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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37

「성탄제」의 김종길 시인 타계 1926 ~2017년 4월 1일 지난 1일, 원로시인이자 영문학자인 고려대 명예교수 김종길(1926~2017) 선생이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에 부인을 잃고 힘들어하다가 그예 뒤를 따랐다고 한다. 향년 91세. 내외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시어 유족들의 슬픔은 크겠지만 두 분은 인연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의 본명은 김치규, 경북 안동 출신이다. 1947년 신춘문예에 시 ‘문’으로 입선하며 등단했다. 그는 “서양 이미지즘 시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고전적 품격을 지닌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인이다. 나는 1980년대 초임 시절에 제4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그의 대표작 ‘성탄제’를 여고생들에게 가르쳤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 2020. 4. 1.
‘배뱅이굿’의 이은관 명인, 타계 1917~2014년 3월 12일 새벽에 자리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가 이은관(李殷官) 옹의 부음을 확인했다. 아, 그이……, 향년 97세라고 했다. 이태만 더 살았더라면 백수(白壽)인데……. 나는 아내를 툭 건드렸다. “여보, 이은관 옹이 세상을 떠났다는구먼. 배뱅이굿의 이은관.” “배뱅이굿? 아, 왔구나, 왔어. 그 영감님?” “그래. 아흔일곱 살이래. 장수했네.” “아, 사는 김에 백수하시지……. 아깝네.” 내가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부모님과 한방에서 잤는데 새벽에 잠에서 깬 어른들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그이의 ‘배뱅이굿’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구경하지 못하고 ‘앰프’라고 하여 삐삐선으로 보내주던 유선방송 시절의 이.. 2020. 3. 12.
이성부 시인, ‘벼’와 ‘우리들의 양식’ 남기고 떠나다 시인 이성부(1942 ~ 2012. 2. 28.) 선생 ‘벼’의 시인 이성부(1942~2012) 선생이 돌아가셨다. 시인의 죽음 따위는 세상이 별로 기리지 않는가, 지난달 29일에 에 난 선생의 부음 기사 외에 선생을 다룬 기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모모한 시인들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모모한 시인처럼 감옥을 다녀온 ‘투사’도 아니어서일까. 나는 고교 시절 내내 이성부 시인의 이름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시를 읽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민음사에서 펴낸 ‘오늘의 시인 총서’가 몇 권 있었고, 그 책날개에 그의 시집 이 소개되어 있었다. 정작 내가 이성부의 시를 만난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고등학교 에서 그의 시 ‘벼’는 6, 70년대의 참여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다루어진다. .. 2020. 2. 27.
교사들의 스승, 김창환 선생을 보내며 김창환(1949~2013) 김창환 선생이 돌아가셨다. 토요일(2월 23일) 아침에 선배 김 선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잔뜩 긴장했다. 설을 못 넘기시는 게 아닌가 할 만큼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그래 돌아가셨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웃으로 지난해 여름, 병의 발견에서부터 투병 과정까지 지켜본 이로서의 허탈감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몇몇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로 선생의 부음을 전했다. 나머지는 조직에서 알아서 하리라. 그리고 아내에게 선생이 세상을 버리셨다고 말했다. 결국, 가신 거유. 아직 예순다섯인데, 조금 더 사시지 않고선……. 사모님도 그리 가시더니……. 아내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렇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 2020. 2. 23.
원로 배우 김지영 떠나다 배우 김지영(1937~2017.2.19.) 배우 김지영(1937~2017) 씨가 19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연기자로 살아 한국영상자료원 기록만으로도 출연 영화가 200편이지만 늘 ‘조연’으로만 기억되는 배우, 팔도 사투리 연기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선보인 배우, 김수용 감독과 임권택 감독의 말투를 가장 잘 흉내 냈다는 배우, 만년에야 그 진가를 조금씩 알리기 시작한 배우 김지영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00편의 영화, 그러나 조연으로만 기억되는 배우 유족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지난 2년간 폐암을 앓으면서 연기를 계속했지만 결국 급성 폐렴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955년, 김승호의 극단 대중극회의 무대에서 시작한 연기자의 삶이 무려 62년이다.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나 인천에 자란.. 2020. 2. 19.
‘독고탁’의 이상무 화백을 배웅하며 2016년 1월 3일 간밤 자리에 들어서 이상무 화백(1946~2016)의 부음을 읽었다. 의 부음 기사는 그를 ‘독고탁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이력을 보고서야 본명이 박노철인 그가 인근 김천 출신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향년 70세. [관련 기사 ] 나는 아내와 그와 그의 만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1970년대 학생 잡지에 연재한 만화 의 작가로만 그를 알았던 내가 장편 야구 만화 의 작가로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전역한 이듬해였다. 오락기 제조업을 하던 형이 누구에겐가 위탁해 운영하던 만홧가게를 접으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시골집에 보내왔다. 작은누나가 누군가의 가게를 인수했다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온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이어 우리 집은 두 번째로 만화책으로 가득.. 2020. 1. 27.
