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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2019/0345

딱 하나 남은 성냥공장, 이대로 보내야 할까요 경북 의성 ‘성광성냥공업사’ 탐방… “후손에게 물려준다면 더 바랄 것 없어” 의성에 마지막 성냥공장이 남아 있다는 얘길 들은 게 몇 해 전이다. 2000년대 초반, 읍내의 여고에서 이태나 근무한 적도 있는데도 그걸 왜 몰랐을까, 고갤 갸웃하면서도 이내 잊어버렸다. 두 번째 소식은 그 공장이 마침내 문을 닫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2015년께라고 생각했는데, 의성 현지에 가보고 나서야 공장이 문은 닫은 게 그보다 이른 2013년 11월이었다는 걸 알았다. 문을 닫은 이유야 뻔하다. 국내의 다른 성냥공장과 마찬가지로 값싼 중국산 성냥의 공세 앞에 손을 든 것이다. 결국 문을 닫기까지 중국산 제품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려 문을 닫는 회사야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65살 이상 인구가 2만567명(38.7.. 2019. 3. 17.
조선인 최초의 경찰서장 윤종화와 그 후예들 조선인 최초 경찰서장 윤종화와 그 후예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산다.” 이는 우리 근대사의 상처를 환기해 주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속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현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대부분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친일 부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친일파 출신의 선친이나 조부 덕분에 논란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가까이는 2015년,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평전을 냈다가 해묵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현 바른정당)가 있다. 기득권층의 연원, 친일 부역의 역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김.. 2019. 3. 15.
일제하 군용 비행기 헌납운동과 김용주 일제 군용기 헌납 선동한 친일 부역자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 최근 민족문제연구소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병을 독려하고 일제에 군용기 헌납을 선동하는 등 자발적 친일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올해 들어 선친의 평전인 을 펴냈던 김 대표로서는 스타일을 잔뜩 구겨버린 셈이 되었다. [관련 기사] 일제의 ‘군용기 헌납’ 강요 김용주의 친일 행적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이 ‘군용기 헌납’이다. 일제는 만주침략 후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대비한 군비증강을 위해 1935년 각 도·부·군이나 단체에 국방비 헌납을 강요하였고 그 선봉에 친일 관료, 지식인, 자본가가 나섰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군용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 인사 100여 명과 친일단체.. 2019. 3. 15.
세월, ‘청년’에서 ‘초로(初老)’로 20대 청년에서 60대 초로가 되는 세월 고교 때부터 절친했던 벗이 부친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나는 다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스무 살 어름엔 날마다 어울렸던 친구였는데 30년도 전에 교단에 서면서 대구를 떠나 도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바람에 만남이 뜸해졌다. 그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던가, 헤아려 보니 그가 모친을 여의었던 4년 전이었다. 퇴근시간대를 피해 4시쯤 출발하여 다섯 시쯤에 대구의료원 장례식장에 닿았다. 호실을 확인하지 않고 승강기부터 타고 3층에 올라 두리번거리는데, 검정 양복 차림의 상주 하나가 낯이 익었다. 동안의 온순했던 아이, 어느새 50줄이 된 벗의 동생이었다. 그는 날 알아보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조문에서 확인하는 ‘세월’ 이내 친구가 쫓아 나왔는데…, 4년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2019. 3. 15.
‘사라진 제국’ 그 후… 이 ‘정부’가 없었다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임시정부 100년…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그리며 1919년 4월 11일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수립된 날이다. 그동안 4월 13일을 임정 수립 기념일로 기려온 것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한 날을 중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정은 이틀 전인 4월 11일에 수립됐다고 하는 게 옳고, 정확하다(따라서 기념일은 다시 지정하는 게 마땅하다). 4월 11일, ‘왕정’에서 ‘민주 공화정’으로 상하이에서 우리 독립운동가 29명이 오늘날의 국회 격인 임시 의정원(議政院·의장 이동녕)을 구성하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연 것은 그 하루 전인 4월 10일이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다음날까지 계속됐고 마침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헌장을 제정해 통.. 2019. 3. 13.
우정과 연대 - 변산, 2010년 겨울 겨울의 막바지, 벗들과 함께 ‘변산(邊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1989년 전교조 사태 때, 경북 성주와 칠곡 지역에서 같이 해직되어 도내의 해직 동지들로부터 ‘3장(張) 1박(朴)’으로 불린 벗들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2장 1박’만이 함께했다. 3장 가운데 하나, 장성녕은 함께하지 못했다. 명도 짧았던 친구, 그는 2008년 2월 10일,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1988년에 만났으니 해직 4년 반을 포함,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22년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그 세월은 초등학교 6학년짜리 늦둥이를 남겨두고 쉰넷의 가장을 데려간 것만으로도 모질고 모질었다. 고향 거창에다 그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오던 날, 소주를 마시며 부렸던 건주정이 어제처.. 2019. 3. 13.
