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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이발소’로의 귀환

by 낮달2018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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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발소로 찾다

▲ 내가 앞으로 머리를 깎기로 한 우리 동네 이발소

어제 이발을 했다. 여느 때처럼 동네 미용실에서가 아니다. 동네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도서관 앞 골목에 있는 이발소에서다. 거기 그런 이발소가 있는 줄 몰랐었다. 꽤 반듯한 슬래브 건물에 간판도 얌전하게 달렸다. ‘○○이용소’. 마치 잊고 있었던 이웃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줄지은 다섯 개의 빈 의자 저편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주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들릴 듯 말 듯 인사를 했다. 과묵해 뵈는 인상의 60대 이발사였다. 의자에 앉자 그는 익숙하게 내 목에 수건을 감고 보자기를 씌웠다.

“오래……, 하셨습니까?”
“예.”
“손님이 많은가요?”
“뭐, 그럭저럭.”

 

‘이발소’로의 귀환

대화는 짧게 끝났다. 역시 이 양반은 말수가 적다. 나이가 나이니 별로 친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내 머리를 다 깎을 동안 다른 손님은 없었다. 이웃으로 보이는 중늙은이 하나가 마실을 왔을 뿐이다. 그는 청문회를 하느냐고 물었고, 이발사는 국회방송으로 채널을 돌려주었다.

장관 후보자 하나가 의원들의 추궁에 진땀을 흘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오늘 청문회는 이것뿐이냐고 이웃이 물었고 이발사는 다시 짧게 대답했다. 아니 세 건이야. ‘국회방송’ 따위를 이렇게 진득하게 시청하는 사람들은 전국에 얼마나 될까를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발을 해 보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아 본 사람은 안다. 미용실에서 미용사가 하는 작업에 비해 그것이 두 배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미용실에 가면 10분이나 15분이면 충분한 작업이 이발사에게는 30분이 넘게 걸리는 것이다.

같은 형태 조발(調髮)이라도 시간은 역시 두 배다. 까닭은 간단하다. 가위를 설렁설렁 써서 겉머리를 자르고 고르는 형식이 미용실의 이발이라면 이발소에서는 속머리까지 알뜰히 손질한 다음 머리를 고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이발의 성격이 이발업을 사양길로 몰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구닥다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발소의 풍경을 떠올려 보라. 구멍탄 난로, 면도용 솔로 문질러대서 허옇게 얼룩이 진 난로의 연통, 면도칼을 비비는 굵고 길쭉한 가죽끈, 포마드 따위의 값싼 화장품 냄새, 그런 모든 것을 한꺼번에 환기해 주는 묘한 냄새와 열기……. 오죽하면 ‘대중 선호적이고 통속적인 취향의 그림’인 키치(Kitsch) 그림을 ‘이발소 그림’이라고 하겠는가.

거기 비기면 미용실은 훨씬 달착지근한 느낌의 공간이다. 파마나 염색약 냄새 따위가 거북할 때도 있지만 공간에 배어 있는 여자 냄새는 이발소의 그것보단 훨씬 부드럽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는 이발소와는 달리 여자들의 공간이니만큼 소파나 꽃, 화분 따위가 놓여 있는 경우도 많다. 젊은 남자들이 미용실을 드나드는 걸 꺼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미용실’에서의 10년

그러나 내게 미용실은 여전히 금기의 장소였다. 이발소가 있는데 굳이 여자들이 드나드는 미장원을 찾아 쭈뼛거릴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류에 잘 적응하는 친구들도 이미 미장원을 드나들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 마흔이 넘어서였다.

 

첫 미장원 출입은 부득이했다. 읍 지역에 살다가 시로 이사를 왔는데 주변에 이발소가 없었다. 꽤 거리가 있는 이웃 동네엔 이발소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이발이란 원래 제가 사는 동네에서 하는 법이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한 장면 ⓒ 청어람

아내가 동네 미장원을 추천해 주었다. 바깥에서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서 처음으로 머리를 깎았다. 다음부터는 미리 전화해보고 조용할 때 들르곤 했다. 마침 미용사가 얌전하고 수다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어느 날, 이 미장원이 문을 닫았다. 좀 난감했는데 반대편의 외진 골목에 이발과 미용을 같이 하는 가게가 있었다. 늙수그레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자에게 머리를 맡기게 되었다. 동네 사람이라고 이발료도 싸게 받았고, 솜씨가 괜찮았다.

그 집에서 10년도 넘게 이발을 했다. 나중에는 남자에게 머리를 맡기게 되면서 진짜 ‘이발’을 하게 되었다. 면도를 해 주지 않는 미용사와는 달리 이발사는 꼼꼼하게 면도를 해주고 머리도 감겨준다. 특히 나는 수염 면도에 앞서 뜨거운 수건을 얹어주는 서비스를 무척 좋아한다. 손으로 온도를 가늠해 가면서 뜨거운 수건을 덮어주는 이발사의 배려를 느끼는 기분도 쓸 만하다.

