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말랭이로 담은 김치 ‘오그락지’
‘골(곤)짠지’라고 들어 보셨는가. 골짠지는 안동과 예천 등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무말랭이 김치’를 이르는 말이다. ‘짠지’는 ‘무를 소금으로 짜게 절여 만든 김치’인데 여기서 ‘골’은 ‘속이 뭉크러져 상하다.’는 의미의 ‘곯다’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잘게 썰어서 말린 무는 곯아서 뒤틀리고 홀쭉해져 있으니 골짠지가 된 것이다.
안동 '골짠지'를 우리 가족은 '오그락지'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집에선 아무도 그걸 골짠지로 부르지 않는다. 우리 식구들은 골짠지 대신 ‘오그락지’라는 이름을 쓴다. 이는 내가 나고 자란 경상북도 남부지방 칠곡의 고장 말인데, ‘골’ 대신 ‘곯아서 오그라졌다’는 의미의 ‘오그락’이라는 시늉말을 붙인 것이다.
남의 고장 말과 내 고장 말이라는 것 말고 두 낱말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도 나와 아내는 물론 아이들마저 짐짓 골짠지 대신 ‘오그락지’를 쓰는 것이다. 아내는 나와 동향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안동에 들어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을 넘긴 아이들마저 ‘골짠지’대신 ‘오그락지’를 굳이 쓰는 까닭은 무엇인지…….
때로 말은 한 인간의 정체성의 표지일 수도 있는 듯하다. 외국어에 대응하는 모국어의 의미가 그렇듯이 자기 고장 말에 대한 애착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변수의 하나다. 자기 고장을 떠나 타관에 정착해 살게 되면 누구나 거기 말을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다. 토박이를 비롯한 다수의 틈에 끼어 부대끼며 사는 게 소수자(마이너리티)의 생존 전략이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힘의 우열이 두드러지지 않는 고장 사이의 고장 말 수용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처에 나간 시골 사람과 달리 그만그만한 고장에서 수평 이동한 이들은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자기 고장 말을 쉽게 버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안동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전적으로 여기에 있는 듯싶다.
고장 말, 자기 정체성의 표지
시나브로 아내와 나는 무의식중에 안동 특유의 고장 말을 쓴다. ‘~니껴’ 형의 안동말이 주는 인상은 강하다. ‘아이라예’ 식의 애교 섞인 경북 남부의 고장 말에 비기면 안동말은 불친절하고 다소 시비조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산 지 햇수로 10년, 아내와 나는 가끔씩 이곳 토박이처럼 안동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게 되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질색을 한다.
딸애는 내 고향 칠곡에서 태어났고, 경주 근처에서 4년, 다시 칠곡 쪽으로 와서 5년, 예천에 와서 4년여를 살았는데, 중학 3학년 때 안동으로 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여기서 다녔다. 가장 오래 산 땅으로 치면 안동이지만, 딸애는 아비 고향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아들 녀석은 태어난 곳은 대구의 산부인과 병원이지만, 역시 경주에서 자라다 칠곡, 예천을 거쳐 안동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따로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들 녀석도 칠곡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얼마 전 특박을 나와서 그 애는 제가 즐겨 먹는 반찬이라며 ‘오그락지’를 맛나게 먹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어버이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닌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런 뜻에서 새로운 고장 말을 애써 익히거나 쓰지 않는 것은 제 나름의 자기 정체성을 방어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고장에서 그 울타리 바깥사람들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니라면, 그 고장에 ‘들어온 바깥사람들’이 자신을 울타리 안 사람들과 달리 자리매김하는 것을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물리적 공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체험, 가치관과 태도, 사물에 대한 이해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복합적인 개념인 까닭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장 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을 성장케 한 고장, 즉 자기 고향과 그 문화에 대한 자기 정체성(正體性, Identity)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마음처럼, 말도 스스로 여미고 다듬어가는, 훌륭한 자기 정체성의 표지인 것이다.
20년도 넘게 안동에 살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이 고장 말을 거의 쓰지 않는 이들이 여럿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할 터이고 여기 묻힐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이 고장 말을 쓰지 않는 그들의 마음이나 더러 여기서 만난 동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굳이 ‘골짠지’를 ‘오그락지’라고 쓰는 내 아이들의 마음을 다르지 않으리라.
맛있는 무를 얇게 썰어 잘 말린 뒤에 갖은양념으로 버무려 숙성시킨 오그락지도 진화했다. 빨갛게 양념을 먹어 부드러워진 무말랭이를 씹을 때 나는 상쾌한 소리와 담박한 맛에서 오그락지는 김치와는 다른 각별한 맛의 원천이다.
요즘 우리 집의 오그락지에는 마른오징어를 찢어 넣었다. 숙성된 시간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그 오징어포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나는 인근의 국가 공업단지의 팽창에 힘입어 지난해 10월 ‘읍’으로 승격한, 떠나온 고향을 가끔 떠올린다.
2007. 1. 6. 낮달
* '오그락지'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표준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우리가 때로 성급하게 우리의 정겨운 고장 말을 모두 비표준어로 여기는 버릇은 어쩌면 방언을 표준어보다 낮은 자격의 언어로 이해하는 우리의 오랜 관습 탓인지도 모른다.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오그락지' 풀이다.
오그락지「명사」 무말랭이를 깨끗이 씻어 고춧가루, 볶은 깨, 말린 고춧잎과 찹쌀로 만든 풀에 섞어 버무린 반찬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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