▲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파리에서는, 독일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깎이고 옷이 찢긴 채로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

파리 해방(1944.8.25)을 전후한 부역자 처벌은 재판을 통한 사법적 숙청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머리를 깎는 삭발식 등의 초법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어진 재판을 통한 처벌은 드골 정부의 명령부역자재판소, 공민재판부, 최고재판소 등의 법령·기구에 의해 계속되었다.

 

사법 숙청은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약 38천 명이 유무기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천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천 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형만 선고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Pierre Laval)에 대한 처리였다. 1차 세계대전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은 단 1표 차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드골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라발과 민병대 총수였던 다르낭(Joseph Darnand) 등은 총살되었다.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중형이 선고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들은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들이었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중 7인이 처형되었다.

 

어떤 형태의 단죄도 일관되게 진행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대독 협력을 이유로 유죄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대부분이 형기의 일부만을 채우고 석방되었고, 1964년이 되자 부역죄로 감옥에 남은 자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결국, 해방 후의 과거사 청산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된 셈이었다.

 

일견 끝난 것으로 보였던 과거사 청산은 그러나 1970년대에 다시 살아난다. 프랑스 경찰이 1만 수천 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동계경륜장 밸디브에 수용한 사건인 밸디브 사건을 시작으로 리옹의 도살자로 불린 독일인 바르비 (Klaus Barbie) 재판, 민병대 간부 투비에(Paul Touvier) 재판 등이 그것이다.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자연사, 또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사망함으로써 1998년에야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숙청뿐 아니라 그 기억의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다. 숙청이 역사적 팩트(fact)’로 과거라고 한다면 기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의 현재다. 모든 피압박 민족 해방사에서 귀감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곡절을 거치면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레 지적한다.

 

대독 협력자 숙청에 대한 프랑스의 여론과 기억은 숙청 시기든 그 이후든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다. ‘실망과 불만, 분노와 환멸이 당시의 반응이었다면 무관심과 침묵, 일부의 극단적 기억이 오늘날의 주된 반응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숙청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데 장애가 되면서 앞서 언급한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이 남긴 후유증? 우리에게는 사치일 뿐

▲ 히틀러와 페탱. 페탱 원수는 사형선고 뒤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나 감옥에서 죽었다.

좋든 싫든 프랑스의 사례는 우리의 일제 식민지배 시기의 역사청산과 비겨질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한국과 프랑스가 처한 역사적 차이를 주목한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명백한 식민지로 지배되었던 반면 프랑스는 독일이 원하는 우호적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일제는 36년간 우리를 지배했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점령 기간은 협력자의 수, 협력의 정도, 동화와 순응의 정도를 규정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세력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세력의 차이도 논의의 대상이다. 미점령 자유지역의 존재나 지하 운동의 규모와 활력이 해방 후 부역자 숙청의 집행 주체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또 해방의 방식과 양상의 차이도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저자는 이 차이가 비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든가 프랑스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 '리옹의 도살자'로 불린 게쉬타포 장교였으나 1983년에 볼리비아에서 송환되어 법정에 선 클라우스 바르비(오른쪽).

프랑스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명하다. 그것은 프랑스 부역자 숙청의 엄격·단호·철저한 성격이다36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폭압적 통치에 협력해 민족을 사지에 몰아넣은 이 땅의 민족반역자와 친일 부역자는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다. 민족을 팔아 안락한 삶을 누리던 이들은 해방 이후에는 여전히 기득권으로 남아 있으니 이 전도된 역사 앞에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남긴 후유증을 이야기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

  

광복이 아니라, ‘건국으로 현대사를 새롭게 포장하고 있는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기대는 이론이 고작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것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자학 사관이라며 승리 사관으로 대체하자는 일본 우익들의 의도와 절묘하게 조합되고 있다.

 

불행했던 시대를 지우고 가해와 지배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역사관은 보수신문들의 이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민족지로 거짓 포장된 조선·동아 양 신문은 추악한 대일협력 행위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도 주권 피탈기 아닌, 그들 사주(社主)가 우익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던 정부 수립기의 역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반민특위를 해산시킨 우익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가 뉴라이트의 속셈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부역 언론에 대한 단죄는 가혹하리만큼 엄정했다. 프랑스의 부역 언론인은 처형당하거나 중형을 선고받았고, 모두 538개의 언론사가 기소되고 115개사는 유죄를 선고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프랑스 역사는 적어도 자국민에게 나라와 민족에 반하는 부역은 단죄되리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20088월 현재,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에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이해가 아니라,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위해 시대와 힘에 기꺼이 순응하라고만 가르칠 뿐이다. 36년 피지배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묻어버리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가시화되고 있는 광복 예순세 돌을 보내면서 먼 나라 프랑스 현대사를 안타깝게 다시 뒤적여 본다.

 

 

2008. 8. 22. 낮달

 

 

뉴라이트·조중동에 프랑스를 가르칩니다

[서평]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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