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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나라 없는 몸… 무덤은 남겨 무엇하겠느냐”

by 낮달2018 2019.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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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①] 내앞 마을,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

▲ 백운정에서 바라본 내앞 마을 . 아래쪽의 내가 반변천이다 .

지명은 마을의 생성과 역사, 지리적 특성 따위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지역의 공동체적 삶을 어우르고 있는 정서적 지리적 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정비된 1914년 이후 사람들의 마을 이름에서 삶의 향기와 정겨움은 사라져 버렸다.

 

이 식민 관리들은 고유어로 이루어진 마을이나 지명을 ‘반듯하게’ 한자로 바꾸었다. 애당초 한자 없이는 표기 자체가 어려운 문자를 쓰던 일제로서는 우리말 지명의 의미 따위를 고려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주의 ‘한밭’이 반듯하게 ‘대전(大田)’이 된 것처럼 임하의 내앞마을은 ‘천전리(川前里)’가 됐다.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우리 근대사의 곡절 많은 소용돌이를 겪어온 이 마을 앞은 임하댐을 거친 내가 발밑을 적시며 흐른다 하여 ‘내앞’ 마을이다.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청송을 거쳐 안동 남서쪽을 가르며 흐르는 이 하천이 바로 반변천(半邊川)이다.

 

내앞 마을은 청계(靑溪) 김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 김씨 내앞 종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풍수에서 이르는 ‘완사명월(浣紗明月, 달빛 아래 비단을 빨아 널어놓은 형국)의 마을’이다. 이 집은,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 불린다.

 

이 종택은 당호(堂號)를 붙이자면 청계의 장자 김극일의 아호를 따 ‘약봉(藥峯) 종택’이 돼야 하지만 내앞 사람들은 따로 당호를 붙이지 않고 그냥 ‘큰종가’로 부른다. 보통 명사를 고유 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학자들은 이를 ‘소속된 씨족 집단 구성원’의 확고한 정체성과 종족 단합의 상징물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이 피(혈연)에 기대는 동질성은 다분히 전근대의 냄새를 풍기지만, 한편으로는 이 마을에서 타오른 항일 운동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의병항쟁을 비롯, 협동학교 개교(1907), 문중 단위의 집단 망명(1910~1911) 등 이 마을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흘린 피와 이바지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앞 문중에서 모두 36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았는데, 이는 어지간한 시군 단위의 포상자 수를 넘는 숫자다. 대한제국 멸망 후 조선 왕조의 지배계급이었던 권문세가의 선택은 확연히 갈렸다. 내앞 문중은 식민 통치에 협조해 기득권을 보전하는 길이 아니라 ‘의(義)’의 실천으로서 ‘항일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 내앞 종택. 학봉 김성일이 북경에서 가져온 도본으로 지은 집으로 구조가 특이하다.
▲ 내앞 종택. 이 큰종가는 소속된 씨족 집단 구성원의 정체성과 단합의 상징물이다 .

문중 차원으로 일제에 저항한 마을도 안동에는 여럿이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도곡마을, 퇴계의 후손으로 단식 끝에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진성 이씨 예안 하계마을과 학봉 김성일의 소종택을 이어온 금계마을을 포함한 의성 김씨 내앞마을이 그것이다.

 

내앞의 항일운동은 구국계몽 운동으로 시작된다. 1907년, 마을에 영남지역 최초의 3년제 중등 교육기관 ‘협동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협동학교는 비록 단명했지만, 이 운동의 주역들이 내앞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점에서 무척 뜻깊다.

 

유인식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한 주역이 일송(一松) 김동삼이다. 그는 월송(月松) 김형식과 함께 내앞마을의 항일 투쟁을 대표하는 이다. 협동학교는 초기에 문중 원로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4)이 태도를 바꿔 적극적 후원자가 되면서 자리를 잡는다.

 

당시 이미 예순다섯의 노인이었던 백하의 변모는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건 의병운동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통 유림이 혁신 유림으로 전환하는 극적 상황을 웅변으로 보여 준다.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움직인 것은 <대한협회보>였다. 그는 ‘독대한협회서유감’에서 자신의 각성을 눈물로 고백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 ‘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 중에서

▲ 백하구려 ( 白下舊廬 ) '백하의 옛집'이라는 뜻이다. 소파가 놓인 왼쪽 마루방에서 협동학교가 열렸다 한다 .
▲ 백하구려 현판 .금상기 ( 琴相基 )가 썼다 .

