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⑤] 민족시인 이육사의 항일투쟁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면서 문학 교사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목이 있다. 비애와 부끄러움 없이 가르칠 수 없는 참담한 현대(근대)문학사가 그것이다. 개화기를 거쳐 근대로 진입하는 이 시기의 문학을 담당했던 일군의 시인 작가들을 고스란히 ‘친일 문인’ 명단에서 만나야 하는 까닭이다.
첫 신체시 작품인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를 쓴 육당 최남선과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되는 <무정>(1917)을 썼던 춘원 이광수는 한때 이른바 ‘2인 문단 시대’를 이끌었던 신문학의 개척자였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자로 활동했으나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이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 문인으로 전락한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의 신소설로 일컬어지는 <혈의 누>(1906)의 작가 이인직이 국권 피탈 때 이완용의 비서로 그의 정치적 노선을 추종했던 친일파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수학, 육군성 소속의 한국어 통역으로 러일전쟁에 종군했고 일왕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바쳤던 인물이었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로 시작되는 시 ‘불놀이’를 <창조> 창간호(1919년)에 발표, 자유시 시대를 연 시인 주요한은 어떤가. 정작 그가 일제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온 천하가 한집안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건 구호)를 부르짖었던 골수 친일파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주요한은 조선문인보국회 등 주요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약하였고 1940년부터 꾸준히 친일 문학 작품을 발표하여 황민화(皇民化) 시집 <손에 손을>(1943)을 펴낼 만큼 화려한 친일 행각을 벌인 이다. 1944년 1월 19일, 주요한은 매일신보에 ‘천인침(千人針)’을 발표한다.
‘천인침’(센닌바리)란 일본의 미신을 따라 ‘처녀 천 명이 수를 놓아 총알을 막아준다는 배띠’다. 이 복대(腹帶)는 강제 동원된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어머니와 여인들의 안타까운 사랑과 연민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정작 일제는 거기 담긴 모성을 ‘전쟁과 파시즘 찬양’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주요한은 이 글에서 천인침에 엉긴 것이 ‘좁게 말하면 이천 오백만 조선 동포의 정성이요, 넓게 말하면 일억 황국 국민의 모두’의 ‘붉은 정성’이라 예찬하면서 이른바 황민 문학 선봉으로서의 명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 정성은 곧 무운장구를 비는 정성인 동시에 임전무퇴의 용기를 비는 것이요, 칠생보국(七生報國, 일곱 번 태어나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의 충성을 비는 것일지며 옥쇄의 영광과 격멸의 기백과 필승의 신념을 바늘마다 아로새긴 정성일 것이다.”
주요한이 <매일신보>에 보낼 원고, ‘흰옷 입은 이 땅의 백성도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으로서 ‘지킬 본분’(이상 ‘천인침’)을 끼적대고 있었고, 같은 신문에 소설가 김동인의 친일 논설 ‘반도 민중의 황민화’가 실린 1월 16일 새벽,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한 독립운동가가 숨졌다.
친일 시인 주요한은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으로서 ‘흰옷 입은’ 백성을 주워섬겼지만,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온 이 사나이는 그 혹독한 겨울 한가운데서도 ‘강철로 된 무지개’(이상 시 ‘절정’)를 노래했던 시인이었다.
향년 40세. 그는 어려서는 원록(源祿)과 원삼(源三)으로 불리었지만, 베이징의 감옥에서 육사(陸史)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그의 주검은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거두어 화장, 그 유골은 아우 원창을 따라 조국으로 돌아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광수가 ‘축 입영(入營)의 노보리(깃발)’과 센닌바리를 찬양한 ‘학병에게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매일신보>에 발표(1944.1.17.)한 것은 육사가 숨지고 난 이튿날이었다. 이듬해인 1945년 2월 16일, 한 식민지 청년이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순국했다. 공교롭게도 육사가 숨진 지 꼭 1년 1개월 후였다. 향년 28세.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시 ‘서시’) 괴로워했던 순결한 영혼의 시인, 윤동주였다.
