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메밀꽃과 봉평, 그리고 이효석
삼수 끝에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게 되면서 평창은 뉴스의 중심지로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평창을 잘 모른다. 정작 대관령을 알아도, 거기 있다는 양떼목장 이야기는 들어도, 문수 신앙의 영산 오대산과 월정사, 상원사 동종 얘기는 나누면서도 거기가 ‘평창군’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대신 사람들은 이효석과 메밀꽃으로 평창을 기억해 낸다. 대관령을 낀 지역이 대관령면, 오대산국립공원과 유서 깊은 절집을 끼고 있는 동네가 진부면이라는 건 잘 모르지만 더러는 ‘봉평’과 ‘대화’를 마치 오래된 추억의 장소처럼 기억해 낸다.
‘메밀꽃 필 무렵’의 아주 익숙한 로맨스
물론 이는 전적으로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책에서 읽은 가산(可山) 이효석(1907~1942)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공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교육이 지닌 힘은 만만찮은 것이다. 메밀꽃이나 이효석을 이르면 아스라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건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한 장돌뱅이의 로맨스다. 달밤 물레방앗간에서 맺은 하룻밤 인연의 쓸쓸한 후일담인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아주 낯익은 사랑법을 환기해 주는 것이다.
평창군 봉평면은 가산의 소설 속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 인연을 맺었던 물레방앗간의 고장이다. 그러나 봉평은 이제 정작 평창과는 무관하게 작가 이효석과 메밀꽃의 명성에 힘입어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 물론 오늘의 봉평은 소설 속 허 생원의 말처럼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은 아니다. 메밀밭 대신 봉평에 흔한 것은 차라리 ‘메밀국수’를 파는 음식점이다.
봉평 일원에서 이효석 문화제가 열리면 인근 도로는 아예 주차장이 되고 만다는 걸 나는 2007년에 몸소 겪은 바 있다. 그때, 꾸역꾸역 밀려드는 차량의 행렬에 질려버린 우리는 봉평면 들머리에서 차를 돌렸다. 사람에 치여서 하는 구경이란 만만찮은 고역이기 때문이다. [관련 글 : 메밀꽃과 봉평, 그리고 이효석]
그 짧았던 봉평행의 기억은 ‘봉평카센터’나 ‘메밀꽃 공인중개사 사무소’ 따위의 상호들이 환기하는 남루한 근대화나 개발의 열기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내가 가르쳤던 이효석의 수필과 소설 따위에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 한 지식인 작가의 내면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4년, 지난 화요일에 영월을 거쳐 봉평에 들렀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지만 내 계산은 맞았다. 효석문화제는 사흘 후인 9일부터였으니 봉평 어귀에서 차를 돌려야 하는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로 내처 이효석 문학관으로 직행했는데 4년 전에 들른 봉평 거리가 어디쯤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았다.
이효석, 유럽을 동경한 댄디스트(dandiest)
이효석문학관은 봉평면 창동리의 나지막한 산 위에 세워져 있다. 입구 주차장 주변과 문학관으로 오르는 진입로는 온통 메밀밭이었다. 그건 아마 봉평이 이 고장 출신의 작가 이효석과 그의 문학을 기리는 방법일 것이었다. 설핏 기우는 햇살을 받아 메밀꽃은 하얗게 빛을 냈다.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자체에서 서둘러 세우는 모모한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거기가 거기다. 유명세를 치를 걸 미리 안 유명인사는 없다. 막상 기념관이나 전시관을 꾸미려고 하지만 마침맞은 유물이나 전시물이 태부족인 것이다. 흉상이나 동상을 세우고, 유고나 작품이 실린 도서류를 늘어놓고 그의 연보를 사진이나 그림을 곁들여 펼쳐놓는 것이다.
이효석문학관도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의 문예지나 단행본, 가산이 펴낸 저작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중심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장면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데와 유물을 곁들여 재현해 놓은 가산의 서재가 인상적이었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책상이 놓였다. 오른편엔 피아노, 왼편에는 커다란 뒤주 모양의 축음기가 열려 있다. 거기서 재생되고 있는 음악은 방 왼편 진열대 안에 전시된 음반일 것이다. 정면 뒤편 벽에는 은박으로 멋을 낸 ‘MERRY X-MAS!’라 쓴 글귀가 걸렸고, 그 아래는 잔뜩 멋을 낸 크리스마스트리다.
재현한 작가의 방은 그 왼편에 전시된 작가의 중절모와 함께 그의 삶과 문학적 특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 보였다. 문학관 곳곳에 내걸린 가산의 모습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댄디스트의 풍모다. 중절모를 젖혀 쓰고 굵고 둥근 검은 테 안경을 낀 가산은 고뇌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보다는 서구적 정서를 지향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모습이 더 짙다.
애당초 도시 유랑민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경향문학 ‘노령 근해’(1930)으로 출발한 가산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진영으로부터 ‘동반자 작가’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런 경향성을 버리고 향토적, 이국적, 성적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순수문학으로 전향하는 데 성공한다.
서구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 중심인 ‘이국적 정서’와 향토적 정서의 ‘동거’는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향토적 정서의 정본이라 할 ‘메밀꽃 필 무렵’(1936)을 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생활양식에 대한 경도(傾倒)를 드러내는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를 썼다.
