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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장엄하여라, ‘우국(憂國)의 황혼’이여

by 낮달2018 2019.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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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땅과 인물 ③]자정(自靖) 순국(殉國)의 넋들과 향산 이만도

▲ 향산고택. 안동시 안막동에 있다.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 있다가 안동댐 수몰로 1976년 여기로 옮겨 왔다.

20년도 전의, 오래된 얘기다. 어느 여학교의 역사 시간이었다. 교사는 문득 ‘망국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에게 물었겠다. 그것도 매우 근엄하게. 얘들아, 오늘이 무슨 날이지?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일제히 입을 모아 소리쳤다. 마이클 잭슨 생일요!

 

경술국치와 ‘마이클 잭슨의 생일’ 사이

 

▲매천 황현. ⓒ 문화재청

1910년 8월 29일은 이른바 ‘경술국치’일이다. 그날, ‘한국 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넘겨줄 것을 규정한 합병조약에 따라 27대 519년 만에 조선 왕조는 그 명운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는 때로 화석이 된다. 아이들에겐 그날이 역사 교과서 속에서 만난 봉건 왕조가 사라진 날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팝 싱어가 태어난 날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화석이 되어 버린 역사 앞에서 아이들은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지?

 

이날 이후, 망국의 치욕을 감당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적지 않다. 죽음은 흔히 치열한 절망쯤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목숨과 자기표현을 맞바꾼 장엄한 선택으로 이해하는 게 마땅해 보인다. 항거든 분노든 그것은 영혼을 위해 육체를 버리는 일인 까닭이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

 

9월 10일, 전남 구례에서 망국의 소식을 접한 한 유생이 유서와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아편 덩이를 삼켜 목숨을 끊었다. 이 선비가 바로 한말의 대시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마감하기 전에 성찰한 것은 지식인의 삶이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추등엄권회천고 秋燈俺券懷千古)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난작인간식자인 難作人間識字人)

 

조선국이, 아니 대한제국이 왕의 나라라면 마땅히 임금과 그 일가가 망국의 책임과 죄업을 져야 할 것이로되, 이씨 성의 왕족 중에 스스로 책임을 다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선비 등 예순여섯 분이 스스로 왕토에 사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다했다.

 

자정, 존재의 전부를 버리는 고독한 선택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실존적 결단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특정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분명한 결과를 위해 존재의 전부를 버리는 고독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정(自靖: 자결)이란 그 방식이 어떠하든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독을 삼키든 곡기를 끊든 어떤 방법도 더 가볍거나 수월하지 않다. 을사년 이래 기미년(1919)까지 안동에서는 모두 열 분의 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중 여섯 분은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 김순흠 순국 기념비. 예천군 예천읍 남산공원에 있다.

단식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만찮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짧은 시간 안에 목숨이 끊어지는 다른 방법과 분명히 구분된다. 한편 그것은 단식자의 목숨이 사위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족·지인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따라서 곡기를 끊어 순절하는 것은 본인의 확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의 순종과 협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다.

 

김순흠과 권용하 선생

 

안동에서의 자정 순국은 풍산인 김순흠(金舜欽, 1840~1907)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풍산에서 나서 예천 감천에서 성장한 이다. 그는 일찍이 이강년 의진(義陣)에서 활동하였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5적의 매국을 꾸짖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 배포하였다.

 

을사늑약 반대와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진력하였던 그는 일본 재무서가 세금을 거두어 일본군에 납부하는 걸 본 뒤, 의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곡기를 끊은 지 23일 만인 1908년 9월 28일, 그는 향년 69세로 순절했다. 그가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상식(上食)은 하지 마라. 왜놈 천하에서 자란 곡식을 먹을 수 없으니 국권을 회복하는 날 올리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자, 안동 땅에서 가장 먼저 순국한 이는 와룡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권용하(權龍河 1847~1910)다. 10월 9일, 종형으로부터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그는 분을 참지 못하여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자결하였다.

 

나라를 잃는다는 건 무명의 민초들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권리보단 의무가 더 무거웠던 헐벗은 백성들에게도 망국은 통한이고 슬픔이었던가. 권용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인이었다. 망국의 치욕과 분노는 그가 견뎌야 했던 ‘소리 없는 침묵의 세상’보다 더 크고 무거웠던 모양이다.