그에게 다가온 근대에 대한 깨달음은 집안 조카뻘인 일송의 협동학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다. 사람 천 석, 글 천 석, 밥 천 석을 했다는 이 도사댁(都事宅: 금부도사)에 깃든 협동학교는 안동지방의 애국 계몽 운동의 기점이면서 경술년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생부와 스승으로부터 의절과 파문을 감수해야 했던 설립자 동산(東山) 유인식을 비롯,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등이 그들이다. 협동학교는 일제에 의한 탄압은 물론, 지역 유림의 배척을 받았고, 예천지역 의병의 습격으로 세 사람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백하는 나라를 잃은 경술년 겨울에 66세의 노구로 만삭의 손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증손자들이 일본 신민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에 감명받은 내앞 사람 22가구 50여 명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한다.

 

백하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맏이는 석주 이상룡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이가 바로 안동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金洛) 여사이다.

 

그이는 의병장 시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시숙부와 남편을 모셨고, 나라가 망하자 단식 끝에 순국한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켰고, 만주로 망명하는 친정 오라버니(김대락)와 조카들, 그리고 큰형부 이상룡과 언니를 눈물로 이별해야 했다. 3·1운동 때에는 그 자신이 예안 시위에 참여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기도 했다.

 

그 자신(애족장)을 포함, 시아버지 이만도(독립장), 남편 이중업(애족장), 아들 이동흠(애족장) 등 3대에 걸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친가를 포함하면 훈장과 표창 등 위훈을 추서 받은 독립지사가 무려 26명에 이른다고 한다. 역사학자 안동대 김희곤 교수는 그에게 ‘민족의 딸이요, 아내이며, 어머니’라는 헌사를 바쳤다.

 

내앞 문중의 집단 망명은 일송의 계획에 따라 백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내앞 문중과 함께 집단 망명을 감행한 집안은 내앞의 의성 김씨와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였는데 이들과 혼맥(婚脈)으로 이어진 영덕·울진·영양 등의 몇몇 문중도 이 길에 동참했다.

 

이들은 1910년 12월 말부터 안동을 떠나 추풍령까지는 걸어서, 신의주까지는 기차로 갔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망명길이었다. 눈보라 날리는 엄동설한, 크고 작은 봇짐을 이고 진 수백의 남녀 노유의 행렬은 그것만으로도 서러운 망국의 한이었으리라.

▲ 협동학교 3 회 졸업생 사진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시물을 찍은 사진이다 .
▲ 남부여대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시물을 찍은 사진이다 .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짐을 부린 것은 이듬해 4월. 이후 이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를 거듭했고 풍토병은 물론 마적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삶은 직간접적으로 조국의 독립과 맞닿아 있었다. 일송과 석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경학사(耕學社)나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된 신흥강습소의 설립 등은 현지에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를 개척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같은 군사 조직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일송 김동삼은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진보적 중도 민족주의자였다. 당시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나뉘었던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우선으로 두고, 좌우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념에 유연하고 개방적이었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는데, 당시 부의장은 도산 안창호였다. 그는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는 회의마다 거의 의장을 맡다시피 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선임된 석주가 일송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항일 무장투쟁의 터전을 버려둘 수 없다고 이를 고사했던 이 ‘남만의 맹호’는 1931년 일제의 만주 침공 직후에 항일 공작을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경에 체포된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을 선고받은 그는 1937년 4월 13일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향년 59세.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화장한 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 변절한 벗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원칙적 민족주의자 만해가 일생에 눈물을 흘린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일송의 인격을 넉넉하게 짐작게 한다.

▲ 일송 김동삼의 생가 .동편에 한 칸이 추가되고 내부도 개축되어 원래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
▲ 일송 어록비 . 1999 년 안동 보조댐 광장에 세워졌다 .

월송 김형식(1877∼1950)은 백하 김대락의 아들이다. 월송은 1914년 망명지에서 부친 백하를 잃었다. 향년 70세. 월송은 1919년 결성된 한족회 학무부장으로 민족교육에 힘썼고, 1920년 경신참변(간도 참변: 1920년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간도 지방의 한국인 대량 학살 사건)을 수습했다.

