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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이순(耳順) 넘어 ‘서재’를 꾸미다

by 낮달2018 2019.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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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고서야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다

▲ 민음사에서 1975년에 간행한 강은교 산문집 <추억제>. 아래는 책의 서지 사항.

지난 일기에서 밝혔듯이 나는 장서가도 아니고 그런 깜냥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내로라하는 장서가들이 거액을 들이거나 헌책방을 이 잡듯 뒤진 끝에 책 ‘한 권’을 얻었다는 전설적인 무용담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2만 원이 넘는 책은 엔간하면 사는 대신에 도서관에서 빌려 보며 갈증을 달래는 편인 것이다.
 
그러나 40년 이상을 책을 탐하며 살아온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모은 책이 크고 작은 서가 대여섯 개를 채웠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나만의 방, 말하자면 ‘서재(書齋)’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공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북봉산 아래 서재를 꾸미다
 
남매를 둔 집이라면 대개 비슷하지 않나 싶다. 아이들은 어릴 땐 한 방에 재우기도 하지만 자라면 따로 방 하나씩을 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내 서가는 거실과 아이들 방에 찔끔찔끔 흩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좀 너른 집에 가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여의칠 않았다. 고만고만한 규모의 아파트야 거기가 거기 아닌가 말이다.
 
다섯 해 전에 북봉산(北峰山) 골짜기 아래 들었다가 잠깐 시내 쪽으로 나가 두 해 반을 살았다. 퇴직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북봉산 아래로 돌아왔다. 이사를 하는데 아내가 제발 책은 한곳에 모으라고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지 뭐. 그러나 뻔한 평수의 아파트에 여분의 공간을 낼 수는 없는 일, 나는 집을 떠나 있는 아들 녀석의 방에다 책을 욱여넣기로 했다. 딸아이가 작은방을 선택해 주는 바람에 가운뎃방이 자연스레 ‘책방’이 되었다.

▲ 장서로 베란다를 채웠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건 이불보퉁인데 집이 비좁아 여기에 보관되어야 할 듯하다.
▲ 이 방 저 방에 흩어 놓았던 책들을 한 군데에 모은 것만으로 의미를 두기로 했다. 이 빈 공간도 조만간 이런저린 짐으로 채워질 것이다.

다행히 북봉(北峯)을 내다보는 가운뎃방의 베란다가 꽤 넓었다. 재어 봤더니 어럽쇼, 옹색하긴 해도 서가 다섯 개가 시원스레 들어갔다. 차분하게 정리를 잘하는 딸아이와 한나절 걸려 책을 나누어 정리했다. 얼마 전에 일백 수십 권을 버린 덕분이었을 게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소형 책장을 얹어 대충 꼴을 갖추었다.
 
희귀본이나 기타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은 따로 없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책 읽기에 관한 한 문학청년의 기호와 취향, 거창하게 말하면 사상적 관심과 이어져 있을 뿐이다. 글쎄, 그중 가장 오래된 건 아마 고교 시절에 산 손바닥만 한 1972년 판 문고본 이동하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이다.
 
한구석에 책등이 떨어져 벌어지고 누렇게 변색한 하드커버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는데 아, 그건 1975년 판 강은교 산문집 <추억제(追憶祭)>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그 책을 나는 대구 본영당서점에서 샀다. 그 무렵 강은교의 시 ‘빈자 기행’이 좋아서 그걸 대학노트에 베껴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무 살 적인데 그 시를 새로 읽으니 그때의 울림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아, 겸연쩍어서 미뤄둔 ‘서재 이름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한 달 전쯤에 나는 서각(書刻)을 하는 퇴직 선배 교사께 서재 이름을 하나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일찍이 한문 공부하는 벗에게서 받은 ‘도우(陶雨)’라는 별호가 있었지만 그게 어쩐지 몸에 붙지 않아서 거의 쓰지 않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 책을 쟁여놓은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북봉산의 산록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봉산 아래로 돌아가기로 하면서 나는 문득 내 책방에 ‘북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건 아파트 뒤의 산(388m)의 이름인데, 그 이름을 따는 건 최소한 ‘오버’는 아닐 듯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북봉’의 첫 자, ‘북(北)’의 느낌이 좋았다.
 
