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반민족행위자 김성수, 건국훈장 대통령장 서훈이 취소되다
지난 13일, <동아일보> 창업자 인촌 김성수(1891∼1955)의 건국훈장 대통령장 서훈이 56년 만에 박탈되었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이 그의 친일행위를 인정함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서훈 취소를 요청했고 이날 국무회의가 이 훈장의 취소를 의결한 것이다.
김성수는 1962년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각종 학교를 세운 ‘언론·교육 분야 공로’로 건국 공로 훈장 복장(현재의 대통령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2009년 대통령 소속기관인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나 뒤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사실이 드러났다’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20인에 포함되었다.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지정 20인 서훈 박탈 완료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위암 장지연(1864~1921)을 비롯하여 이승만의 비서실장,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1898~1996) 등 19인은 2011년에 서훈이 취소되었지만, 김성수는 ‘법원 확정판결이 남았다’라는 이유로 취소 대상에서 빠졌다.
인촌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사 사장과 인촌기념회가 행정자치부 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 반민족행위 결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소송의 상고심에서 일제강점기 김성수의 친일행적 상당 부분을 친일행위로 인정한 원심의 판단에 위법이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김성수의 친일행위는 굳이 법률적 판단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언론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의 후손들은 법을 이용하여 그에 대한 서훈 취소를 늦춘 것이다. 그런 물타기가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친일 문제에 대한 엇갈린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런 물타기가 어렵게 되었다.
스승이 제자에게 한 ‘죽음에의 권유’
김성수의 친일행위는 그가 맡았다는 숱한 친일부역단체들의 간부 이력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는 1937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교장으로 취임한 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시국 강좌를 맡았고, 국방헌금 1천 원을 헌납했다.
조선에서 징병제실시가 결정되자 그는 1943년 8월 5일 자 <매일신보>에 장문의 ‘징병 격려문’을 기고했다. 그는 징병령에 대해 ‘쾌보’, ‘감격’, ‘영광’ 따위의 낱말로 감읍해 하면서 그것으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표된 조선의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영광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 반도 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心切)하였던 바이다.
……그런데 이 징병제실시로 인하야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 반도 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 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신생(新生)할 제2의 양질(良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지 아니하리오. 하고(何故) 오하면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라.……”
-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尙武) 기풍을 조장하라’, <매일신보> 1943. 8. 5.
1943년 11월 7일 자 <매일신보>에는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라고 독려했다. 이 글의 ‘의무’는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서, 살아오면서 받은 국가·가정·사회의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었다. 만약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서 ‘대동아건설’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제국의 제1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대우, 곧 권리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경고했다.
김성수는 조선인이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얻는 과정으로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곧 죽을지도 모르는 학병에 지원하는 것을 들었다. 학병지원 마감일을 맞아서는 <경성일보>에 학병 미지원자는 모두 원칙대로 징용되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징병검사를 맞이하여 <매일신보>에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을 밝히면서, 한 사람도 주저함 없이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어가는’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12월, 보성전문학교의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 무비(無比)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되었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 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
그것은 은사의 염원이라기엔 끔찍한 ‘죽음에의 권유’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제강점기 이른바 사학을 세웠던 친일 교육자들이 행적은 한결같았다. 학병지원을 권유하고 징병을 칭송한 김성수와 여학생들에게 정신대 지원을 권유한 김활란은 지금도 그들의 학교에서 동상으로 우뚝 서 21세기의 대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2018. 2. 14. 낮달
참고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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