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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묘역에서 ‘통일’을 다시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0.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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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동암 도혁택(1932~2011) 선생의  1 주기 추모제

▲ 통일운동가 동암 도혁택 선생의 1 주기 추모제가 고인의 묘역에서 베풀어졌다.
▲ 묘역에는 군데군데 분홍빛 코스모스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

세상엔 숱한 운동이 존재한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눈부시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운동의 목록들을 생각해 보라.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노동운동과 교육운동……. 우리 현대사는 그러한 운동이 빚어낸 승리와 패배, 그 역사적 전개 과정에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목록 속에서 ‘통일운동’을 찾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여러 운동의 눈부신 성과와 전망 속에 그것은 그 변방에 외롭게 고단한 몸을 가누고 있다. 이 나라 민주주의와 분단 모순을 포괄하는 가장 크고 넓은 담론을 바탕으로 한 통일운동은 그러나 운동의 주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통일운동은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다. 화급을 다투던 반독재 민주화 투쟁 따위로 일관해 온 고단한 현대사 가운데서도 ‘통일운동’은 우선순위가 한참이나 떨어진 변방의 운동이었던 탓일까. 여타의 운동처럼 당장 현실의 문제를 겨누지 못하는 통일운동의 성격이 그걸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마저도 느슨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분단 반세기를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남북의 화해와 통일의 기운은 멀기만 하다. 그러나 척박한 운동의 토양 위에서도 통일운동의 명맥을 이어온 이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이 분단 모순의 시간에도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 일종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동암(東巖) 도혁택(1932~2011)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경북 칠곡군 지천면 소재 현대공원 묘원을 찾으면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선생의 이름은 지역 운동에 이름을 올린 이들도 머리를 갸웃할 정도로 낯설다.

 

1차 인혁당 사건과 동암 도혁택

 

그러나 선생이 헤쳐 나온 우리 현대사의 곡절은 만만치 않다. 동암은 대구사범과 경북대 사대를 졸업하고 중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4·19 이후 교원노조 운동에 뛰어들며 일차 투옥(1961)되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다시 투옥된 이후 동암은 통일 운동에 50여 년의 삶을 바쳤다.

 

동암 도혁택은 2차 인혁당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사법살인을 당한 도예종(1924~1975) 열사의 조카였다. 동암은 열사의 조카이면서 동지로 이승만 독재정권, 3·15 부정선거, 5·16 쿠데타 등에 맞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관련 글 : 야만의 현대사-인혁당 피고 8인 사형 집행]

▲ 고인의 차남 도영주 원장, 류근삼 민자통 대경회의 의장, 김찬수 인혁재단 이사 ( 왼쪽부터 )
▲고인의 종숙모인 도예종 열사의 부인 신동숙 여사가 헌화하고 있다 .
▲음복. 지금도 여전히 열혈 투사인 대구 지역 통일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그는 생전에 민주자주평화통일(민자통) 대구·경북회의 상임의장, 4·9 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 평화통일 대구시민연대 고문, 범민련 남측본부 대구경북 의장과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조국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담은 채 지난해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동암의 1주기 추모제는 4·9 인혁 재단의 주관으로 지난 10월 6일 11시께 고인의 무덤 앞에서 베풀어졌다. 유족들과 일흔, 여든을 훨씬 넘긴 백발의 노장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추모제는 4·9 인혁재단 김찬수 이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지역 평화통일 운동의 지킴이들

 

추모제의 과정 내내 백발이 성성한 노전사들의 굽은 어깨가 마음에 애잔하게 다가왔다. 쇠잔해 가는 육신이지만 형형한 눈길을 빛내고 있는 이들 가운데 도예종 열사의 부인이신 8순의 신동숙 여사, 1970년대 구미에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끈 도영화 장로, 범민련 대구경북 의장인 한기명 여사, 민족자주평화통일 대구경북회의 류근삼 의장도 있었다.