▲ 이발 도구들. '바리캉'으로 불린 수동 이발기는 이제 모두 전기이발기로 대체되었다.

지난해 연초에 고향 가까이 이사를 왔다. 천여 세대가 사는 두 개의 아파트촌 주변에 미용실만 대여섯 개가 있는데 정작 이발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가게에 다니기 시작했다. 40대 초반의 미용사는 솜씨가 괜찮았는데 좀 수다스러웠다. 수다쟁이들에게 약은 침묵뿐, 나는 필요한 말만 하고 눈을 감아 버리곤 했다.

날이 갈수록 머리숱이 줄어드니 머릴 깎을 때마다 조금만 자르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날부턴가 아내가 머리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그 집 솜씨가 괜찮더니만 요즘 왜 그러우. 머리가 자연스럽지 않고 무슨 뚜껑 얹어놓은 것 같으우. 그러고 보니 내 눈에도 뭔가 어설프고 낯설어 뵌다. 이참에 그만 이발소엘 가보는 게 어떠우?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데 따른 이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남자들이 이발과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는 특유의 게으름 때문이다. 그런데 미용실의 이발은 그야말로 ‘후딱’이니 성질 급한 남자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이 가게에서는 여자처럼 뒤로 뉘고 머리를 감아주었다. 내 손은 까딱하지 않고 머리까지 감을 수 있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처음부터 이발료는 8천 원이었다. 안동에서와 달리 면도의 과정이 없긴 하지만 적당한 가격이라고 여겼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깎고 만 원을 주니 거스름을 내 주지 않는다. 올랐어요? 네, 만 원 받아요. 주변의 이발료가 대체로 그 정도라지만 대거 25% 인상이니 기분이 썰렁했다. 그러던 차에 도서관 앞 ○○이용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발소와 미장원의 ‘진화’

이발소를 이르는 이름도 여럿이다. 보통은 ‘이발소’로 썼지만 6, 70년대에 일종의 국어 순화 운동의 일환으로 ‘이용소’로 바뀌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에 동네 이발소에 붙은 그런 내용의 안내문을 읽은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때 ‘미장원’ 역시 ‘미용원’으로 바뀌었다.

 

▶ 이용02 (理容) [이ː-] 「명사」이발과 미용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이발03 (理髮) [이ː-] 「명사」머리털을 깎아 다듬음.
  ¶ 그는 이발도 하고 면도도 하고 양복도 제대로 갖추어 입었다.

▶ 이용-소(理容所)[이ː--] 「명사」= 이발소.
▶ 이발-관 (理髮館) [이ː--] 「명사」= 이발소.
  ¶ 오늘도 나는 이발관 의자 위에 걸터앉아 시퍼런 면도칼을 든 이발사 앞에 몸을 눕혀….≪유치환, 나는 고독하지 않다≫

▶ 미용-실 (美容室) [미ː--] 「명사」파마, 커트, 화장, 그 밖의 미용술을 실시하여 주로 여성의 용모, 두발, 외모 따위를 단정하고 아름답게 해 주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집. ≒머리방ㆍ미용소ㆍ미용원ㆍ미장원.
  ¶ 소문난 미용실에서 머리를 지지고 볶거나 싹둑 잘라 냄으로써 해방감에 도취하기도 했고….≪박완서, 도시의 흉년≫
▶ 미장-원 (美粧院) [미ː--] 「명사」= 미용실.
  ¶ 치옥이는 자꾸 기어 올라가는 작은 스웨터를 끌어당겨 바지허리 위로 드러나는 맨살을 가리며 미장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칼을 쓸고 있었다.≪오정희, 중국인 거리≫
        <표준대백과사전>에서

 

‘이발관’이란 이름은 다소 권위적이다. ‘객사 관(館)’자는 아무 데나 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샘터>에 연재된 최인호의 자전소설 <가족>에서 ‘수도이발관’이란 꼭지를 읽으면서 이발소를 ‘이발관’이라고 쓰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이용소보다는 좀 멋을 부린 ‘이용원’도 있었지만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그에 비기면 미장원의 변화는 좀 눈부시다. ‘담 원(院)’자 역시 담장을 두른 집, 궁실을 뜻하니 다소 과장된 명칭이다. 뒤에 이 말은 ‘미용실’로 통일되는가 했지만 이내 ‘헤어 살롱, 헤어 숍, 뷰티 살롱’ 따위의 영자 상호를 붙이게 되면서 미용사도 ‘헤어 디자이너’쯤으로 격상되어갔다.

더불어 ‘호칭 인플레’도 시작된다. 이발사를 ‘소장’이나 ‘관장’, ‘원장’ 따위로 부르는 일은 없다. 대체로 ‘아저씨’라고 부르고 더 높일 필요가 있으면 ‘사장님’이면 된다. 그러나 미용실은 좀 다르다. 언젠가 아내는 단골로 다니던 가게의 미용사가 ‘원장’이라고 불리길 좋아한다면서 입을 삐죽댔다. 때에 따라 이들은 실장으로, 또는 디자이너 ‘선생’으로도 불린다.

