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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겨장’, 한 시절의 삶과 추억

by 낮달2018 201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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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지방의 향토 음식 ‘등겨장(시금장)’ 이야기

▲ 아내가 담근 등겨장. 원래 등겨장 빛깔은 춘장 빛이다.

 

등겨장이라고 있다.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상북도 지역의 별미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시금장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경상도에선 딩기장이라 하면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딩기등겨의 고장 말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우리는 봄이나 가을에 등겨장의 그윽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등겨장, 경북 지역의 별미

 

등겨도 종류가 여럿이다. 일찍이 부모님의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었던 전력이 있어 나는 등겨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 벼를 찧을 때 현미기를 거쳐 나온 등겨는 왕겨인데 이는 주로 땔감이나 거름으로 쓰인다.

 

껍질이 벗겨진 현미가 정미기를 여러 차례(이 횟수에 따라 ‘7분도, 8분도라고 하는 분도가 정해진다) 돌아 나오면 쌀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등겨는 쌀겨라고 한다. 처음은 거칠고 누런 겨지만, 나중에는 싸라기라 하여 쌀알 부스러기까지 나온다.

 

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등겨는 벼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벼는 껍질을 벗기는 게 가능하지만, 보리는 낟알의 가장자리를 갈아내 보리쌀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거칠고 누런 겨가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겨는 부드러워진다. 보리쌀 모양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겨는 흔히 경상도에서 당가루라고 한다. 이 당가루를 그게 나오기 직전의 조금 거친 겨와 섞어서 등겨장을 담근다.

 

등겨장을 먹지 못한 지 십 년도 넘었다.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셔온 이후, 우리는 한 번도 등겨장을 구경하지 못했다.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걸 구워 말리고 장으로 담그는 일을 어머니께 주문하는 것도 어려웠던 탓이다. 만년의 어머니는 기력도 쇠하신 데다 솜씨도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입맛이 떨어지는 늦봄이면 아내와 나는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등겨장의 맛을 오래 추억하곤 한다. 나는 가끔 식성이 한 집안의 내력이나 기호를 가장 솔직 담백하게 보여주는 표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어룽져 있는 한 시절의 삶을 아주 명료하게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가족적 동질성을 환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맛에 관한 기억

 

어머니께서 담갔던 우리 집 등겨장의 빛깔은 중국 음식점에서 내놓는 춘장의 그것을 닮았다. 물론 춘장처럼 새까맣지는 않지만, 그것은 미각을 되살려주거나 군침을 흘리게 하는 빛깔은 전혀 아니다. 그런데 그 수더분하고 어쩌면 텁텁해 뵈는 장류의 맛은 뭐라고 할까, 마치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과거를 떠올리게 해 주는 것이다.

 

동기간에도 그 오래된 맛에 대한 기억은 동질적인가. 형님에게 들렀더니 지리산에 갔다가 등겨장이라 해서 사 왔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했다. 지리산까지 가서 등겨장에 낚인 형님의 미각과 내 그것은 결코 다르지 않을 터이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아주 등겨장 따위는 잊고 살았다. 나는 그게 이미 실전(失傳)의 과정을 밟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에 대한 사람들의 지향은 끈질기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을 찾는 탐구는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등겨장은 그런 이들의 수요에 힘입어 경상도의 엔간한 재래시장마다 팔리고 있었다. 물론 완제품이 아니라 등겨 가루 메주의 형태로 말이다.

▲ 경남 창녕읍에서 만난 등겨 가루 메주. 인근 시군의 재래시장에도 판다고 한다.

지난 10월의 우포 여행 중에 우리는 창녕읍의 상설시장에 들렀었다. 술정리 동 3층 석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무심코 시장통을 지나다 나는 한 식료품 가게에서 등겨 가루 메주를 발견했다. 그 가게 처마에 잘 구워진 등겨 가루 메주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이전에 나는 한 번도 그 메주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걸 본 순간, 내 머릿속에 있던 원초적 감각이 소스라치게 깨어났던 것일까. 나는 그게 내가 찾고 있었던 그 오래된 맛의 원천이라는 걸 단박에 눈치채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그게 다 팔려 없어질 것같이 조급해져서 서둘러 메주 한 덩이를 주문했다.

 

이게 등겨장 담그는 거 맞지요보리쌀 겨로 만든…….

- 그럼요. 잘 아네요.

- 한 덩이 주소.

- 메주 말고 가루로 갈아놓은 걸 사 가이소.

- 왜요?

- 메주는 갈아야 하는데 그거 성가시잖소?

 

나는 가게 주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갈아놓은 등겨 가루를 만 원에 샀다. 그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고 반색하는 아내의 허락을 얻었다. 나는 마치 푸짐한 전리품을 노획한 선사시대의 가장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어머니께 등겨장 담그는 법을 전수 받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러나 내가 사다 준 등겨 가루를 보더니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는 듯했다. 아내는 누구에게 물어 등겨장을 담글까를 고민하더니 영천이 고향인 내 친구의 아내를 통해 그의 모친에게 비법(?)을 전수 받았다.

 

등겨장을 담가 놓고도 아내는 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전수해 준 대로 하긴 했지만, 예전의 그 을 재현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담가 놓은 등겨장을 봤더니 빛깔이 예전의 그것과 달랐다. 좀 칙칙하게 밝은 갈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적이 실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제대로 숙성된 등겨장은 춘장과 비슷한 빛깔을 띠는 것이다.