‘북’이 환기하는 ‘엄혹하고 치열한 극한’의 이미지
 
‘어둠, 죽음, 살상’ 따위를 상징한다는 오행(五行)의 북쪽을 떠올린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식민지 시대 유민(流民)들이 찾아들어야 했던 ‘북국(北國)’과 그 겨울을, 알프스의 죽음의 벽 아이거(Eiger) ‘북벽(北壁)’ 따위가 환기해 주는 엄혹함과 치열한 극한에 마음이 기울었다.
 
북은 또 한편으로 남쪽을 향해 앉은 임금에게 두 번 절하던[북향재배] 유생들이 바라보는 방향이다. 거기 만인지상 임금이 있어서가 아니라 임금을 향한 이들 유생의 우직한 충성심이 그려내는 저 중세의 아름답되 슬픈 풍경을 아마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북봉’에는 ‘산방(山房)’이 어울린다. 서재 이름으로 ‘북봉산방’ 운을 띄웠을 때 한 친구가 쥐어박았다. 산에 있어야 산방이지 고층 아파트에서 웬 산방이냐고 말이다. 물론 벗이 옳다. 나는 단지 고층 아파트에서 산을 건너다보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황토방을 짓고 그 외벽에 ‘오막재’라고 붙인 벗은 ‘헌(軒)’이나 ‘재(齋)’를 쓰라고 권했다. 북봉산방이 ‘북봉재’로 바뀐 이유다. 상고해 보니 서재 이름으로 ‘헌’을 쓴 이로는 조선 후기의 북학자 담헌(湛軒) 홍대용이 있고 임금 정조는 자신의 서재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19세기 선비들 가운데 서재 이름과 자신의 호를 같이 쓴 사례는 적지 않다. 연암(燕巖) 박지원, 여유당(與猶堂) 정약용, 완당(阮堂) 김정희 등이 자기 서재 이름을 호로 삼은 이들이다. 당시 선비들에게 서재란 ‘책을 보관해두고 읽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 지키려 했던 삶의 방향과 가치관, 아울러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담아낸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박철상의 <서재에 살다> 참고]
 
‘재’를 붙여 이름을 정하고 나니 새삼 <오마이뉴스> 블로거 정운현 선생의 블로그 이름이 ‘보림재’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쓴 이름이다. 그가 소개한 허균의 서재 이름도 ‘사우재(四友齋)’다. 허균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으므로 옛사람 가운데서 친구를 찾았는데 도연명과 이백, 소동파가 그들이다. 옛 시인 셋을 불러 함께 하니 허균과 더불어 ‘사우(四友)’인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총총히 줄지어 심어져 있다. 나는 그 그윽하고 고요함을 즐기면서 북쪽 창에다 세 벗의 초상을 펼쳐놓고, 분향하면서 읍을 한다. 그래서 편액을 사우재(四友齋)라 하고, 인하여 그 연유를 위와 같이 기록해둔다.

     - 허균, ‘사우재기’ 중에서[허경진, <허균평전> 수록]

 
편액도 얼추 꼴을 갖추었는데 …
 
일주일 전쯤에 선배가 서각한 편액이 도착했다. 들어보니 그 무게가 만만찮고 두꺼운 나무판의 맵시가 놀라웠다. 방문 위에 걸려고 재어 보니 애걔걔, 너무 컸다. 이 편액을 굳이 방문 앞에 달 이유는 없을 터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방안 책상 앞 벽에다 이 나무판을 걸었다.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쓴 것도 올바른 선택이었다

▲ 서각을 하는 선배에게 부탁하여 새긴 내 서재의 편액.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인 <서재에 살다>에서 저자는 ‘서재의 이름을 통해 그 서재의 주인이 살았던 삶’을 조명한다. 또 서재의 이름은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단초이자 한 시대를 이해하는 통로”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상 <경향> 서평]
 
그러나 그건 전근대의 지식인들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퇴직 문학 교사가 겉멋을 부리느라 붙이는 서재 이름과는 무관한 일이다. 산 이름을 딴 ‘북봉’이 무슨 삶과 시대에 대한 표지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서재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거는 건방을 떨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게 이순을 넘기면서 내가 지난 40여 년 동안 책을 통해 깨우쳐 온 삶과 세상을 소박하게 갈무리하는 방식이라면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피로해진 눈을 들어 북봉의 산록을 시방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바라건대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항심(恒心)으로 남은 날들을 여며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6. 8.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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