우리는 이들 두 사람의 이름 앞에 ‘민족 시인’과 ‘저항 시인’이라는 헌사를 바친다. 이 땅에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현대문학이 노래 되기 시작한 이래 ‘시인’으로 자신을 알린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아무에게나 그런 헌사를 드리지 않는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사회를 감시하는 작가의 사명을 ‘잠수함의 토끼’에 빗댔다. 그러나 우리 현대문학사를 수놓아 온 유명 문인들은 죽음으로 시대의 위기를 깨우치는 대신 자기 시대의 모순 앞에 투항,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파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조선문인보국회 등 반민족적 친일단체 활동을 통해 국내는 물론 일본·중국·남방 등의 전쟁터를 돌면서 일본군을 위문 격려했다. 또 각종 연설회를 열어 징병과 징용, 정신대 동원에 앞장서 동포를 사지로 내몰기도 했다.
이처럼 숱한 문인들이 식민지 현실에 순응, ‘타협’이란 이름으로 영혼을 팔고 있을 때, 이들은 자기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윤동주)과 미래 지향의 예언자적 역사의식(이육사)으로 현실과 맞서 싸웠다. 그것만으로도 이들의 삶과 문학은 눈부시다.
육사의 삶과 자취를 더듬으려 찾은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는 이미 육사가 살았던 시절의 땅은 아니다. 원래 이 마을은 퇴계의 5대손 이구(1681~1761)가 정착하면서 ‘세간 명리를 부운같이 여기고 속진(俗塵)과 치욕을 멀리한다’는 뜻에서 ‘원촌(遠村)’이라 불린 마을이다. 그러나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인근 천곡과 합치면서 ‘원천’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육사는 퇴계의 14대손으로 1904년 5월에 여기 원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생가는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만수선(滿水線)에 걸리면서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로 옮겨졌다. 지금 그 집터에는 1993년에 세운 청포도 시비와 육우당 유허비만이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육사는 열두 살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
대구로의 이사, 혼인, 단기간의 일본 유학 등을 거쳐 육사가 베이징으로 간 건 1926년, 스물두 살 때였다. 첫 번째 중국여행 이후 육사는 여러 차례 베이징을 왕래하는데 자신의 삶을 거기서 마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광저우 중산(中山)대학에서 후학기를 수학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이활(李活)’이란 이름을 쓰게 된다. 이듬해 여름에 일시 귀국한 그는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폭파 사건인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형 원기, 두 동생과 함께 구속된다. 장진홍(1895~1930)은 오사카로 몸을 피했고, 다급해진 일경이 육사를 비롯한 청년들을 범인으로 엮으려 한 것이었다.
육사는 미결수로 복역하다 장진홍이 검거된 뒤, 1929년 5월에야 출옥하는데 그의 복역 기간은 무려 19개월이었다. 장진홍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대구 감옥에서 자결 순국한다. 엉뚱하게 범인으로 몰렸던 그에게 같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장 의사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수인번호가 ‘264’번이었고, 이후 그가 ‘이육사’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1930년에 그는 ‘대구 이육사(二六四)’라는 필명으로 정치평론을 발표했고, 이활 명의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
1931년 대구격문 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되었다 풀려난 그는 이듬해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했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이 무렵 약산 김원봉 등이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군사 간부학교를 설립한 것이었다.
