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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김삿갓, 구비시(口碑詩)의 창조자

by 낮달2018 202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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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시인 김삿갓의 무덤을 찾아

▲ 김삿관 문학관 . 정작 날이 늦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

시인 김삿갓[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실존 인물이면서도 마치 전설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전설처럼’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그와 그의 문학에 대해 정작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에 대한 인상이 ‘삿갓’과 ‘죽장(竹杖)’, 그리고 ‘뜬구름’과 같은 ‘방랑’의 이미지로만 구성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실존했으나 전설처럼 떠오르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소비된 인물

▲ 난고 김병연 (1807~1863)

그러다 보니 그의 이미지는 냉전 시대의 독재 정권에 의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1964년부터 무려 30년간 한국방송(KBS) 제1라디오 전파를 탔던 반공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그것이다. 이 드라마는 ‘김삿갓’의 가상 여행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북한 지도부의 실상을 고발한 뒤, 끝부분에 4행의 풍자시를 붙이는 형식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였다.

 

결국, 30여 년간 방송된 이 드라마가 김삿갓과 관련해 전한 진실은 그가 ‘풍자시인’이라는 것 정도인 셈이다. 풍자는 거칠게 정의하면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따위를 빗대어 비웃으면서 공격하는 일’이다. 김삿갓은 평생 방랑하면서 상류사회를 풍자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었다.

 

방랑과 풍자로 점철된 김삿갓의 삶과 문학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가족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순조 7년(1807)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되었던 평안도 선천 부사였던 김익순의 손자로 태어났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영월로 옮겨 살던 그는 예비 과거 격인 백일장에 참여한다.

 

백일장의 시제는 ‘정 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라’(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는 것이었다. ‘정 가산’은 홍경래의 난(1811) 때 반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가산 군수 정시. 집안의 내력을 모르고 있던 그는 조부인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로 장원급제한다.

 

역적의 후예가 된 가족사

 

뒤에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절망과 비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역적의 자손인 데다 그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썼다. 그리고 욕된 이름을 버리고 감삿갓으로 자처하면서 방랑길로 나서게 된 것이다.

대중들에게 김삿갓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주로 한문으로 시를 썼다는 점인 듯하다. 20년 넘게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쳤지만,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가르치게 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무제」는 방랑 생활 속에서 들른 어느 시골 농가에서 죽 한 그릇을 대접받고는,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오히려 자신도 청빈하고 초탈한 삶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칠언절구다. 더 볼 것 없이 농민의 삶에 대한 연민과 위로와 배려가 짙은 시다.

 

김삿갓 시의 ‘언어 유희성과 구비성’

 

「삿갓을 읊다」는 ‘표연 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으로 풀이된다. 그에게 ‘삿갓’은 자유로운 방랑자의 삶의 상징이다. 그것은 허위와 가식을 벗어 버린 진솔한 삶이자, 무소유의 자유와 흥취, 생활에 뿌리내린 현실적 삶의 지향인 것이다.

 

이창식 교수(세명대)는 김삿갓 시의 ‘언어 유희성과 구비성’에 주목하면서 조선 후기의 구비적 전통이 한시의 장벽을 무너뜨렸는데, 김삿갓의 시는 그런 흐름 위에 우뚝 서 있다고 진단한다. 그의 시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표현 기교의 측면에서 한시의 정형성을 파괴했다. 한시임에도 그의 시가 민요·잡가·사설시조 등의 구비 시가처럼 민중의 사랑을 받으며 구전되어 온 까닭이 여기 있다. [이하 이창식 <김삿갓 시의 구비문학적 성격> 참고함]

 

김삿갓 시에는 ‘파격적 희작성(戲作性)과 해학성, 외설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파자(破字)는 물론,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고 비속할 만큼 희작화한 방식’으로 민중들의 삶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의 희작시(戱作詩)는 민간의 한자 사용 기법을 이용해 점잖은 사대부의 감춰진 독설을 시격(詩格)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한시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는 이러한 정서적 성격도 큰 역할을 했다. 세태를 꼬집는 풍자적 내용과 함께 한자를 파격적으로 사용한 희작시는 엄숙한 사대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궁벽한 시골의 농민들이나 서당 아이들에겐 훨씬 친근하게 다가갔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욕은 억압의 해소에도 좋지만, 정서적 교감에 작용하는 전달 매체’인 것이다.

