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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황도(皇道) 유학’의 이명세, 그 손녀 이인호

by 낮달2018 2020.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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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유학자 이명세와 그 손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KBS> 이사장에 임명되었으나 조부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78)가 <한국방송(KBS)>의 이사장으로 내정되면서 그의 조부의 친일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공인이라면 웬만한 정보는 얼음같이 드러나는 세상이다. 지명도가 높은 문인이나 관료 출신이 아니면서도 그의 조부의 신상명세가 드러나게 된 데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아래 <사전>) 덕분이다.

 

<KBS> 이사장 이인호, 그의 조부 이명세

 

<사전>에 이명세(李明世/春山明世, 1893~1972)는 ‘유림(儒林)’ 분야에 이름을 올렸다. 이명세는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과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를 역임했다. 경학원과 조선유도연합회는 일제의 총독부 식민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교육기관(경학원)이거나 친일 유림조직이다. 비단 불교나 천주교·개신교만이 아니라 전통 종교윤리라 할 수 있는 유교 쪽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이다.

 

경학원은 고종 때(1887) 조선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이름을 바꾼 것이었지만 1894년 폐지되었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하였다. 경학원은 조선 총독의 감독 아래 있었고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돕는 것이 목적이었다.

▲ <친일인명사전> 앱에서 확인해 본 이명세 조항

사성(司成)은 조선 시대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종3품의 관리였는데 이명세는 1944년에 경학원 사성을 지냈다. 경학원은 철 따라 유교 제사를 지내고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강연은 주로 식민통치 정당화에 이용되었다.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이자 을사오적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은 1915년에 경학원 사성으로 조선인은 일본 정신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일선(日鮮)동화’를 주장하는 강연을 폈던 것들이 그 좋은 예였다.

 

황도 유학의 선봉,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

 

▲ 이명세

조선유도연합회는 1939년 조선총독부가 유도황민화(儒道皇民化)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만든, 일제강점기 마지막에 등장한 최대의 유림단체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관변단체였다. 이명세는 이 조직의 상임참사(常任參事) 겸 참사를 지내다가 1941년에 상임이사가 되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주로 시국 강연과 각종 강연 및 강습에 주력했다. 이는 유림과 일반 민중의 정신적 동요를 막는 동시에 일본 제국의 충실한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39년 충청북도 유도연합회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941년 강원도 유도연합회의 결성이 이루어지면서 전국 각도별 조직이 완료된 조선유도연합회는 일제 말기 ‘총동원체제’의 일익을 맡았다.

▲ 일제 강점기에 출정식을 치르고 있는 학도병들

조선유도연합회의 활동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이른바 ‘황도(皇道) 유학’이다. 일본 식민주의 관학자 고교형(高橋亨)에 의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황도 유학은 일본의 신국사상, 즉 천황이 정점에 있는 신도(神道)가 유교와 결합하여 이루어진, 충효일치(忠孝一致)의 일본화된 유교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유도연합회가 ‘황도 유학’을 내세운 것은 조선 민중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진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바치도록 하는 정신과 태도를 보이게 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명세는 안인식(安仁植, 1891~1969)과 일제 협력 유림의 대표적 존재로 이 ‘황도 유학’을 더욱 확대하고 포장하였다.

 

안인식은 일본의 국체와 유학을 결합한 충효일치의 일본화 된 유학에 다시 공자의 대동사상을 연결하여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합리화시켰다. 이명세는 태평양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일 뿐만 아니라 동양을 위한 숭고하고 의로운 전쟁으로 미화했다.

 

이들 친일 유림은 기존의 조선 유림에 조선조 500년 동안 이룩한 성리학을 버리고 일본화된 유교, 즉 ‘황도 유학’을 수용하여 황국신민으로 천황과 일본 제국을 위해 헌신하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이들 친일부역자 탓에 유교과 유학은 위축되었다. 황도 유학이 한국 유학 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이명세는 1942년 5월 발간된 기관지 <유도(儒道)> 창간호에 ‘동아공영권과 유교의 역할’(東亞共榮圈と儒敎の役割)을 게재해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며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선동했다. 또 ‘신가파함락일지희(新嘉坡陷落日志喜)’라는 한시를 통해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며 대동아공영권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한시로 ‘징병제실시’ 축하

 

같은 해 이명세는 경학원 유학연구소의 강사를 맡았고, 6월에는 조선유도연합회 주최의 지방 순회 강연 연사로 경상남도와 강원도에 파견되어 국체 명징과 징병제실시 취지 등에 대해 강연했다. 10월에는 함경남도 지역의 군 총회 및 읍면 유도회 지부 결성식에 참석해 ‘시국하 유림의 책무’(時局下儒林の責務)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명세의 친일부역의 정점은 <유도> 1942년 10월호에 실은 한시 ‘축징병제실시’다. 이명세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시행하게 된 결정을 한시로 축하했다. 같은 해에 조선을 떠나는 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정무 총감 오노(大野綠一郞)의 치적을 찬양하는 한시도 썼다.