고 박병준 선생을 추억함 교육 동지 박병준, 그는 너무 빨리 떠났다 죽음이 삶의 대립 항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낯설어야 마땅하다. 2·30대 팔팔했던 시절에는 ‘죽음’은 늘 ‘강 건너 불’ 같은 거였다. 때때로 만나는 지인의 부음도 지극한 ‘우연’일 뿐, 그것은 일상과는 무관한 특별한 무엇에 그쳤다. 그러나 40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비로소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돌연사’가 주변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인들의 부음을 ‘심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우울한 50대에 접어든다. 안부를 묻는 게 ‘건강’을 묻는 인사로 대치되고, 오랜만의 만남에서 나누는 것은 주변의 죽음이다. 아무개는 혈압으로 아무개는 심장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아직 ‘괜찮은 내 .. 2020. 1. 21.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을 보내며 1941 ~ 2016년 1월 15일 쇠귀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다. 나는 어젯밤 늦게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고 난 직후였던 듯하다. 아,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어.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아내가 연세가 어떻게 되우, 하고 물었었다. 일흔다섯인데……, 하고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당시 창간된 의 지면에서였다. 선생이 옥중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글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의 글은 그때까지 내가 읽은 어떤 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기품과 향훈을 그득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글에는 지혜(이성)와 감성이 가장 완벽하고 조화롭게 만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드넓은 인식의 지평은.. 2020. 1. 14.
[근조] 고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 김근태 전 의원,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어제저녁 YTN에서 오보가 떴을 때 아내와 아이들이 숙연히 애도하는 걸 보면서 그가 남긴 자취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 그는 풍운아였음에도 시대가 품어주지 못한 이다.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매체를 통해 알려진 그의 이미지에 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적 겸손과 진정성을 느끼곤 했다. 나는 그가 고통스럽게 지나온 7, 8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무관하지만, 80년대의 끄트머리에서 교육 민주화 운동의 말석에 참여한 것을 통해 그에게 동지적 연대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지난 총선에서 그가 도봉구에서 낙선했을 때, 나는 내가 모욕받은 듯한 치욕을 느.. 2019. 12. 30.
어떤 부음(訃音), 한 세대의 순환 지난 토요일 오후에 시방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이웃 형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선친과 지기였던 그의 부친이 별세했다는 기별이었다.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으면서, 그제야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이제 세상에 아버지 세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3년 전, 어머니를 여의면서, 이제 아버지, 어머니의 동기간(同氣間)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깨우침에 가슴이 아려왔던 기억을 희미하게 떠올렸다. 아버지는 2대 독자셨고, 누이가 두 분 계셨다. 따라서 아버지 동기간은 모두 여섯 분인 셈인데, 당신의 막내 누이, 그러니까 내 작은고모는 아들 하나만 남기고 일찍(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세상을 뜨셨다. 고모는 그때 30대 중반.. 2019. 11. 29.
흙, 혹은 나무로 돌아가기 장인어른 1주기에 어제는 장인어른의 1주기였다. 고인과 동기간인 처숙(妻叔)과 고모 두 분이 각각 부산과 대구에서 달려왔다. 어차피 각별한 슬픔 따위를 느끼기에는 모인 사람들이 산 세월이 만만찮았다. 처삼촌과 큰 처고모는 일흔이 넘었고, 작은 처고모도 올해 회갑이다. 간단한 추도회를 마치고 다리가 불편한 장모님을 뺀 일가가 마을 뒤의 선산에 올랐다. 올해 중학 2학년이 될 하나뿐인 친손자가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고인에게는 무덤이 없다. 고인보다 몇 해 전 세상을 뜨신 어머님의 산소, 그 발치 아래 선, 키 큰 소나무 아래 당신의 뼛가루가 뿌려졌다. 한 해 동안 이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지나간 눈과 비바람 가운데서 그것은 녹아 기쁘게 흙 속에 스며들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물었다. 장.. 2019. 11. 18.
배웅, 다시 한 세대의 순환 앞에서 장모 이상선 여사(1934~2015. 10. 17.)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지지난 토요일이다. 창졸간에 맞닥뜨린 당신의 죽음 앞에서 가족들은 당혹을 쉬 떨치지 못했다. 서럽게 통곡하는 아내를 달래면서 나는 뜻밖에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에 놀랐다. 나는 마치 미리 준비해 왔던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장례의 전 과정을 챙겼다. 장모상을 치르며 맏사위 노릇 이전에, 이미 나는 내 부모님과 맏형님, 그리고 장인어른까지 가족들의 임종을 잇달아 겪어온 바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진작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깨우쳐 버린 것이다. 여러 개의 장례식장이 경쟁하면서 예전처럼 바가지 상술로 욕을 보는 일은 없어졌다. 병원 부속 .. 2019.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