시 ‘스무나무 아래’는 조정해 읽으면 ‘이 씨팔 놈아’다. 그는 속어·욕설·육담·음담패설 등을 통해 세상을 질타했는데, 이 시는 ‘한자어로 순수한 우리말을 표기하는 파격적 실험’을 보여준다. 시에서 ‘二十’은 ‘스무’, ‘三十’은 ‘서러운’ 또는 ‘선’이고, ‘四十’은 ‘망할’으로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五十’은 ‘쉰’, ‘七十’은 ‘이런’이라는 뜻으로 써서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받은 냉대를 노래하고 있다.

 

시 ‘서당 욕설시’는 ‘내조지’, ‘개좃물’, ‘제미씹’, ‘내불알’ 등 걸쭉한 육담이 쓰였다. 그가 내뱉는 육담의 욕지거리는 뒤틀린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다. 그가 즐겨 쓴 육두문자, 속어, 욕지거리 등은 시의 분위기를 파국으로 몰고 갔지만, 그 이면에 세상에 전하는 통쾌함을 감추고 있다.

 

민중의 저항에 무심, 연민에 그친 농민관 …그 문학의  한계도 뚜렷

 

그러나 그의 문학이 드러낸 한계도 분명하다. 평민에 대한 애정과 빈부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것은 상승되지 못했다. 농민에 대한 시선은 연민에 그쳤을 뿐,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처럼 전체 농민에 대한 해방 사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당시 민중들의 저항에 대해서도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왕조와 양반 계급에 대한 비판적 인식도 적극적인 투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그의 풍자시에 대한 평가도 비슷하다. 그것은 개별적 사실과 개인적인 반감에 결부되었을 뿐 사회적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대중의 보편적 문제로 제기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대 사회에 대해서 어떤 대책과 개혁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결함들이 그의 문학이 이룩한 긍정적 측면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김삿갓은 구비문학의 현장을 방랑한 ‘구비시(口碑詩)의 유통자인 동시에 창조자’로 살면서 억압받던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개인적 불만으로 시작된 그의 세계관은 날이 갈수록 ‘제도와 봉건 체제의 부정’이라는 형식으로 확대되어 갔다. 결국, 단편적·통속적이긴 하나 그의 풍자와 웃음은 봉건 지배층을 겨누는 예리한 칼날이었기 때문이다.

▲ 묘소에서 바라본 김삿갓 유적지 전경 . 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았다 .
▲ 김삿갓 묘소 . 자연석으로 상석을 삼았다 .
▲ 시비들. 옆에 나란히 세운 오석에 번역시를 새겼는데 이게 생뚱맞기만 하다.

스물두 살에 시작된 김삿갓의 방랑의 삶은 57세 되던 해 전라도 화순 땅에서 끝났다. 아들 익균이 그의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영월군에서는 그의 묘소 주변을 ‘김삿갓 유적지’로 지정해 관광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98년도부터 매년 10월 초 ‘난고 김삿갓 문화 큰잔치’를 연다. (하동면은 2009년 10월 김삿갓면으로 변경되었다. )

 

영월에 조성된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의 무덤을 찾은 것은 지난 12월 8일이다. 와석리는 경북 영주시,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 지역으로 산맥의 모습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리는 곳이다. 미끈한 유적비가 서 있는 유적지 풍경은 이 땅의 여느 관광지와 다르지 않았다.

 

묘소는 이른바 자연석으로 만든 상석 뒤에서 김삿갓 계곡을 굽어보고 있었다. 계곡 주변에 그의 한시를 새긴 몇 기의 돌비가 서 있었지만, 정작 거기서 김삿갓의 문학을 얼마나 흘겨볼 수 있을지. 김삿갓이 지은 풍자의 노래가 그랬듯 노래가 삶과 어우러지는 시대는 이미 지나 버렸다. 화석처럼 굳어 비에 새겨진 몇 줄의 노래는 그래서 여전히 전설처럼 이 땅을 떠도는 것일까.

 

 

2007. 12.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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