 

아내가 복원해 준 등겨장의 맛

 

두 개의 작은 단지에 담겨 베란다와 김치냉장고에서 숙성에 들어간 등겨장을 나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 사이에 아내는 부지런히 인터넷을 들락거리더니 기어코 빛깔의 비밀을 알아냈다. 이제 생각나요. 어머님께서 늘 콩 삶은 찐득한 물을 쓰더라고요. 보니까 콩 삶은 물을 넣으면 빛깔이 검어진대요. 됐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저 맛은 기대해도 되겠다.

 

정확히 엿새쯤의 숙성을 거쳐 아내가 처음으로 담근 등겨장이 밥상에 올랐다. 나는 한 숟가락을 떠먹어 보고 그게 내 미각이 기억하고 있는 옛날의 에 얼추 가깝다는 걸 알았다. 여보, 이만하면 성공이야! 됐어! 다음엔 훨씬 나은 맛이 나길 기대하면서 나는 요즘 조금씩 아껴가며 등겨장을 맛보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등겨장의 빛깔은 일단 식욕을 자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삶아 넣은 보리밥 알이 드러나기도 하고 함께 썰어 넣은 무 조각이 씹히기도 한다. 벗의 모친은 풋고추를 넣으라고 했지만, 아내는 모험을 피했다. 등겨장은 조청이 들어가 약간 달착지근한 맛이 난다. 게다가 먹고 나면 거친 가루 맛이 좀 알싸하게 입안에 남는다.

▲ 지금 시판되고 있는 등겨장(시금장) 상품들

그 맛을 객관적으로 표현할 만한 재주가 내겐 없다. 한 번도 등겨장을 맛보지 못한 이에게도 한 입만 먹어 보면 입에 감길 거라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이 맛은 한 시대의 추억과 애환이 곁들여진 별미의 음식인 것이다. 곰삭은 등겨장을 먹을 때마다 아내와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고 어머니 솜씨를 그리워하곤 한다.

 

인근 시군의 재래시장마다 등겨 가루 메주를 팔고 있다는 걸 우리만 몰랐던 것 같다. 의성 장에 가도 있고, 대구 도깨비시장에도 있대요. 아내는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등겨 가루를 반죽하여 도넛처럼 만들어 구워놓은 등겨장 메주를 필요하면 언제나 살 수 있다…….

 

우리는 등겨장을 잊지 못하는 형님께 이 장을 조금 보낼까 했었다. 그러나 날씨가 여의치 않았다. 까딱하면 가는 동안 맛이 변해 버릴 것 같았다. 서두를 일은 없다. 시간은 많고, 맘만 먹으면 인근 시군의 재래시장에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시금장

보리쌀 겨로 만든 경상북도 지역의 향토음식
국적 한국 경상북도
구분 장류
주재료 보리쌀 겨메줏가루무청풋고추당근

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시금장은 염도가 3% 정도로서 저장 기간이 보통 1달 이내였고 용도로는 비빔용쌈용찌개용반찬용 등 이용 폭이 다양하다담그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한여름이나 한겨울을 제외한 기본 장이 떨어지는 시기인 이른 봄으로 입맛이 없는 시기에 시금장을 담근다.

보리쌀 겨(등겨 가루)를 반죽하고 작은 그릇 크기의 메줏덩어리처럼 뭉쳐 왕겨 태우는 재에 넣고 은근히 갈색이 되게 2시간 정도 굽는다햇볕에 건조하여 1달 정도 그늘에 달아매어 띄운 것을 말려 가루를 만든다.

보리쌀을 갈아서 엿기름에 삭힌 감주 물을 달여 보리쌀 겨의 가루메줏가루무청풋고추당근 등을 넣고 마늘산초가루고춧가루 등 갖은양념을 넣어 5~7일쯤 삭혀 먹는다.

한여름과 한겨울을 피하고는 다 만들어 먹을 수 있으며 비타민 및 무기질을 다량 섭취할 수 있고 입맛을 돋울 수 있는 향토음식으로 시금장을 지방에 따라 보리등겨장개떡장이라고도 한다서늘한 온도에서 식혀야 제맛이 나므로 한여름은 피한다.
                                                                                                      <두산백과사전>

 

등겨장을 시금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걸 나는 이번에 알았다. 그러나 아내와 내게 그것은 언제나 등겨장이다. 그것은 안동사람들이 골짠지라고 부르는 무말랭이 김치를 우리 가족들이 굳이 고향말인 오그락지로 부르는 것과 같다. 그것 역시 타관에 살고 있지만, 우리를 고향과 이어주는 정체성(Identity)의 한 표지인 것이다.

 

등겨장은 흔히 곡식을 찧을 때 나오는 겨로 만든 별미라고 한다. 그러나 그걸 별미로 떠올리는 건 이 풍요한 21세기다. 거기엔 가난했던 시절, 온갖 방법으로 먹을거리를 지어냈던 옛사람들의 삶과 설움이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끼니마다 식탁에 오른 등겨장을 맛보며 우리 내외는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한 시절의 삶과 추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겨워하곤 한다.

 

 

2009. 11.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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