반시대적 산문, ‘낙엽을 태우면서’
낙엽을 태우면서 거기서 ‘갓 볶아낸 커피 냄새’를 맡고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꼈던 가산에게는 지식인으로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대한 분노보다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더 원초적인 정서였던 것일까. 문학관에 재현해 놓은 가산의 방에는 그런 그의 삶과 정서적 지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 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에서 1930년대는 전시수탈체제였다. 일본어 강요, 창씨개명, 황민화 교육, 강제 인력 동원 정책 등 민족 말살 정책이 전 방위적으로 관철되던 시기였다는 얘기다. 그 시기 식민지 민중들의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뇌는 것은 사족이다.
1980년대 학교에서 이 반시대적 산문 ‘낙엽을 태우면서’를 가르치면서 우리는 얼마나 흥분했던가. 차라리 교과서를 태우자! 백화점에서 원두커피를 찧어 가지고 돌아오며, ‘크리스마스트리’와 ‘스키’ 계획을 부르대는 그의 글에 대한, 교사들의 적의와 혐오는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가와 문학, 혹은 문학과 당대의 삶은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게 옳지 않으냐는 일각의 항의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과거사의 진상 규명과 그 청산을 부정하는 논리와 닮았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를 바탕으로 한 현재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은 당대의 삶과 무관한 파한(破閑)의 예술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효석은 1942년, 뇌막염으로 36살을 열기로 요절했다. 다행히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그를 연구해온 문학평론가 신경득 교수의 평가는 다르다. 신 교수는 가산이 “일제시대 작가로서 친일성향을 띤 작품과 반일적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으나 이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작두날 위에서 뜀뛰기를 한 셈”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가산은 일본어로도 소설을 썼으며 ‘아자미의 장’이라는 소설에서 일제가 민족 말살의 수단으로 권유했던 이른바 ‘일선 통혼(通婚)’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신 교수는 가산의 ‘현실도피’와 관련해 “시대를 외면하고 성적 쾌락만을 위해 자연주의에 침몰할 때 작가는 민중을 우매화하여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였다는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관련 기사 보기]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잘 짜인 소설이다. 소설은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팔십 리 길을 걸어가는 장돌뱅이들의 노정과 소요시간을 그대로 소설의 진행 축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현실과 회상의 공간을 각각 낮과 밤으로 구조화하고 있으며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 세련된 언어와 시적 분위기 등에서 드문 미학적 완성을 보여준다.
장돌뱅이들의 삶, 그리고 거세된 현실
그러나 이 이 작품은 장돌뱅이들의 애환을 다루되, 정작 그들의 삶에서 현실은 거세되어 있다. 중심 배경인 메밀꽃은 장돌뱅이 세 사람의 달빛 속 동행을 보랏빛 몽환으로 감싸며, 현실과 추억의 경계를 흐려 버린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와 ‘푸르게 젖은 잎새’ 속에,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인 그 꽃은 고단한 장돌뱅이들의 삶의 신산(辛酸)과 식민지 시대 이 땅의 헐벗은 겨레의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문학관 한편에는 ‘메밀 전시관’이 있다. 역설적으로 문학관 안에서 가장 세밀한 정보가 담긴 곳이다. 작가의 대표작의 배경이면서 고향인 봉평에서 생산하는 주 곡물이니 그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주차장 뒤편에 메밀밭이 꽤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달빛 내리는 메밀밭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느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나귀의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리고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진 산길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지금은 작가 이효석과 그의 문학을 기리고 경관을 위해 메밀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효석 당대에 메밀밭은 그것 자체로 농민들의 생업이었을 것이다. 메밀은 5세기 무렵부터 재배되고 있는 구황작물이다. 메마른 땅에도 잘 적응하고 병충해도 적으며 서늘한 기후에 알맞으므로 우리나라에선 산간 지방에서 주로 재배한다. 봉평이 ‘메밀밭 천지’였다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우리 지방에서는 메밀이 슬픈 작물입니다. 비가 안 와서 모내기를 못 하면 조를 심었는데 그 뒤에 비가 너무 와서 조가 죽으면 다시 메밀을 심었지요. 메밀꽃이 온 들에 하얗게 핀, 어느 해인가 어른들의 한숨을 들은 기억이 있네요.”
의성 안계들에서 자란 선배는 ‘메밀’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 주었다. 소설에서의 메밀꽃은 달밤의 회상과 추억, 분위기를 조성하는 아름다운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농민들의 삶에서 메밀은 그런 한갓진 아름다움으로 포장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소설에 그려진 메밀꽃도, 70년 후 봉평에 펼쳐진 메밀꽃의 물결도 정작 ‘진짜 메밀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식민지 시대의 작가가 낭만적, 탐미적, 서정적, 토속적 정서를 시적으로 승화해 낸 작품으로 기억해 두기로 하자. 봉평 거리에 저마다 향토적인 맵시를 뽐내면서 늘어선 음식점은 이 산골 마을이 이제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는 방증이겠다.
세상의 변화를 어찌할 건가. 마치 ‘오브제’처럼 펼쳐진 메밀밭과 이효석 문학관, 거리에 처마를 맞대고 있는 음식점 사이로 부는 바람은 21세기의 그것이다. 좀 한적한 국숫집에서 메밀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우리는 땅거미가 깔리는 봉평을 떠났다.
2011. 9. 14. 낮달
**2019년 제21회 평창 효석 문화제는 9월 7일(토)부터 9월 15일(일)까지 열린다. 효석문화제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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