 

뒷날 심훈은 다가올 ‘광복의 기쁨’을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시 ‘그날이 오면’)라고 노래하였다. 그러나 권용하는 기쁨의 노래가 아니라, 분노와 슬픔에 몸을 내던져 죽은 것이다. 그의 의기 앞에 어찌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향산고택의 사랑채. 기암고택(起岩古宅) 등 현판이 여럿 붙어 있다.

향산 이만도와 이중언

 

그 이튿날(10월 10일)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가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고, 20일에는 을미사변 이후 의병장 김도현과 함께 싸웠던 예안 사람 이중언(李中彦, 1850~1910)이 역시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이중언은 향산 이만도의 삼종질로 임오군란 이후 봉화에 은거하고 있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도현(1852~1914)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조약의 파기와 오적을 참형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향산고택의 담장. 빈 골목길과 낡은 옛집이 쓸쓸했다.

그는 단식 도중 일경이 찾아와 음식을 먹도록 권할 것을 가족들에게 협박하자, “저놈을 내쫓지 않으면 내가 찔러 죽이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게 한 뒤, 반듯하게 앉아서 죽었다.

 

유도발·유신영 부자, 이현섭, 김택진, 이명우 부부까지

 

하회 사람 유도발(柳道發, 1832~1910)은 의성에서 농사를 짓다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집에 돌아왔다. 사당에 절하고 벗들에게 이별을 알린 그는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10월 26일 순절하였다. “신주를 묻고 광복을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곡기를 끊은 지 17일 만이었다.

 

유신영(柳臣榮 1853~1919)은 유도발의 큰아들이다. 을사늑약 이듬해 봄에 안동에서 의병에 참가하였고 1910년에는 부친의 순절을 지켜보아야 했다. 1919년 3월 3일, 고종 인산일에 매국노들의 간계로 임금이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문을 지어 보낸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부친이 순절한 지 9년 만이었으니, 그 충절의 의기는 대를 이은 셈이다.

 

유도발이 숨지던 날, 도산에 은거해 살던 연안인 이현섭(李鉉燮, 1844~1910)이 망국의 통분을 못 이겨 음식을 먹지 못하다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는 “내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될까 보냐”는 시를 남기고,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해 의관을 갖추고 정좌하여 순절하였다.

 

11월 28일에는 문경·제천에서 활약한 이강년 의진에 가담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던 풍산의 김택진(金澤鎭, 1874~1910)이 “천만금이 생겨도 친일행위를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에 들어간 지 21일 만에 순국하였다. 향년 36세. 대부분의 순국 지사들이 예순을 넘겼으나 그는 가장 젊은 순국자였다.

 

그로부터 9년 후, 예안 사람 이명우(李命宇)는 계룡산에 있다가 고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독약을 먹고 순절하였는데, 그의 아내도 그가 남긴 약을 먹고 뒤를 따랐다. 출생 연도도 전하지 않는 이들 내외는 풍산의 김택진과 함께 서훈도 받지 못한 듯하다. 독립기념관의 한국 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에도 이명우와 김택진의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2010년에 이명우 선생은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관련 글 : 아름다운 부부, 순국의 길로 함께 갔네]

▲ 향산 이 선생 순국유허비. 청구동(예안면 인계리) 길가 향산공원에 있다 .

안동에서 자정 순국한 지사들 가운데 가장 기림을 받는 이가 향산 이만도 선생이다. 본관은 진성. 퇴계의 11대손으로 그 자신을 포함,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명문의 후예다. 1866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향산은 1882년 통정대부(정3품)에 올라 공조 참의가 된 후 사직하였다.

▲ 향산 순국 유허비. 향산이 순국한 장소에 세워졌다. 정인보의 글과 김구의 글씨.

고향에 돌아온 그는 의병 항쟁의 효시였던 갑오의병 논의에 참여하였고 뒤이은 을미의병(1895) 때는 선성(宣城 : 예안)의진의 대장으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향산은 다섯 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하고 일월산으로 물러나 근신했다.

 

그는 ‘조선의 역사가 생산해 낸 인물’로 ‘주자학 근본주의자’(안동대 윤천근 교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은 군왕에 대한 충절의식과 가문에 대한 자존의식, 그리고 유학에 대한 순결한 태도였다.