미용이 단순 기능에서 일종의 실용 학문으로 대학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주요한 변화다. 미용을 공부하러 외국 유학을 가기도 했다. 일부 국내 미용실은 체인점이 되면서 해외에 수출될 정도로 규모가 커지기도 했다.

그예 ‘남자들은 이발소, 여자들은 미장원’이라는 구분도 사라졌다. 젊은 남성들이 미장원의 주요 고객이 되었을 뿐 아니라 미용사로 진출하는 예도 많아졌다. 한때는 ‘이발’의 뜻으로 쓰이던 ‘이용(理容)’이 ‘이발과 미용을 통틀어 이르는 말’(<표준대백과사전>)이 된 까닭이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드나들던 동네 이발소의 기억은 아련하다. 이발사는 철제의 이발 의자 양쪽 팔걸이에다 빨래판을 걸치고 거기 아이들을 앉혔다. 의자에 앉히기에는 아이들의 체구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아, 따로 미용실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여자아이들도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전기이발기가 없던 시절이라 수동의 이른바 바리캉(프랑스 이발 기구 회사 Barriquant et marrer를 지창한 일본식 발음)이 쓰였다. 성능이 시원찮은 놈을 만나면 이 수동 이발기에 머리카락을 끼여 씹히기 일쑤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이 기계가 학생부 교사들이 아이들의 머리 한복판에 고속도로를 내는 데 매우 요긴하게 쓰였다.

모르긴 해도 이발소가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장발이 유행하던 시절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금남의 공간이었던 미장원이 남성 고객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을 것 같다. 그러면서 한때 젊고 예쁜 여자 면도사 여럿을 두고 성업 중이던 이발소들이 이른바 퇴폐 영업으로 넘어간 것도 1980년대를 넘으면서였던 듯하다.

떠나온 고향에 가면 어디선가 흘러온 타관 사람이 연 이발소가 지금도 문을 열고 있다. 나는 인근 고등학교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한 이 이의 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해마다 인구가 주는 시골 마을을 지키고 있는 그의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그가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의 손님을 받고 있는지가 늘 궁금했다.

이발, 혹은 지난 세월 돌아보기

○○이용소의 이발사는 능숙한 솜씨로 내 머리를 만졌다. 머리를 깎아보면 이발사의 솜씨가 어떤지는 느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가위로 머리의 전체 길이를 일부 다듬은 다음, 전기이발기로 가장자리를 도려냈고 면도칼로 귀 주변과 목덜미의 잔털을 밀었다.

 

“안(顔) 면도 안 할 거지요?”
“좀 해 주시지요.”

▲ 구식 이발 의자 ⓒ doopedia

 

서둘러 작업을 끝내려던 그를 채근하여 나는 무려 일여 년 만에 얼굴 쪽의 면도를 했다. 뜨겁게 수건을 얹고, 무슨 팩 비슷한 것을 포함하여 10여 분쯤의 서비스를 더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안동의 이발소에 비기면 훨씬 깨끗한 세면대에서 비닐 앞 가리개를 씌우고 머리를 감아주었다.

건조기로 머리를 말려주는 것으로 이발사의 작업은 끝났다. 미용실에서와 달리 남방까지 벗고 런닝 셔츠 바람이었던 나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특별히 머리를 만진 것도 아닌데 조금 젊어 보이는 단정한 자신의 모습에 나는 만족하면서 얼마냐고 물었다.

 

“만이천 원이요. 안면도 안 하면 9천 원이고.”

 

내가 마지막 받은 서비스는 3천 원짜리였던 모양이다. 나는 지갑을 꺼내 요금을 지불하고 고맙다고, 수고하시라고 인사하고 이발소를 나섰다. 이발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 집에서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내는 반색했다.

 

“그럼 이렇게 깎는 게 맞지. 앞으론 거기 가서 깎으시우.”
“만이천 원이나 주었어. 안면도를 하지 않으면 9천 원이래.”
“만이천 원 줘도 그 값을 했는데 뭘. 됐어. 아주 보기 좋아요.”

 

아내의 눈에도 이발사의 솜씨가 정식의 남자 이발법이라는 게 보였던 모양이다. 뒤통수 쪽도 양옆으로도 머리 모양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서운해 보이는 앞머리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가게를 나오면서 나는 휴대전화로 이발소의 사진을 하나 찍었다.

이 동네에 사는 한 앞으로도 나는 이 이용소를 쭉 이용하게 될 것이다. 글쎄, 이발사와는 얼마나 친해질지 알 수 없다. 나도 그렇지만 그도 그리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은 아니니까. ○○이용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마다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우리가 건너온 세월을, 그 시간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옛 기억을 돌아보는 일도 쏠쏠할 듯하다.

 


2013. 3. 1. 낮달

 

* 이 이발소와의 인연은 1년을 채우지 못했다. 나는 날마다 종편을 틀어놓은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를 떠났다. [관련 글 : 이발소와 종편 채널, 그리고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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