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뜨물로 끓인 숭늉
겨울 들면서 가끔 아내가 식후에 쌀뜨물을 숭늉 대신 내놓기 시작했다. 펄펄 끓인 쌀뜨물은 불어가면서 천천히 마셔도 좋고, 거기 밥을 조금 말아서 먹는 것도 괜찮다.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무어 그리 각별한 맛이 있을 턱은 없다. 그러나 뜨겁게 김이 오르는 쌀뜨물을 마시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려주곤 해서 아내와 나는 그 시절을 애틋하게 추억하기도 한다.
‘뜨물 숭늉’의 유년
어릴 적에 식후에 숭늉으로 먹곤 했던 뜨물 숭늉은 고작 두세 식구의 밥을 지어내는 압력밥솥에서 끓여내는 요즘 뜨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 윤이 나는 까만 무쇠솥에 불을 지펴서 짓는 밥의 밥맛도 밥맛이려니와 밥을 푼 뒤에 다시 뜨물을 붓고 아궁이에 조금 더 불을 지펴서 끓여내는 뜨물 숭늉을 후후 불어가며 마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떠올리곤 한다.
숭늉은 밥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에 물을 붓고 한소끔 끓여 만든 음료이다. 반탕(飯湯)·취탕(炊湯)이라고도 하는데 숭늉은 ‘숙냉(熟冷)’이라는 한자어가 어원이다. 숭늉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숙수(熟水)’라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숙수를 이근몰(泥根沒 : 익은 물)이라 한다.”는 표현이 있어 고려 초나 중엽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숭늉은 밥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 3국 가운데 우리의 고유 음료가 된 것은 밥 짓는 법과 관계가 깊다. 중국의 밥 짓기는 처음에 물을 풍부하게 넣어서 충분히 끓어오르면 물을 퍼내고 약한 불로 뜸을 들이거나 다시 찌므로 숭늉이 발달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같은 방법으로 밥을 짓지만, 숭늉을 먹지 않는다. 이것은 부엌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의 부엌은 부뚜막 아궁이와 온돌이 일체가 되어 있고 솥은 고정식이므로 솥을 씻기가 힘들다. 따라서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이면 숭늉을 마실 수 있는 데다가 솥을 씻는 방법도 되기 때문에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중국에서 성행된 차가 우리나라에서는 발달하지 않은 것도 숭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밥을 먹고 숭늉을 마시거나 숭늉에 밥을 말아 먹으면 식사의 순서가 끝나는 식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숭늉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무쇠솥 대신 양은 솥이 나오고, 전기밥솥의 보급되면서다. 지금은 생수나 정수가 대세지만, 한때는 ‘보리차’가 숭늉을 대신하기도 했다.
쌀뜨물은 말 그대로 생쌀을 씻은 물이다. 멥쌀을 씻을 때 서너 번 걸러낸 물은 여러 가지 불순물이 섞여 있으니 버리고 물이 조금 맑아지면 이를 따로 모아 놓는다. 이 뿌연 물에는 쌀에 함유된 수용성 비타민 등의 영양소 일부가 녹아 나와 섞여 있다. 쌀뜨물을 끓여서 먹으면 구수한 맛이 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쌀뜨물’로 검색하면 주로 ‘피부 미백을 위한 쌀뜨물 세안법’과 같은 정보가 주로 뜬다. 식용으로는 된장국에 넣어 끓여 먹는다든가, 육수에 넣어서 구수한 맛을 낸다든가 하는 게 다다. 하기야 요즘같이 숭늉도 잘 끓여 먹지 않는 시대에 쌀뜨물을 끓여 먹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쌀뜨물은 한방에선 미감(米泔), 미감수(米泔水), 미즙(米汁), 백수(白水)라고 하기도 한다. 쌀뜨물에는 비타민 B1, B2, 전분질 등이 녹아 있어 피부 미백에 효과가 있고 냄새를 잘 빨아들이기 때문에 냄새를 없애는 데도 좋다. 우엉과 죽순과 같이 아린 맛을 가진 채소를 삶을 때도 쌀뜨물을 넣는다. 쌀뜨물 속의 전분이 채소의 표면을 둘러싸 산화를 막으므로 당분이 덜 빠져나가고 아린 맛도 제거되는 것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쌀뜨물이 “맛은 달고 성질은 차며 독이 없다.”며 “열을 내리고 번갈(煩渴,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며 목이 마르는 증상)을 멎게 하며 소변이 잘 나오게 하고 피를 차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쌀뜨물은 비혈(飛血, 눈 흰자위에 핏줄이 서는 증상)의 치료나 주독이 올라 빨개진 코를 다스리는 데, 약의 복용 과다 및 중독으로 인한 증상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뜨물은 기름때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어서 설거지할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환경보호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은 주방용 세제 대신 설거지할 때 뜨물을 이용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굳이 뜨물로 설거지하기를 기대하기는 좀 어려울 듯하다.
