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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왜 이 뻔한 노부부 이야기에 젊은 관객 몰릴까

by 낮달2018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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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큐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화 포스터  ⓒ  아거스 필름 외

지지난 토요일, 아내와 함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러 갔다. 오후 첫 상영이어서인가, 복합상영관 앞은 한산했다. 상영관 앞에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 내외 외에 40대 부부 두어 쌍, 그리고 20대 남녀 몇 명이었다. 나는 그 젊은 연인들을 건너다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2주 후, 뉴스는 이 영화가 3백만의 관객을 불러 모으면서 역대 다큐멘터리 흥행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영화의 돌풍을 전하면서 매체들은 저마다 그 원인을 분석하기 바쁘다. 하긴 그렇다. 공중파에서도 몇 차례 방송되었다는 이 노부부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게 없다. 극적 반전은커녕 중심 서사조차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다. ‘안됐다’거나 ‘슬프다’는 입소문만으로 백만 단위의 관객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런 이야기라면 영화관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 수두룩하지 않은가 말이다.

 

76년, 노부부의 사랑과 교감의 삶

 

다큐멘터리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익숙한 다큐의 방식, <인간극장>과 같은 형식의 내레이션이 없다. 90대 할아버지와 80대 할머니가 펼쳐 보이는 노년의 일상을 카메라는 무심한 듯 뒤따른다. 70년이 넘도록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이 ‘오래된 부부’를 중심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가 흐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물 흐르듯 흐르는 내외의 일상이 그들이 함께 살아온 70년 세월의 결을 짐작게 해 준다. 할아버지는 마당의 낙엽을 쓸다가, 눈을 치우다가 아내에게 낙엽과 눈 세례를 퍼붓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걸어오는 장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이들이 이날까지 지녀온 천진한 품성이며, 동시에 두 사람이 76년을 함께 살며 터득한 교감의 방식이기도 하다.

 

열네 살 소녀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스물셋의 청년은 소녀가 열일곱으로 자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소녀가 행여 다칠까 봐 청년은 소녀를 쓰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아홉 살 차이의 부부는 76년 세월을 함께 하면서 자식 열둘을 낳았는데 그중 여섯은 아이 적에 먼저 보내야 했다.

 

카메라는 이들 노부부의 일상을 좇고 있지만 기실 이 영화는 삶의 황혼을 관통하고 있는 이들 만년(晩年)을 조명한다. 젊은 날 못지않은 애틋한 사랑과 유대를 자랑하지만, 그들은 각각 아흔과 백 살을 앞둔 상노인이다. 이들 앞에 남은 것은 애틋한 삶에 대한 미련만큼이나 확실한 이별, 죽음뿐이다.

▲  고운 커플 한복을 입고 양주분은 시장 나들이에 나섰다 .  그러나 이미 할아버지는 쇠약해졌다 .

화면에 흐르는 사계의 순환 속에 내외는 그 이별을 향해 한 발 두 발 나아간다. 자녀들이 생일 선물로 마련해 주었다는 커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부부의 모습은 화사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고 안쓰럽다. 기력이 떨어져 힘겨워하는 남편을 보살펴야 하는 두 사람만의 외로운 외출, 시장 나들이에서 할머니는 여섯 아이들의 내복을 산다.

 

고단한 삶,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이들

 

다섯은 여자애 걸로, 하나는 사내아이 걸로 내복을 사서 돌아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손주들 입성을 챙기는 여느 조부모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손녀 손자들의 것이 아니라 세 살,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먼저 보낸 자식들에게 보내는 어버이의 선물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한다.

 

“당신이 먼저 가면 이걸 보내줄게요. 당신이 저승 가면 아이들이 아버지 왔다고 찾아올 거 아니우? 그때 이걸 애들에게 전해주우.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가든…….”

 

고운 커플 한복에다 남다른 금슬을 자랑하지만, 이들 젊은 날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신산했던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부친의 임종 앞에 오열하는 맏이의 절규가 아니더라도, 데릴사위로 들어갔던 가난한 청년이 처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을, ‘내복도 못 사 입힌 아이들’을 가슴에 묻었던 세월을 어찌 다 그릴 수 있으랴.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의 기력이 드러나게 떨어지면서 영화는 고비를 넘는다. 육신에 깃들기 시작한 병마는 언제나 유쾌하고 친절하고 유머러스했던 할아버지를 무기력한 노인으로 되돌려 놓는다. 노인은 말수가 줄어들고 때론 힘겹게 짜증을 내고, 시나브로 여위어 가면서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때맞추어 내외의 한복의 빛깔도 차차 바래어가고, 집 마당에 내리는 햇살과 빗발도 쓸쓸해진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별은 특별하지는 않다. 할아버지의 기력이 날마다 달라지면서 할머니는 하나씩 이별을 준비한다. 그 담담하면서도 고적한 이별의 의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숱하게 만나는 그런 이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 다가와 관객에게 현실과 드라마의 경계를 명확히 환기한다.

 

관객에 따라서 죽음이 드러내는 의미는 다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짓는 까닭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연로한 어버이를 생각하고 누구는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 애잔해서 눈물을 흘린다. 또 어떤 이들은 노부부의 모습에서 서글픈 자신들의 뒷날을 그리기도 할 터이다.

▲ 쇠약해진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  내외의 사랑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이 다큐 영화가 300만을 가파르게 돌파하는 데는 뜻밖에 20~30대 관객의 힘이 컸다고 한다. 고리타분하게 느낄 수도 있는 이 노부부의 이야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랑도 이별도 ‘쿨하게’ 다루는 이들 청년 세대가 이 결말이 뻔한 러브스토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뭘까.

 

수식도 포장도 걷어낸 일상의 숨결 같은 사랑

 

그것이 ‘사랑의 환상을 가진 20대’와 노부부가 보여주는 사랑과 이별이 조화롭게 만난 결과이든,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감동적 로맨스이기’ 때문이든 답은 하나로 모인다. 두 노인은 인간의 오랜 주제인 사랑을 일체의 극적 수식과 포장을 걷어내고 살아 있는 일상의 숨결 그대로 관객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게서 문학을 배우는 고2 사내아이들 가운데도 반별로 두어 명씩 이 영화를 봤다는 녀석이 있다.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좀 요령부득의 표정을 짓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게 자기가 찾아낸 최선의 답인 것처럼.

 

“슬프던데요.”
“뭐가 슬펐어?”
“……그냥요.”
“그래……. 그런데 제목이 낯익지 않았니?”
“아, 맞아요. ‘공무도하가’ 생각이 났어요.”

 

아이들은 학년 초인 지난 3월에 고대 서정시가 ‘공무도하가’를 배웠다. 영화의 제목은 이 4언4구체 한역시의 첫 구와 같다. 물론 이 노래에서와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물’이 삶과 죽음의 경계이고, 그것이 ‘사랑’이고 ‘이별’이라는 점에서 둘은 같다. 불교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나누는 물, 기독교에서 말하는 요단강이라고 새겨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고 눈자위가 벌게진 관객들과 섞여 상영관을 나오면서 우리 내외는 오래 침묵했다. 이별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조만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지켜본 86분의 시간, 76년을 함께 한 부부가 나눈 만년, 그 사랑과 이별은 우리가 언젠가 맞닥뜨려야 할 미래의 어떤 시간인 것이다.

 

 

2015. 1.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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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큐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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