 

在家倍覺生男重(집안에선 아들 난 것 중한 일임을 더욱 알고)
爲國當思死敵輕(나라 위해 죽는 것은 가벼이 여겨야 하리)
無憾吾仍有願(우리들은 후회 없나니)
勘戰亂返昇平(하루빨리 전란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 되길 바랄 뿐이라네)

 

한시는 사대부가 당대의 삶과 사유를 절제된 언어로 담아내는 시 형식이다. 더구나 선비가 쓴 것이라면 성리학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드러내는 것으로 엄격한 절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유림의 일원으로서 이명세가 조선의 젊은이를 사지로 모는 징병제실시를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망발인 이유다.

 

경술년에 나라가 망하자 자진하면서 매천 황현(1856~1910)이 남긴 네 수의 절명시(絶命詩)시는 그런 선비의 고아한 정신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 주는 명편이다. 매천은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鳥獸哀鳴海岳嚬(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沈淪(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이명세는 ‘글 아는 사람’의 노릇을 포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종주국의 하수인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씨 성(姓)도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여 ‘춘산(春山)’으로 창씨했다. 일신의 안락과 일문(一門)의 영화를 얻는 대신 그는 결국 ‘친일부역자’가 되었다.

 

1943년에는 경기도와 전라북도 유도연합회가 주최한 강연회의 강사로 활동했다. 그가 한 강연의 주요 내용은 결전하의 유림으로서 국체 관념 명징, 황도 유학 진흥, 시국 인식 철저를 통해 황국신민의 자질을 연성하고 전력의 증강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1944년에는 경학원 사성으로 활동했고 <유도> 4·11월호에 일본의 전승을 기원하며 상무 정신을 고취하는 ‘정기가의 해설’(正氣歌の解說)을 실었다. 곧 일제의 패망과 해방이 왔지만, 이 땅의 역사는 그들을 단죄하지 못했다. 그것은 일신과 일문의 안락과 영화가 유지 존속된다는 뜻이다.

 

해방 직후에 그는 조선사회교육협회의 부이사장으로, 성균관대학교 강사와 학교 법인의 상임이사를 맡았다. 이후 그는 두 차례나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고, 대한유도회 총본부 부위원장을 지냈다. 독립 이후에도 유림은 친일 유림의 치욕을 청산하지 못했던가. 이명세는 이후 몇몇 사학법인의 이사를 거쳐 1960년에는 성균관장에 올랐고 1972년에 사망했다.

 

친일부역, 부와 안락의 연원

 

그예 대통령은 지난 2일 이명세의 손녀인 이인호 전 교수를 한국방송(KBS)의 새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야권과 언론 등에서 터져 나온 조부의 친일논란에 대해 이인호는 조부의 친일이 ‘서양의 사조에 맞서 유학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한 모양이다.

 

그의 변명이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는가는 밝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일 터이다. 그러나 조부의 친일 행적이 왜 손녀의 공직 임명에 걸림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 논란을 ‘연좌의 문제’로 잇는 것은 그리 온당치 않아 보인다.

 

이명세가 동포를 대상으로 한 일제의 징병제실시를 찬양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로 그의 후손들은 상류계급으로서 부와 영화를 이어왔다. 그가 찬양한 징병제에 떠밀려 이국의 전쟁터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불행과 그들의 가문에 드리운 비극은 그들 젊은이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해방 조국에서 이명세의 가문이 누려온 부와 안락의 연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2014. 9. 4. 낮달

 


대한민국 여성 대사 1호로 널리 알려진 이인호 KBS 전 이사장은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서울대 교수 시절에만 해도 진보적 성향을 보이던 그는 한때 민족문제연구소 자문위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후, 2006년 뉴라이트계열 단체 교과서포럼에 참여하면서 변신했다.

 

2007년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제정해 기념하자는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의 공동 준비위원장을 지낸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범 김구에 대해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역사학자로서의 균형감각을 상실한 듯 그의 발언과 세계관은 퇴행을 거듭했다.

 

그는 2013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초청한 국가 원로 오찬에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현대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역사 왜곡’과 ‘국가에 대한 도전행위’이고 ‘역사 교란 목적의 행위’라고 극언했다.

 

언론인 문창극이 일본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망언으로 국무총리 후보로 낙마한 것과 관련하여 종편인 <TV조선>에 출연한 이인호는 “지금 사회 분위기는 한탄스럽고 경위 자체가 오싹하다”며 “문 후보자가 낙마해야 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 가운데 수구적 가치관을 유감없이 드러난 예는 2014년 9월 전경련 주최 ‘우리 역사 바로 보기-진짜 대한민국을 말하다’ 강연에서다. 그는 친일파 청산에 대해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이었다며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약화시켜야 되는데, 친일파 청산이 내세우기 가장 좋은 명분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제 여든을 넘긴 고령으로 더는 사회적 공직을 맡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역사학자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눈을 감은 그가 보수의 원로로 기려지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다. 보수의 부재로 수구가 호가호위하는 이 가치 전도의 시대, 지식인 사회의 슬픈 초상화다.


2020.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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