 

향산은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으로 이해했고, “을사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신은 병상에 누워 있어서 돌계단에 머리를 부수며 간적(奸賊)과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다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라고 고백한 바 있었다.

 

1907년에는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한 뒤, 일본군이 불을 질러 퇴계 종가가 불타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퇴계 종가의 화재는 군왕에 대한 신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자신을 죄인이라 칭했던 향산에게는 가문에 대한 자존마저 무너뜨린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술국치를 당하매, 그는 그예 자진을 결심한다. 을사년 이후 실낱같던 희망은 합병조약으로 스러져 버렸고, 막힌 출구 앞에서 향산은 고통스레 고백했다.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원수의 백성 되는 것을 기꺼워하고 무지몽매하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뒤 향산이 단식 끝에 운명할 때까지 수행자들이 기록한 일기.

단식을 시작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담하게 자기 죽음을 준비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은 ‘원수의 백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가 신하로서, 가문의 후예로서, 유생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향산이 ‘청구동’(예안면)에서 단식하며 순국에 이른 과정을 기록한 <청구일기(靑邱日記)>에 따르면 그는 단식 기간 중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대부분 두문(杜門)하고 단식했던 여느 사람과 달리 그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단식을 계속한 독특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곡기를 멀리하면서도 그는 친구들과 인생을 논했고,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의했으며, 자신의 사후 장사 문제까지 유언했다. 어린 손자들에게는 손을 잡고 유학 원리를 강의하는 등 마지막까지 유학자의 소임을 다했다.

 

단식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인 저항이었지만, 일제의 식민통치 부당성을 환기하고 항일 투쟁에 대한 정당성을 드높이면서 결연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영향의 파급을 두려워한 일제는 단식을 그치게 하려고 회유와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순절 후에는 부고도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의 단식을 안 일경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떠 넣으려 하자 혼수상태인 줄 알았던 향산이 벌떡 일어나 “나는 내 명(命)으로 죽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느냐?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하면 즉시 총을 쏘아 죽여라!”라고 소리쳤다. 그는 또 “어떤 놈이 감히 나를 회유하며, 어떤 놈이 감히 나를 공갈하고 협박하려 드느냐?”고 호령했다.

▲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이 마을에서 모두 25명의 독립지사가 났다 .

10월 10일, 그는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진 어른답게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단식 24일째였다. 향년 69세. 그의 의기와 뜻은 자식들을 통하여 이어졌다. 아들, 며느리, 손자 등 3대에 걸쳐 모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향산의 아들 중업은 1차 대전 후에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 장서 운동)를 이끌었다. 손자 동흠과 종흠은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해 의열단원인 나석주와 연계하여 벌인 이른바 ‘2차 유림단 의거’의 주역으로서 조부의 유지를 이었다.

 

특히 향산의 며느리 김락(金洛, 1863~1929)은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민족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라는 헌사를 바친 여장부다.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5)의 누이인 김락은 시부와 남편, 아들의 독립투쟁을 뒷바라지했고, 3·1 만세운동 때는 고문으로 두 눈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향산이 태어난 도산면 토계리 하계(下溪)마을은 이육사가 태어난 원천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당시 150가구였던 이 마을은 무려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10여 호만이 남아 있는 동네 입구에 몇 해 전에 세운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가 쓸쓸하게 서 있다.

▲담 너머로 바라본 향산고택의 사랑채. 퇴계 선생 종택 복원추진위원회의 현판이 걸려 있다.

향산의 옛집은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 가는 길, 퇴계로의 안막동 언덕바지에 호젓하게 서 있다. 원래 도산면 토계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1976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사람들은 향산을 잘 모른다. 당연히 그의 고택도 잘 모른다.

 

낡은 옛집의 일각대문엔 굵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석양에 ‘향산구려(響山舊廬)’ 현판만이 외로웠다. 한길로 나오자 언덕 아래 시가지의 하늘에 황혼이 붉었다. 그 붉은 놀 속에 문득 얼굴조차 남지 않은 우국(憂國)의 죽음들이 하나씩 차례로 명멸하는 듯했다. 그것은 고통스럽게 맞이한 20세기 벽두에 우리가 영결(永訣)한 19세기의 마지막 장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07. 8. 30. 낮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아래 책과 논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김희곤,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 안동시, 2001

윤천근, 향산 이만도 선생의 절의 정신, 안동대 퇴계학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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