의열단은 이미 1926년부터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점차 수용하기 시작해 1928년 이후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중심에 약산 김원봉이 있었다.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는 바로 ‘조선혁명당 조직에 필요한 전위투사의 양성’과 ‘개인폭력 중심노선에서 전투적 협동전선으로 전환’이라는 방침으로 설립되었다. 군사 간부학교 입교를 결정했을 때 이미 육사의 생각도 사회주의 노선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산과 공산주의 조직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던 육사는 공산주의에 대한 원론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약산이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있다면서 ‘사상이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33년 6개월의 과정을 수료하고 군사 간부학교를 졸업하던 날 밤, 여흥무대에 올린 육사의 창작 희곡 “지하실”의 줄거리와 졸업을 앞두고 가진 김원봉과의 면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육사의 희곡 <지하실>은 공장 지하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조선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제도가 실현’되어 토지가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완전한 노동자·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육사는 김원봉과의 면담에서 “도회지의 노동자층을 파고들어서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노동자를 의식적으로 지도 교양하고 학교에서 배운 중한 합작의 혁명공작을 실천에 옮겨 목적을 관철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국내로 잠입한 육사는 1934년 군사 간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면서 이들의 국내 투쟁 교두보 확보 계획은 무산된다. 육사뿐만 아니라 1, 2기생 스물한 명이 자수하거나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의 사상적 경향은 일경의 동향보고에도 드러나 있는 바와 같이 ‘민족 공산주의’(정치·경제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민족주의의 제약을 받는 경향)로 전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사의 ‘국내 투쟁’은 이를 계기로 더욱 현실적인 노선으로 선회한 듯하다. 석방 후 그는 다시 시사평론을 중심으로 한 왕성한 글쓰기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부터는 신석초 시인을 만나 교유하면서 잡지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고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시 “절정(絶頂)” 전문
1940년대는 일제가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전력화한 전시 동원기였다. 1943년, 일제는 의무 병역으로서 징병제를 시행하여 적령기에 이른 한국 청년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냈고, 이듬해에는 학병제를 실시하여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하였다.
1943년,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향한다. 시 ‘절정’에 드러난 절박한 현실 인식이 그를 움직인 듯하다. 그는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게 그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 마지막 여행이었다. 모친의 소상 때문에 일시 귀국했던 그는 그해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이육사, 베이징의 지하 감옥에서 지다]
극한적 시대 상황 속에서 그 초극(超克) 의지를 다루고 있는 ‘절정’의 시상이 잉태되었다는 원촌 인근의 왕모산 갈선대에 오르면 육사가 자랐던 원촌의 생가터와 이육사문학관이 아련하게 멀다. 깎아지른 수직 벼랑 아래로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일대의 들과 산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던 그의 유해를 고향 원촌에 이장해 온 건 1960년이고, 낙동강 변에 첫 시비가 세워진 게 1968년이다. ‘육사’의 이름을 딴 큰길이 낙동강 변에 조성되었고 육사 탄신 100주년인 2004년에는 육사문학관이 생가터 인근에 문을 열었다. 이후 해마다 안동 일원에서는 육사문학축전이 열린다.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에 맞서 반제(反帝) 구국의 길을 걸었던 육사의 삶은 열일곱 차례에 걸친 투옥과 구금으로 점철되었다. 일상적 탄압과 고문 속에서도 항일 투쟁의 전선을 떠나지 않았던 이 민족해방의 투사에게 4등급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다.
적극적 친일 활동을 통해 일제에 ‘보국(報國)’했던 시인 주요한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은 것과 견주어지는 대목이다. 주요한은 해방 후 민의원을 거쳐, 2공화국 시절엔 장관을 역임하는 등의 온갖 영화를 누렸다.
1979년 그가 죽었을 때 정부는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국민훈장, 그것도 1등급의 무궁화장을 수여한 것이다.
‘친일’은 기만의 언어다. 그것은 ‘반민족’, ‘반민중’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은폐하면서 지배적 기득권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포장한 왜곡의 어법인 까닭이다.
‘친일’이라는 어휘 속에는 피식민지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독립투사들 풍찬노숙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민족사 왜곡을 통해 민족을 저버린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차한 강변과 배반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조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여전히 극과 극을 달리는 해방 62년,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스스로 부끄럽다. 겨울로 형상화된 가혹한 시대 상황 앞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 ‘저항과 희망’을 노래했던 이 혁명가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가 피워낸 이 해방의 세월을 우리는 결코 ‘목놓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2007. 10. 15. 낮달
*이 기사는 이육사문학관 누리집(http://www.264.or.kr/), 김희곤의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지양사, 2000) 등의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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