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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세월, ‘청년’에서 ‘초로(初老)’로

by 낮달2018 2019.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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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청년에서 60대 초로가 되는 세월

▲ 20대 청년에서 60대 초로가 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되 자기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확인된다.

고교 때부터 절친했던 벗이 부친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나는 다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스무 살 어름엔 날마다 어울렸던 친구였는데 30년도 전에 교단에 서면서 대구를 떠나 도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바람에 만남이 뜸해졌다. 그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던가, 헤아려 보니 그가 모친을 여의었던 4년 전이었다.

 

퇴근시간대를 피해 4시쯤 출발하여 다섯 시쯤에 대구의료원 장례식장에 닿았다. 호실을 확인하지 않고 승강기부터 타고 3층에 올라 두리번거리는데, 검정 양복 차림의 상주 하나가 낯이 익었다. 동안의 온순했던 아이, 어느새 50줄이 된 벗의 동생이었다. 그는 날 알아보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조문에서 확인하는 세월

 

이내 친구가 쫓아 나왔는데, 4년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키가 184cm에다 체중이 90kg 가까이 나가던 당당한 체격이었는데 그는 형편없이 야윈 모습이었다. 살이 빠지면서 팽팽하던 얼굴도 부실해졌고, 주름살도 늘었다. 갑자기 그는 나보다 서너 살은 더 늙어 보였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어디 아픈가?”

몰라, 89kg이나 나갔는데 요즘 68kg이야. 몸은 이상 없대. 술을 많이 하니 위장이 좀 시원찮지.”

 

남의 얘기처럼 툭 던지고는 벗은 껄껄 웃었지만 나는 어쩐지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가 시나브로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여전히 우리가 저 싱그럽던 20대의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지나온 물리적 시간이 60년을 넘겼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아직 낮이어서 문상객은 많지 않고 식장에는 모두 그의 가족들이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손녀, 동생과 제수, 조카들, 여동생 - 우리가 그의 집을 드나들던 고교생 시절에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그 아이 - 의 장성한 딸……. , 너 참 오랜만이구나. , 오빠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국에 밥을 말아서 습관적으로 떠 넣으며 그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부친은 여든일곱, ()를 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다리가 불편하여 동생네 집 근처에서 병원에 다니시곤 했는데……, 어저께 갑자기 세상을 버리셨다고. 마나님을 먼저 보내고 어르신은 꽤 쓸쓸하셨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양친을 여읜 지 10년이 훨씬 넘었고,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부모님을 잃었다. 섭섭하겠다만, 편안히 가셨다니 됐네. 그럼. 그는 소주를 한 모금씩 했다. 주변 얘기를 하다 역시 스무 살 무렵의 친구 ㅅ의 안부를 물었다. , 그를 만난 지 30년도 더 지났구나…….

▲ 20대의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과 물리적 시간이 60년을 넘겼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나서 그의 집에 두어 달 신세를 지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의 결혼식에 가서 축하해 주고 그 뒤에 두어 차례 더 만났던가 말았던가. 그의 삶도 굴곡이 적지 않았고 나 역시 떠돌아다니는 신세인지라 자연스레 교유가 끊어졌다. 그런 세월이 거의 30년에 가깝다.

 

부끄러운 30년 교유

 

초임지에서는 그나마 자주는 아니어도 1년에 두어 차례씩은 벗들과 만나곤 했다. 대구 가까이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순조로울 듯했던 만남은 오히려 뜸해졌다. 그것은 아마 내가 오랜 고민과 갈등의 해결점으로 교육운동을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만 걸쳐 놓지는 못하고 거기 온전히 시간을 쏟아붓게 되면서 우리 사이는 멀어져 갔다. 이듬해 전교조가 법외노조로 출범했고 노조 가입을 이유로 해임되면서 교유는 거의 끊어졌다. 그것은 벗들이 내게서 멀어진 게 아니라 전적으로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

 

복직하기까지 나는 상근하면서 활동을 계속했는데 친구들을 만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고, 그렇게 판을 벌여놓고 딴전을 피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4년 반 동안의 해직 생활 끝에 나는 경북 북부지방으로 복직했다.

 

벗들과의 교유를 복원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복직 이후에 나는 오히려 더 바빴고, 그곳은 경북에서도 변방이었다. 예전처럼 만나서 과음하고 같이 하룻밤을 보내는 일은 없었고 경조사에 참여하거나 안부 전화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2000년대 중반쯤 지쳐서 조직 활동에서 물러나자 이번에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의 관성이 나를 옭아매었다. 갑자기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특별한 볼일이 아니면 집을 떠나지 않으려 하고 엔간한 일이면 전화로 때우는 걸 편하게 여기게 된 것이었다.

 

벗들과 끊어질 듯 이어진 교유 삼십여 년을 떠올리며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게 된 것은 친구 부친상을 전해 들으면서였다. 나는 철저히 내 삶과 그 이해를 중심으로 벗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구나. 거기엔 벗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도 없었고, 관계를 나누며 키워온 정리도 없었던 것이로구나…….

 

나는 너무 야위어서 낯설어 뵈는 친구에게 마치 참회하듯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동안 무심했던 것은 말이야. 뭐라고 할까……. 자네 알지? 난 그리 엽렵한[(사람이나 그 행동 따위가) 매우 슬기롭고 날렵하다] 사람이 못 돼. 누구처럼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주변의 지인들과의 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이어온 그런 위인이 못 된단 말이지.

 

그동안 내가 바쁘게 그리고 조금은 힘들게 살아왔던 건 사실이야. 그러나 그게 옛 친구들과의 교유를 멈추어도 좋을 이유는 아니었지. 미안해. 그게 어쩌면 내 품성의 한계일지도 몰라. 그릇으로 치면 난 아주 작은 그릇에 불과한 셈이지.

 

ㅅ을 만나고 싶네. 그의 연락처를 알아주게나. 어머니도 살아계신다니 그 어른도 한번 뵈어야겠고. 예전에 그 댁에 신세 진 일도 있고, 그간 무심했던 일도 마음에 걸려서…….”

 

벗은 빙그레 웃더니 시원하게 그렇게 받았다.

 

그릇이 크다, 작다 하는 문제는 아니고 말이야. 자넨 자기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산 것뿐이야.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거든. 다신 그런 이야기하지 말게나.”

 

 나는 벗과 의례적인 화제를 나누다 일어섰다. 추석을 쇠고 연락하겠다고, 옛 친구들과 함께 만나 술잔이나 나누자고 했고, 그는 그러마고 했다. 고속도로에 오르면 지금은 떠난 고향 동네를 지나간다. 나는 곁눈질로 낙동강을 흘겨보면서 거기 샛강과 백사장, 미루나무 숲이 살아 있을 때 벗들과 나눈 20, 그 젊음의 시간을 떠올렸다.

 

이미 샛강도 사라지고 백사장은 물론 미루나무 숲은 흔적도 없어졌다. 우리들 청춘의 시간을 달구었던 희망과 절망도 덧없고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속절없는 시간을 우리는 다만 회고할 수 있을 뿐이다.

 

9월이나 시월의 어느 날, 벗들과 다시 만나면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바라보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의 것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러나 어느덧 우리가 당도한 이 초로의 세월을 말이다.

 

 

2016. 8.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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