뜨물은 냄새를 없애는 데 탁월한 효과를 내므로 밀폐 용기나 도마에 밴 냄새를 제거하는 데 이용하면 좋다. 김치 냄새나 생선비린내가 나는 그릇에 쌀뜨물을 붓고 이틀 정도 두면 냄새가 깨끗이 가신다. 또 너무 짜 먹지 못하는 자반고등어도 쌀뜨물에 30분쯤 담가 두면 짠맛이 빠진다. 말린 생선에서 비린내가 날 때도 쌀뜨물을 쓰면 냄새가 없어지고 살이 연해져 맛도 좋아진다.
쌀뜨물, 용도도 ‘효능’도 많다
쌀뜨물에 함유된 유분(油分)은 광택을 내는 왁스 효과를 낸다. 유리창 청소나 마룻바닥, 목제 가구를 청소하는 데도 쓸모가 있다. 그러나 대체효과를 가진 상품이 워낙 널려 있으니 성가시게 쌀뜨물을 받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나마 쌀뜨물이 유용하게 쓰이는 부분이 미용이다. 비누를 사용하기 전 옛날 궁중이나 민간에서는 쌀뜨물 세안이 가장 흔한 미용법이었다니 말이다. 쌀뜨물에 녹아 있는 전분은 뛰어난 수분 흡수력과 미백 효능이 있다. 규칙적인 쌀뜨물 세안은 여드름이나 뾰루지 등의 치료에 좋고 피부를 탄력 있고 하얗게 해 준다. 빨래 삶을 때 넣어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음식 맛의 조절에도 쌀뜨물이 유용하다. 뜨물에는 비타민 B1, B2, 지질, 전분이 녹아 있어 찌개 국물에 넣으면 영양가를 높일 수 있다. 또 된장국이나 김치찌개를 끓일 때 쌀뜨물을 쓰면 찌개의 윗물이 생기지 않고 국물 맛이 한결 구수해지고 감칠맛이 더해진다고 한다.
비록 쌀을 씻은 물이긴 하지만 뜨물에는 각종 영양소가 들어 있으니 일정한 열량을 갖고 있다. 2003년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 총재가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을 요구하면서 단식투쟁 중에 이 쌀뜨물을 마시다가 대중의 조롱을 받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뜨물은 우리 식생활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당연히 이 낱말을 포함하는 속담도 적지 않다. ‘공연히 취한 체하며 주정함’을 이르는 “뜨물 먹고 주정한다.”나 ‘일이 여러 날 지연되기는 해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는 “뜨물에도 아이가 든다(생긴다).”는 속담은 그 빛깔의 유사성에서 나온 말이다.
‘적은 이익을 위하여 노력이나 경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는 “쌀 한 알 보고 뜨물 한 동이 마신다.”가 있다. 북한의 속담으로 ‘어떤 물건이나 지위 따위에 눈이 어두워지면 죽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는 “비린내 맡은 강아지 매 맞아 허리가 부러져도 뜨물 통 앞에 가서 죽는다.”는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안 남는다.”와 같은 속담이다.
아침에 떠 놓은 뜨물이 식었다. 숭늉으로 마시기에는 역시 뜨물은 뜨거워야 한다. 김을 후후 불면서 뜨물을 마시거나, 거기다 남은 밥을 말아서 건져 먹는 아비를 딸애가 신기한 듯 바라본다. 숭늉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니 아이들에게 뜨물은 지난 세기의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우리 내외는 오래 뜨물을 끓이고 그걸 불어 마시면서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기를 추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2014. 1.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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