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온 봄
정말, 어떤 이의 표현대로 봄은 마치 ‘길고양이처럼 찾아온’ 느낌이다. 봄인가 싶다가 꽃샘추위가 이어지곤 했고 지난 금요일만 해도 본격 꽃소식은 한 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일교차가 컸던 탓일 것이다. 한낮에는 겉옷을 벗기려 들던 날씨는 저녁만 되면 표변하여 창문을 꼭꼭 여미게 했다.
토요일 오전에 아내와 함께 아파트 앞산에 올랐는데, 산길 주변 곳곳에 참꽃(진달래)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출근하는 숲길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어서 나는 잠깐 헷갈렸다. 일요일 오후에 돌아보니 아파트 주차장 어귀에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아래 동백꽃도 화사했고.
사진기를 들고 나갔더니 화단의 백목련은 이미 거의 끝물이다. 아이들 놀이터 뒤편에 못 보던 매화가 하얀 꽃을 피우고 섰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나무일 텐데, 왜 내 눈에는 띄지 않았을까. 머리를 갸웃하다 말고 자신이 일상에 얼마나 무심했던가를 뉘우쳤다.
지난밤에 아내가 부엌에서 잠깐 떨거덕거리더니 진달래 화전을 부쳐 내어왔다. 언제 꽃을 꺾었던지, 하얀 찹쌀 위에 보랏빛 나는 진달래가 긴 꽃술을 뉘고 있었다. 고소한 내음에 사양하지 않고 나는 다섯 개의 화전을 먹어 치웠다.
오늘 출근은 숲길로 했다. 원두막을 세워놓은 산등성이에 벚꽃이 피고 있었다. 그때쯤은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좀 얼떨떨하기만 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아차, 본관 교사 앞에 일렬로 선 벚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 금요일에만 해도 꽃망울이 져 있기만 했는데, 불과 이틀 만에 벚나무는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었다.
“이틀 새에 교정이 훤해졌네요. 어디 먼 데 다녀온 기분이군요.”
“글쎄, 말이에요. 한 이틀만 있으면 절정일 것 같네요.”
동료들과 반가운 꽃 안부를 나누는데 모두 싱글벙글하고 있다. 어쨌든 봄이고, 꽃이 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꽃소식 가운데 우리의 일상이 놓이는 게 싫어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어젯밤 스마트폰으로 찍은 진달래 화전 사진을 불러냈다.
“화전이네요. 우리 집에서도 엊저녁에 화전을 부쳤어요. 아이가 성활 부려서요.”
“그래요. 나는 이걸 몽땅 다 먹어 치웠지요.”
앞자리 후배 여교사가 내 사진을 보더네 반색했다. 그리곤 꽃술을 그대로 부쳤냐면서 꽃술은 독이 있다고 하던데 모르셨냐고 되받는다. 몰랐어. 나는 서둘러 아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내가 냉큼 답을 보내왔다.
“화전 만들 때 꽃술은 제거해야 한 대. 거기 독이 있다나~”
“독을 잡수었네, 어떡해^^”
집에 와서 그 화제가 이어졌다. 아내도 인터넷 검색을 해 본 모양이다.
“뭐, 그 정돈 괜찮다고 하던걸, 뭐.”
“그렇지. 우리 어릴 때 진달래꽃 따 먹을 때, 꽃술을 가려서 먹었나, 뭘…….”
그건 봄의 허기였을까. 아이들과 어울려 온 산을 헤매며 놀 때 우리는 연신 진달래꽃을 따 먹곤 했다. 하산할 무렵에 아이들의 혀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까닭이다. 봄볕에 까맣게 타던 유년의 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내일, 모레는 비가 내릴 거라는 소식이다. 지난해처럼 벚꽃이 절정일 때 비가 내려 꽃잎을 죄다 떨어뜨리게 하려나. 수요일쯤엔 금오산 어귀로 벚꽃을 보러 갈까 했더니 여차하면 공을 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봄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언제나 그렇듯 물릴 수 없을 만큼 완연하게.
2015. 3. 30. 낮달
* 이 글의 제목은 원래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온 봄’이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어떤 나그네가 댓글을 달았다.
“도둑고양이는 없어요……. 길고양이입니다. 단지 길에서 사는 초록지구의 동무들입니다.^^”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풍진 세상에 >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벗의 도화원(桃花源), 그 연분홍 안개 (0) | 2020.04.14 |
---|---|
동네 한 바퀴-매화 지고 앵두, 살구꽃까지 (2) | 2020.03.30 |
김삿갓, 구비시(口碑詩)의 창조자 (0) | 2020.03.24 |
거기 ‘은빛 머리 고승’들, 무더기로 살고 있었네 (0) | 2020.03.20 |
춘분 날, ‘설’은 녹고 ‘매’만 남은 설중매(雪中梅) (0) | 2020.03.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