 

1927년 월송은 북만주 하르빈 동북 취원창(지금의 거원진)으로 이주했다. 항일 독립운동단체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한 월송을 중심으로 내앞 문중과 고성 이씨 등은 취원창에 항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협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월송은 취원창에 민족학교를 열어 교장을 맡았다. 1944년 월송은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북만지부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는 이미 이전부터 독립동맹과 관계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듯하다. 일송이 중도 민족주의자였다면, 월송은 중도 좌파였다. 월송에 관한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해방 후, 조선의용군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의 초청을 받아 평양으로 간 월송은 혁명자 후원회장을 맡았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금강산 장안사 국영 양로원에서 휴양 중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 몸을 던졌다. 향년 74세.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이 산에 응당 신선이 있을 터인데(차산응유선;此山應有仙)

육안으로는 분간이 어렵구나.(육안불분간;肉眼不分看)

백발노인이 구름 사이로 치솟으니(백발용운간;白髮聳雲間)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하겠구나.(인위아신선;人謂我神仙)

 

역사학자 조동걸 교수는 내앞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인상에 대해, 김형식은 ‘군자 같은 인격자’로, 김동삼은 ‘비범한 혁명가’로 각각 표현했다. 이는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의 의지를 거두지 않았던 일송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스스로 삶을 거둔 월송의 생애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라에 바친 삶’이란 표현은 진부하다. 그러나 일송과 월송의 생애가 환기하는 것은 그런 진부한 표현의 영역을 넘는다. 이들의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삶은 일제의 감옥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각 마감되었다. 그들의 미완의 삶은 해방 반세기가 넘어서도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현실과 아프게 겹친다.

 

내앞을 떠났던 백하와 일송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의 토지를 처분해야 했다. 일제가 만든 ‘천전동 토지조사부’는 1919년까지 백하가 매각한 토지 규모는 6.6정보보다 많았고, 일송 역시 1정보 이상의 토지를 매각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내앞에 남은 문중 사람들 역시 만주에 돈과 인력을 끊임없이 보내야 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대의에 문중 모든 것을 바쳤지만 후손들의 삶이 순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 땅의 근대사, 그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남긴 슬픈 유산이다.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이 성리학의 고장이 골수까지 밴 보수의 구각을 깨고 혁신 유림으로 거듭나는 저간의 과정은 흥미롭다. 앞서 경술년에 나라가 그 명운을 다했을 때, “500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죽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냐”며 이곳에서 아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는 벼슬을 살지 않은 베옷의 선비, 매천(梅泉) 황현이었다.

 

죽음으로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이 고장 안동에는 무려 열 분이다(전국 66명). 성리학의 관념 속에 침잠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든 망명지에서의 풍찬노숙이든 어렵고 힘든, 실존적 선택일 터이다.

 

그러나 이 고장 안동은 전국 시·군(평균 30명) 가운데 가장 많은 3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낳았다. 내앞 마을을 떠나면서, 새삼 옷깃을 여미는 것은 이 명당 길지의 마을이 한갓진 반촌(班村)이 아니라 현대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견뎌 온 이 땅의 역사 자체라는 깨우침 때문이다.

▲ 지난 8 월 10 일 문을 연 안동독립운동기념관 . 시군 단위로 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운 것은 처음이다 .
▲ 내앞 마을 입구 . 오른쪽 옛 천전초등학교 자리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의 삶과 투쟁

일송 김동삼(1878~1937)

▲ 김동삼 선생 (1878~1937)

본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一松). 비타협적 무장투쟁 노선을 굳건히 지켜 ‘남만의 맹호’라 불린 독립운동가. 이념을 초월한 통합운동을 펴 출신 지역과 사상과 관계없이 모두의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다.

 

-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 출생

- 1907년 유인식·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개화 교육에 힘씀.

- 1911년 만주로 건너가 경학사를 조직하고 석주 이상룡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함.

- 1918년 서일·김좌진 등과 함께 39인이 민족 대표로서 연서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함.

- 1922년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 단체인 통군부를 조직. 교육부장 역임. 통의부(統義府) 위원장.

-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음.

-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김형식(金衡植) (1877∼1950)

 

▲ 월송 김형식(1877~1950)

내앞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월송(月松).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금강산 장안사 국영 양로원에서 휴양 중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 몸을 던졌다.

 

- 1877년 경북 안동 내앞에서 출생.

- 1907년 협동학교 교사

-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

- 1910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 경학사, 신흥학교, 부민회 등 활동

- 1919년 한족회 학무부장

-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에 한족회 대표로 참가

- 1924년 전만통일회 중앙위원 피선되었으나 신병으로 취임하지 못함.

- 1925년 정의부 민사위원장(내무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고사.

-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 취원창으로 이주 민족학교 교장.

- 1944년 연안 독립동맹 북만지부 책임자로 위촉.

- 1948년 남북연석회의 상임의장.

- 1950년 금강산에서 자결.

 

 

2007. 8.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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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①] 내앞 마을,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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