밀양, 2006년 8월(2) 초임 학교에서 가르친 ‘첫 제자’, 큰아기들을 만나다 친구들과 작별하고 교동 사무소 앞 쉼터에서 만난 다섯 아이(부인이라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하겠지만, 여전히 그녀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사제’라는 관계망을 벗어나지 못한다)와 나는 성급한 안부를 나누는 거로 말문을 텄다. 영주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한 아이와 밀양에 살고 있는 친구를 빼면 나머지 셋은 꼭 1년이 모자라는 20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이들이 졸업의 노래를 합창하고 여학교를 떠난 게 1987년 2월이고, 지금은 2006년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던, 넘치는 열정 때문에 좌충우돌하던 청년 교사는 ‘쉰 세대’가 되어, 이제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불혹을 바라보는 성숙한 부인이 된 옛 여고생들과 다시 만.. 2019. 3. 11.
밀양, 2006년 8월(1) 밀양에서 함께한 ‘3장(張) 1박(朴)’의 여름 밀양을 다녀왔다. 내게 밀양은 몇 해 전만 해도 ‘표충사’와 ‘영남루’ 따위의 관광지와 함께 기억되는 남녘의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그곳은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지였다. 밀양역 앞에서 만난 단발머리 여고생은 둘째 음절을 유달리 강조하는 억센 경남 사투리로 시내버스 격인 마이크로버스의 운임을 알려 주었었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젊은 연인들은 상대가 민망해하지 않을 만큼의 크기로 유쾌하게 웃었고, 두고두고 그 인상적인 억양을 입에 올리며 추억을 곰씹곤 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밀양은 내게, 하고 많은 숱한 도시가 아니라, 각별한 고장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햇수로 치면 18년, 내 젊음의 한때, 서툰 욕망과 열정으.. 2019. 3. 11.
이순(耳順) 넘어 ‘서재’를 꾸미다 퇴직하고서야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다 지난 일기에서 밝혔듯이 나는 장서가도 아니고 그런 깜냥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내로라하는 장서가들이 거액을 들이거나 헌책방을 이 잡듯 뒤진 끝에 책 ‘한 권’을 얻었다는 전설적인 무용담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2만 원이 넘는 책은 엔간하면 사는 대신에 도서관에서 빌려 보며 갈증을 달래는 편인 것이다. 그러나 40년 이상을 책을 탐하며 살아온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모은 책이 크고 작은 서가 대여섯 개를 채웠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나만의 방, 말하자면 ‘서재(書齋)’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공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북봉산 아래 서재를 꾸미다 남매를 둔 집이라면 대개 비슷하지 않나 싶다. 아이들은 어릴 땐 한 방에 재우기도 하지만 자라면 따로 방 하나.. 2019. 3. 11.
갑자기 김구 곁을 떠난 며느리, 지금껏 ‘수수께끼’ 김인 70주기 … 안미생의 행방 독립운동가 김인(金仁, 1918~1945)의 70주기가 3월 29일이란 사실을 나는 청년백범 4기의 임시정부 노정 답사단의 해설을 맡았던 홍소연 선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2013년 자료실장을 끝으로 백범기념관에서 정년 퇴임한 홍 선생은 그리던 해방을 맞지 못하고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 했던 한 청년 투사의 죽음을 느꺼워하고 있었다. 임정 요인 백범 김구의 맏아들로 태어나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해야 했던 김인은 폐병을 앓다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했다. 1945년 3월 29일, 해방 다섯 달 전이었다. 그의 70주기가 해방 70년과 겹치는 까닭이다. 해방 전후사를 살펴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을 맞지 못하고 유명을 .. 2019. 3. 11.
‘등겨장’, 한 시절의 삶과 추억 경북 지방의 향토 음식 ‘등겨장(시금장)’ 이야기 ‘등겨장’이라고 있다.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상북도 지역의 별미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시금장’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경상도에선 ‘딩기장’이라 하면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딩기’는 ‘등겨’의 고장 말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우리는 봄이나 가을에 등겨장의 그윽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등겨장, 경북 지역의 별미 등겨도 종류가 여럿이다. 일찍이 부모님의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었던 전력이 있어 나는 등겨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 벼를 찧을 때 현미기를 거쳐 나온 등겨는 ‘왕겨’인데 이는 주로 땔감이나 거름으로 쓰인다. 껍질이 벗겨진 현미가 정미기를 여러 차례(이 횟수에 따라 ‘7분도, 8분도’라고 하는 ‘분도’가 정해진다) 돌아 나.. 2019. 3. 10.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난징, 항공열사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공식적으로 난징(南京)에 청사를 둔 일은 없다. 훙커우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에서 3년을 머물렀고, 1935년에는 난징과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전장(鎭江)으로 옮겨갔다. 난징에 남은 임정의 자취들 당시 난징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였으므로 임정도 난징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임정이 난징 대신 전장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협박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난징 성안에 임정 청사를 두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폭격하겠다고 을러댔던 것이다. 청사는 전장에 두고 임정 요인들은 대부분 난징에 거주했다. 뤄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2019.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