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삶과 노래, 김운경 드라마의 파토스

by 낮달2018 2021. 6. 11.
728x90

극작가 김운경 드라마 이야기

▲ 대신 노래방에 들어가 노래하고 있는 양순 역의 오나라는 뮤지컬 배우 출신이다. ⓒ <JTBC>

은근히 기다렸다가 시청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남긴 여운이 꽤 오래 가슴에 남았다. 물론 얼마 전 소개한 김운경의 <유나의 거리>(JTBC)다. 작가 특유의 변죽만 울리며 지나가는 듯한 장면 가운데 몇 개의 컷이 남기는 쓸쓸한 여운이다.

 

‘에레나가 된 순희’, 김운경 드라마의 파토스

 

주인공 주변의, 이런저런 ‘지질하고 세속적이며, 더러는 교활하기도 한 갑남을녀’ 가운데 전직 형사 봉달호가 있다. ‘봉걸레’라는 별명이 암시하듯 이 전직 형사는 자신이 잡아들인 범인들의 뇌물도 마다치 않는 지저분한 인물이다. 그는 아내인 전직 소매치기 박양순과 함께 노래방을 운영하는데 ‘꽤 돈을 들인 시설인데도 홍보가 안 돼’ 장사가 시원찮다.

 

꾀죄죄하고 지질한 이 퇴출 형사 역을 맡은 배우는 안내상이다. 무표정하다기보다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 잔뜩 불안해 뵈는 그의 표정은 일품이다. 그는 노래방에서 일어난 도난사고 때문에 아내를 의심하다, 잔뜩 뿔이나 가출했던 아내를 달래는 과정에서 아내에게 쥐여 터지기도 하는 그런 인물이다.

 

지난 9일 방송에선 그의 노래방이 등장했다. 모처럼 손님이 들면서 도우미 셋을 불러달라고 하는데, 보도방에서 온 도우미는 한 명이 모자란 둘이다. 손님의 재촉이 이어지자, 달호는 양순을 불러 사정을 설명한다. 뒤늦게 남편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은 양순은 분노한다.

 

“당신, 나 이런 쪽으로 써먹으려고 노래방 하잔 거야?”

 

달호가 극구 손사래를 치면서 제안을 주워 담지만, 손님의 채근이 이어지는 걸 보고 양순은 결국 자진해 룸 안으로 들어간다. “별일 없을 거야. 점잖은 사람들이야.” 달호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도우미가 아닌 노래방 안주인 양순이 손님들과 어울려 부르는 노래가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 안다성이 1954년에 발표한 '에레나가 된 순희'는 한 시골 처녀의 인생 유전을 노래했다.

그날 밤 극장 앞에 그 역전 카바레에서

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희

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

실패 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라

 

노래는 안다성이 1954년에 발표한 ‘에레나가 된 순희’다. 시골 처녀 순희가 고향을 떠나 ‘에레나’가 된 인생 유전을 쓸쓸하고 묘사하고 있는 노래다. 정작 극중 내용과는 별로 겹칠 게 없는 이 노래는 그러나 양순의 매끄러운 노래와 예사롭지 않은 가사 때문에 매우 쓸쓸한 울림을 남긴다.

 

그 빛깔 드레스에 그 보석 귀걸이에다

목이 메어 항구에서 운다는 순희

시집간 열아홉 살 꿈을 꾸면서

노래하던 순희가 피난 왔던 순희가

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 순희 순희

오늘 밤도 파티에서 웃고 있더라

 

노래는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달호의 처진 어깨 위로, 밤거리를 홀로 걸어가고 있는 유나를 뒤쫓으며 에레나가 된 순희가 아니라 도우미가 된 양순의 실루엣 위로 쓸쓸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그저 그런 신파 같은 이 장면이 자아내는 페이소스(pathos)가 만만치 않다.

▲ 아내를 도우미 대신 룸에 들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달호의 모습은 묘한 파토스로 다가온다.

상식적으로야 제 아내를 도우미로 밀어 넣는 남편을 상상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소매치기와 부패로 잘린 전직 형사, 꽃뱀과 조폭 따위로 이루어진 이 드라마의 주변 인물들을 고려하면 이 장면을 구태여 윤리의 문제로 바라볼 일만은 아니다. 욕망과 이해를 위해서 도덕과 관습도 유예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유나의 거리>’인 것이다.

 

삶의 애환, 혹은 편린

 

도덕적으로 마땅히 분개하고 욕지거릴 내뱉어도 시원찮을 장면인데, 어쩐지 이 장면은 시청자의 마음을 싸아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끼니를 걱정하는 생존과 이어지는 삶의 장면도 아닌데도 이 내외가 받아들이고 연출하는 삶의 방식은 일종의 서글픔과 회한의 정서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 그게 작가 김운경의 솜씨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장면을 통해서 삶과 세상의 아주 미세한 결을 자연스럽게 노출하고, 그걸로 캐릭터와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애환(哀歡)’이라고 말하는 삶의 편린(片鱗)을 그는 과장하지 않는, 매우 정직한 방식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양순 역을 맡은 배우는 오나라다. 무척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배운데 나는 그가 썩 마음에 든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한 그녀의 이력은 만만하지 않다. 노래 솜씨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더니 뮤지컬 경력이 10년이 넘었다. 출연한 텔레비전 드라마(<달콤한 나의 도시(SBS)>, <역전의 여왕(MBC)>)와 영화(<김종욱 찾기>, <댄싱 퀸>)도 여러 편인데 불행히도 모두 내겐 만나지 못한 작품이다.

 

‘한번 안 한다고 하면 절대 하지 않는’ 강단으로 손을 씻은 전직 소매치기, 지질한 남편과 함께 엮어가는 그녀의 삶은 주인공들의 미래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게 될까. 유튜브에서 내려받은 안다성의 노래 ‘에레나가 된 순희’를 들으면서 저마다 다른 우리 삶의 곡절을 생각해 본다.

 

 

2014. 6. 11.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