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흙, 혹은 나무로 돌아가기

by 낮달2018 2019. 11. 18.
728x90

장인어른 1주기에

 

어제는 장인어른의 1주기였다. 고인과 동기간인 처숙(妻叔)과 고모 두 분이 각각 부산과 대구에서 달려왔다. 어차피 각별한 슬픔 따위를 느끼기에는 모인 사람들이 산 세월이 만만찮았다. 처삼촌과 큰 처고모는 일흔이 넘었고, 작은 처고모도 올해 회갑이다. 간단한 추도회를 마치고 다리가 불편한 장모님을 뺀 일가가 마을 뒤의 선산에 올랐다. 올해 중학 2학년이 될 하나뿐인 친손자가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고인에게는 무덤이 없다. 고인보다 몇 해 전 세상을 뜨신 어머님의 산소, 그 발치 아래 선, 키 큰 소나무 아래 당신의 뼛가루가 뿌려졌다. 한 해 동안 이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지나간 눈과 비바람 가운데서 그것은 녹아 기쁘게 흙 속에 스며들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물었다. 장모님 연세가 올해 몇이지? 순간적으로 아내는 당황한다. 갑자기 그 숫자가 짚이지 않았던 게다. 잠깐 헤아리더니 일흔여섯이란다. 이런, 나는 불현듯 우리가 장모님을 위로하지 못하고 떠나왔다는 생각을 했다. 여든을 앞둔 노인은 아직도 삶의 고단한 짐에서 놓이지 못했다. 무릇 살아 있는 자식들의 죄가 큰 것이다.

 

지난해 장인어른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산 자의 몫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 무덤 대신 수목 아래 뼛가루를 묻는 수목장이 도입된 이래, 매장은 많이 줄었다. 장인어른께서도 선산의 소나무 아래에 모셨다.

지난 토요일, 장인어른의 장례를 치렀다. 몇 줌의 뼛가루를 선산 가족 묘역의 키 큰 소나무 둘레에 뿌리는 거로 당신의 남은 마지막 통과의례는 끝났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례적 표현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장의(葬儀)였다.

 

1927년생, 우리 나이로 여든 살, 선량하고 욕심 없이 살다 간 삶이었다. 아니, 평생 이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도, 아니 한낱 미물인 벌레에게조차도 털끝만 한 해를 끼치지 않았던 선량한 삶이었다. 하늘은 시리게 맑았고, 매운바람이 불어오는 산등성이에서 가족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묘를 쓸 수 있는 선산이 있었고, 후사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장모께선 화장과 산골(散骨)을 결정했고, 자식들은 토를 달지 않고 어머니의 결정을 좇았다. 일찌감치 무덤 따위는 결코 남기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도 전혀 이의가 없었다.

 

돌아가신 분과 생애를 함께 한 그분의 삶의 옥니마다 서리고 박힌 한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말하기 어렵다. 사랑이든, 슬픔이든 당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남편이나 가장의 죽음이 아니라, 머지않아 다가올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할 일가의 삶의 문제였으리라.

 

본디 자손이 많았던 집안이라, 줄지어 찾아온 ‘아재’들이 형수의 결정을 못마땅해했지만, 아무도 면전에 이를 제기하지 못했다. 친남매인 누이 셋과 친척에게 출계한 아우도 일부러라도 불만스럽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감히 장모의 결정과 위엄에 범접할 수 있는 이는 처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모께서 감당해 낸 희생과 고통의 세월이 그 일가의 오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아재들이 슬그머니 내 곁에 다가와 에둘러 조심스럽게 불만을 표시하면, 나는 그게 ‘당신의 결정’이고, 당신의 장례도 같은 방식으로 치르기를 희망하신다고만 대답해 주었고,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왜 당신께 회한이 없었으랴. 열여덟에 대학 공부를 마친 하이칼라에게 시집온 기쁨도 잠시, 전쟁 이후에 세상에 뜻을 잃고 청맹과니처럼 살아온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 장모님께선 자기 죽음 이후까지를 내다 본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던 셈이었다.

 

장모님께서 수목장(樹木葬)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당신께선 죽은 이들의 문제가 산 사람들을 옭아맬 수 있다는 점을 의식했고, 그것이 ‘화장과 산골’의 방식을 택하게 하였다. 선산에 뿌릴 바엔 차라리 어느 나무 밑을 선택하자는 안은 의논 중에 자연스레 나왔고, 그게 ‘산골’‘’의 허망함을 상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같이하였음 직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하나뿐인 손자를 데리고 처삼촌께선 기실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천천히 말씀하셨다. 얘야, 잘 보아라. 저 나무 밑에 네 할아버지가 잠드셨다. 너는 잊지 말고 훗날 저 나무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잘 가꾸도록 하려무나. 그 붉은 소나무가 선 곳은 몇 해 전 세상을 버린 망자의 모친이 잠들어 있는 무덤 아래, 스물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아우의 무덤 위쪽이었다.

 

굳이 나무 주변을 파거나 고르지도 않았다. 유골함에서 떠낸 뼛가루를 가족들이 돌아가며 소나무 둘레에 뿌렸을 뿐이다. 그 한 20년생쯤 되어 보이는 소나무는 주변의 나무와는 달리 곧게 자라 미끈한 몸통을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행정 기관에서 간벌(間伐)을 하면서 노란 페인트로 표지해 놓은 잘생긴 나무였다. 이제 아무도 그 소나무를 하찮게 여기지 않을 것이었다. 주변의 나무들이야 벌초 뒤끝에 잘리기도 하겠지만, 그 나무는 단지 여느 수목장처럼 명패를 달고 있지 않을 뿐, 망자의 나무가 되고 만 것이다.

 

늦은 점심을 들고 가족 친지들은 서둘러 집을 떠났다. 그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처삼촌께선 아내에게, “형님께서 장례의 모범을 보이고 가신 셈이니 섭섭해 말라”고 당부하셨다 한다.

 

허전해하실까 봐 하루를 더 묵었는데, 이튿날 아침, 장모님은 영정 사진을 안고 빈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오열하시고는 담담한 얼굴로 나오셨다. 그것으로 당신께서 지아비의 죽음을 정리하고 마감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가슴 속 장인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나시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2006. 1. 24.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