▲ 도예종 열사 부인 신동숙 여사

어떤 사람들의 과거가 다음 세대에게는 현재고 미래이기도 하다. 이들 노전사들의 굽은 어깨, 굵은 주름살,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은 그들이 지향했던 미래를 위해 바꾼 안일과 평화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때로 오랜 과거를 추모하며 비장에 젖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낙관을 이야기하며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류근삼 민자통 대경 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고인에게 통일운동의 근황을 보고했다. 그는 10·4선언 5돌 기념 ‘범민련 남북해외 공동성명’의 결의를 읽는 것으로 그들이 나이를 뛰어넘어 여전히 통일운동의 열혈 전사임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1.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기치를 변함없이 높이 들고 나갈 것이다.
2. 내외 반통일 세력의 광란적인 동족 대결과 전쟁 책동을 단호히 저지시켜 나갈 것이다.
3. 범민련은 나라의 평화와 조국 통일을 바라는 해 내외의 각계 각층과의 연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해 나갈 것이다.

 

추모제는 참배객들이 묘소에 국화 한 송이씩 바치는 거로 끝났다. 음복하면서 젊은이들이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고 어른들은 덕담을 내려주면서 세대 간의 대화가 잔뜩 무르익었다. 구미참여연대 회원들에게 도예종 열사의 부인 신동숙 할머니는 당신께서 젊은 시절에 구미초등의 교사였다는 사실을 회고해 주기도 했다.

 

모든 어른이 그러했지만, 신동숙 여사는 팔순의 백발을 날리면서도 젊은이 못지않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했다. 그이의 파안대소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이가 겪었던 32년의 고통스러운 세월과 그 야만의 현대사를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암의 묘소 건너편 산등성이 묘역에 인혁당 열사 네 분의 묘소가 있다 .
▲인혁당 열사들의 묘소 앞에서 구미참여연대 회원들이 참배하고 있다 .
▲ 4.9 인혁당 열사들. ⓒ 4.9 인혁재단 누리집
▲인혁당 열사들의 묘소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하재완 , 송상진 , 도예종 , 여정남 열사의 묘소 .

40년 전부터 운영되어 온 공원묘지는 산의 경사면을 빼곡히 묘지를 채우고 있었다. 군데군데 화사하게 피어 있는 연분홍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동암 선생의 묘소가 있는 산등성이 반대쪽에 묘역에는 인혁당 열사 네 분의 묘소가 있다.

 

4·9 인혁당 열사들의 묘소를 찾다

 

추모제를 끝내고 동암의 차남인 치과의사 도영주 원장의 안내로 구미참여연대 회원들과 함께 반대쪽 묘역의 인혁당 열사의 묘소를 찾았다. 하재완, 도예종, 여정남 열사는 앞쪽에, 송상진 열사는 뒤쪽에 모셔져 있었다.

 

검은 대리석에 단정하게 새겨진 글귀 ‘통일열사’ 넉 자의 의미가 새삼 새겨졌다. 단지 민주주의와 통일을 꿈꾸었던 이유만으로 국가는 이들의 목숨을 거두고, 삼십이 년 동안 그 유족들의 삶을 짓밟았다. 결국, 재심을 통해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여전히 이들의 복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추모제에서 통일운동의 노전사들은 10·4 공동선언을 기념하는 공동성명 소식을 고인에게 바쳤다. 그러나 오늘 뉴스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여당의 의혹 제기를 전하고 있다.

 

여당은 대화록에 들어 있다는 이른바 ‘국기 문란 사실(NLL 무효화 구두약속)’에 대해서 국정조사를 하자며 야당을 압박하고 야당은 이에 대해 ‘허위날조이고 수준 낮은 정치공세’라며 이를 일축하고 있다. 통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선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선이 아닌 것일까.

 

인혁당 열사들 묘소에 참배하고 하산하는 길, 민주주의와 통일의 이름으로 스러져간 모든 죽음이 시나브로 우리 시대의 현재와 이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열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동암의 삶과 죽음도 역사의 인과를 예비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인 것이다.

 

 

2012. 10.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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