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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거기 ‘은빛 머리 고승’들, 무더기로 살고 있었네

by 낮달2018 2020.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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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닭실마을을 찾아서

▲ 봉화 닭실마을[유곡(酉谷)] 충재 종택에도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었다.
▲ 세 시선. 청암정 앞 돌다리에 앉은 소년과 차양 모자를 쓴 할머니, 왼쪽 끝에서 사진기를 들고 있는 사람.
▲ 상기도 피지 못한 산수유. 봉오리가 반쯤 열렸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봉화를 다녀왔다. ‘병아리 떼 종종종’은 아니지만 ‘봄나들이’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지만, 연도의 풍경은 이미 봄을 배고 있었다. 가라앉은 잿빛 풍경은 예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햇볕을 받아 속살을 드러낸 흙빛과 막 물이 오른 듯 온기를 머금은 나무가 어우러진 빛 속에 이미 봄은 성큼 와 있는 것이다.

 

목적지는 봉화의 닭실마을. 도암정(陶巖亭)을 거쳐 청암정(靑巖亭), 석천정사(石泉精舍)를 돌아오리라고 나선 길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법전이나 춘양의 정자들도 찾아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것. 풍경이 좋으면 거기 퍼질러 앉아서 보내리라 하고 나선, 단출하고 가벼운 나들이였다.

 

닭실마을의 충재 종택 마당에서 이제 막 봉오리가 벙글기 시작한 산수유를 만났다. 남도의 봄소식은 진작에 만개한 산수유를 전하고 있지만, 경북 북부지역의 봄은 더디다. 원색의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단체 관광객들이 벌이는 소란 속, 산수유 노란 봉오리는 시나브로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닭실마을 건너편 산등성이를 끼고 흐르는 석천계곡에도 봄은 당도해 있었다. 물 건너 산그늘은 여전히 음습했고, 골짜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도 차다. 우리는 내를 내려다보는 언덕바지에 차를 대고 준비해 간 점심을 먹었다. 현미밥에 김치, 연근조림, 풋고추와 된장의 소박한 밥상이었다.

▲ 문정희 시인이 ‘고승’으로 비유한 버들강아지(버들개지).  2010년 3월 13일, 봉화 석천계곡.

웬일인지 물은 그리 맑지 않았는데, 내를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어쩐지 위태해 보였다. 다리 이편 물가에는 버들개지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솜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질 이 갯버들의 꽃은 지난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기어이 봄을 맞았다.

 

문정희 시인이 ‘고승(高僧)’이라 부른 이 ‘솜털이 즐거운’ 버들꽃은 ‘높은 산’이나 ‘절’에 가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산그늘 아래’ ‘새로 눈뜨는 햇살’을 들추면 만나는 꽃인 까닭이다. 은빛 머리 부드러운 이 수도승들은 ‘조그만 바위 암자처럼 곁에 두고’, ‘거기 무더기로 살고 있다.’

 

‘얼었던 상처 맑은 물로 풀어 편안한 뿌리’, ‘살랑살랑 마음으로 흔들며’ 무더기로 핀 버들강아지를 렌즈에 담는다. 그리고 이 은빛 머리 솜털이 부드러운 ‘큰스님’의 마음이나 어저께 열반한 법정 스님이나 또 누구누구 하는 구도자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겨우내 꽁꽁 언 냇물에 뿌리를 담그고 버들개지가 견뎌낸 시간 만으로도 이 고승의 도는 깊고도 넓을 터이므로.

▲ 낙동강 가의 버들개지. 3월 14일, 안동.

 

2010. 3.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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