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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소와 아버지에게 바치는 <워낭소리>

by 낮달2018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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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다큐멘터리 영화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

▲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아내와 함께 대구 동성아트홀에서 상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왔다. 지난해 3월 <추격자>를 본 이후 거의 1년 만이다. 이 도시에는 다큐멘터리 상영관도 없고 괜찮은 예술영화 따위도 들어오지 않는다. 챙기지 않으면 못 보겠다 싶어서 서둘러 나는 난생처음으로 인터파크에서 표를 예매했고 부리나케 대구를 다녀온 것이다.

 

대충 위치가 거기쯤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거의 10년 만에 찾은 도심은 낯설었다. 영화관은 도심의 한 빌딩 3층이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아내는 ‘불나면 큰일 나겠다’고 중얼거렸다. 워낙 화제가 되어서인가, 200여 석의 자리가 관람객으로 꽉 찼다. 자리는 좁고 불편했지만,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낡고 오래된 상영관이어서였을까. 영화의 타이틀 백이 오르면서 등장하는 노인과 소, 달구지, 외양간 따위에서 나는 코끝에 익숙한 냄새를 느꼈다. 아주 습하면서도 그리 역하지 않은 그것은 두엄 냄새를 닮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시골 출신이든 아니든 땅의 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형적으로 가진 기억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는 ‘팔순 노인과 마흔 살 소의 아름다운 30년 동행, 그리고 그 이별 이야기’다. 보통 15~20년 정도의 수명인 소가 그 갑절을 산 것도 놀랍고, 그 말 못 하는 소와 노인이 수십 년을 나눠 온 교감과 우정은 더욱더 놀라웠다.

 

▲ 이충렬 감독

흔히 말없이 그리고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가리켜 ‘소같이 일한다’고 한다. 영화의 주인공 최원균 노인이 바로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노인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늙은 소를 앞세워 써레질을 하고, 엉금엉금 기면서 밭을 맨다.

 

노인은 소를 위해 벤 풀을 가득 실은 지게를 지고 두 개의 작대기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뒤뚱거리기도 하고 기우뚱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노인은 농약을 치지 않는다. 소에게 먹일, 오염되지 않은 풀을 얻기 위해서다. 그가 사료를 쓰지 않는 이유는 소에게는 풀과 짚이 훨씬 좋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소도 열심히 일한다. 단지 그에게는 ‘소처럼’이라는 비유가 필요하지 않을 뿐. 소는 주인을 닮았다. 늙어서 쇠약해진 육신, 힘겹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길도 닮았고, 묵묵히 주인의 분부를 따라 쉬지 않고 느릿느릿 일하는 것도 닮았다. 마치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 생원과 그의 나귀처럼.

 

그에게 있어 소는 아내 이삼순 할머니보다 늘 우선순위에 있다. 따라서 할아버지와 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할머니의 질투는 관객의 공감을 자아낸다. 힘들여 모내기하고 나오면 남편은 소 먹일 풀을 뜯는다. 이때 깔리는 할머니의 넋두리와 할아버지에 대한 지청구는 해설자가 따로 없는 이 영화의 해설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마누라는 죽으라고 모심고 나왔는데 보래, 소부터 먼저 챙기잖나…….”
“소는 부지런한 사람 잘 만나지 않았습니까? 내가 못 만났지…….”
“저놈의 소가 죽어야 끝이 나지, 언제 내 팔자가 피겠노.”
“아이고 누구는 팔자 잘 타고 나서, 싱싱한 영감 만나서 농약도 치는데…….”

 

소처럼 일하다 지쳐서 너부러지기도 하고 두통으로 ‘머리 아파’를 연발하는 바깥 노인에 비기면 안노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양반이다. 농약을 치지도, 사료를 먹이지도 않는 남편에게 농약을 치자고 조르지만, 그는 한 번도 남편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그래서 늘 불평을 입에 달고 있지만, 그것도 ‘많이 아파?’ 하면서 몸져누운 남편의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는 이 할머니의 사랑법의 하나일지 모른다.

 

‘인간시대’나 ‘인간극장’ 따위의 TV 다큐멘터리에 길든 사람들에겐 해설 없는 이 영화는 어쩐지 허전해 보인다. 대체로 해설이란 일정한 톤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화면에 부침하는 삶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투박한 경북 북부지방의 사투리 때문에 화면 하단 오른쪽에 배치한 궁서체 글꼴의 자막도 촌스럽다.

 

이 아름답고 절제된 영상의 78분짜리 HD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래서 거기 펼쳐지는 삶과 우정을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려놓는다. 최 노인은 거의 말수가 없고, 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마치 물처럼 고인 듯한 일상을 흔드는 건 배경으로 녹은 사계의 자연이고, 맺힌 데 없이 툭툭 던지는 할머니의 넋두리뿐이다.

 

사람과 소의 교유도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마흔 살, 이 늙은 수소를 팔려고 노인은 우시장에 나가지만, 500만 원 밑으로는 안 판다고 우기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냉소다. 고물값으로 쳐 주는 거라며 제시된 가격은 겨우 백만 원 어름이다. ‘영감님도 고물’이라던 할머니의 일갈은 소에게도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그가 고집한 500만 원이란 그가 기른 짐승의 값이 아니라, 자신의 변함없는 벗의 가치였으리라.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내한테는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소가 죽으면) 장사 치러 줘야지. 내가 상주질 할 건데…….”

 

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소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다. 소의 죽음 앞에 기꺼이 상복을 입겠다는 노인의 이야기는 물론, 헛말이 아니다. 수의사는 소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두 노인은 소의 죽음을 준비한다. 최 노인은 먼저 일생 소의 덜미에 매달려 있던 멍에를 벗기고, 코뚜레를 잘라준다.

 

그리고 두 내외는 말없이 소의 죽음을 기다린다. 외양간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소의 눈이 힘없이 감기고 고개는 허물어지듯 드리워졌다. 살아 있는 내내 소에게 기운 남편을 질투했던 할머니는 젖은 목소리로 소를 보낸다.

 

“고생 많이 했데이. 부디 좋은 데 가거라…….”

 

그러나 정작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카메라는 죽은 소를 싣고 떠나는 화물차와, 밭 귀퉁이를 파고 있는 굴착기, 구덩이 안에 부려진 소의 주검을 건조하게 따라간다. 잠시 후, 나지막한 봉분이 지어지고, 그 무덤의 양옆에 내외하듯,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노부부의 외로운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사선으로 그어지는 눈발…….

 

소의 죽음을 예견한 듯 쇠죽을 끓이는 노인의 외롭고 딱딱한 뒷모습과 우시장에서 돌아오는 황혼, 다리 위를 지나는 노인과 소의 실루엣을 바라볼 때부터 눈물샘이 자극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안으로만 응결되는 슬픔 같은 것,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눈가에 발그레한 꽃으로 피어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비탈진 밭 가에 선, 키 큰 나무 그늘 아래 앉은 노인의 모습을 멀찌감치 보여준다. 소가 끌었던 달구지 바퀴 자국이 소 발자국 양가에 선명하게 상기도 남았다. 밭 끄트머리 산기슭에 핀 진달래 붉은 꽃 빛이 처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유년의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했던 이 땅의 모든 소와 아버지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가슴 저린 헌사와 함께 엔드 크레디트가 반 넘어 떠오를 때까지 관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에 서리고 일어나는 유년의 기억과 슬픔을 못 다스려서일까. 영화관을 나와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워낭(마소의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 또는 마소의 귀에서 턱밑으로 단 방울) 소리가 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2009. 1.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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