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그리고 2010 동강 국제사진제, ‘말없이 말하다’
작가 김승옥은 일찍이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을 통해서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규정한다. 1960년대의 서울이 그랬다면 2010년의 서울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서울에 집결한 것이 어찌 ‘욕망’뿐일까.
서울엔 그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온갖 장치들도 모여 있다. 서울에는 기름진 향락과 소비를 위해 뿌려대는 에너지와 서비스가 넘친다. 동시에 서울에는 그런 형식의 향락과 소비와는 다른 ‘문화적 인프라’도 넘친다.
김승옥식으로 말하면 ‘서울은 모든 문화의 집결지’이기도 하다. 서울은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정보·스포츠의 중심지면서 그것을 서울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기반을 갖춘 곳이다. 인구 1천만의 서울, 교통지옥,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 따위라면 나는 부럽지 않다.
‘서울’과 ‘지방’ 사이, 그리고 영월
그러나 서울에는 도심에도 녹지와 공원이 있고, 곳곳에 미술관과 박물관, 상설 극장과 연극이 있으며 잘 가꾸어진 숲이 있다. 예술영화를 즐길 수 있는 전용관도 있으며, 곳곳에 도서관과 책이 있다. 그래서 나는 서울을 ‘도시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기능하는 공간’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내가 서울을 부러워하는 지점은 정확히 그 어디쯤이다.
그러나 지방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문화와 무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도시인들은 상대적으로 주거비가 덜 든다거나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을 대단한 특권인 양 부러워하지만, 삶의 질이란 게 반드시 그런 것만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먹고 인근 대도시나 서울로 나들이를 나서지 않으면 영화, 연극 한 편을 보는 게 쉽지 않으니, 유명 전시회 따위는 언감생심이다. 이를 반드시 보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문제로 보는 건 온당치 않다. 일상 가운데 잠깐의 시간을 내는 것만으로도 문화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거기 접근하고자 하는 열성의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딸애는 어저께도 서울에 다녀왔다. 며칠간 집에 머물다 귀경하는 제 동생과 동행해 국립미술관과 예술의 전당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전시회를 다녀온 것이다. 아이들은 ‘아시아리얼리즘전’과 ‘세계보도사진전’을 보고 왔다고 했다.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문화를 즐기는 셈이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아이는 ‘고흐 전’과 ‘매그넘 전’, ‘로버트 카파 전’ 따위의 전시회를 작정하고 다녀오곤 했다. 정작 나는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가본 적이 없다. 아이와 동행하거나 식구들 모두 나들이하는 방식으로 다녀올 수도 있으련만 시간과 지방의 문화 인프라 타령만 하고 있으니 내겐 그걸 즐길 자격이 아무래도 모자란 듯싶기도 하다.
그런 내가 지난해에 이어 여름휴가에 ‘영월’을 찾은 것은 ‘2010 동강 국제사진제’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첫걸음에서 내 속셈은 사진제 구경과 함께 영월 주변의 만만찮은 관광지를 답사하는 일거양득을 은근히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월(寧越)은 강원도 내륙의 소도시다. 영월군 누리집에 따르면 올 6월 30일 현재 영월군의 인구는 4만을 겨우 넘었고, 군청이 있는 영월읍의 인구도 2만을 간신히 넘겼다. 이른바 ‘군세(郡勢)’가 보잘것없는 곳이다. 그런 영월에서 ‘사진 축제’가 베풀어진 지 9년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래서 ‘경이’다.
인구 2만의 소읍, 영월의 사진 축제
지난해 가족과 함께 영월을 찾을 때부터 나는 영월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군청에서 만난 이에게 ‘영월이 안동보다 더 마음에 든다’는 아부성 인사를 했는데,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인구 17만의 도시 안동의 문화에 대해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영월이 추구하는 문화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 방학도 짧고 바빴다. 주어진 시간은 마지막 일주일이 다였다. 아이들과 날짜를 맞추어 지난 13일 오전 우리는 제천을 거쳐 영월로 들어갔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우리가 영월에 닿을 때까지 비는 거의 오지 않았다.
우리는 읍내로 들자마자 영월교육청 앞의 학생체육관에 들렀다. ‘동강 사진상 수상자(강용석)전’과 ‘전쟁이 남기다 전’이 열리고 있는 공간이다. 당연히 입장료 따위는 없다. 입구의 수부를 지키던 젊은이들이 정중하게 팸플릿을 건네준다. 이런 호사(?)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전당이나 국립미술관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마룻바닥에 빨간색과 파란색 칠의 농구 코트가 그려져 있는 체육관을 칸막이로 구획하고 거기다 사진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장은 도시의 세련된 미술관 따위와 비길 수 없다. 그러나 ‘사진 촬영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은 도시의 엄격한 전시 공간과 달리 사람들은 좀 여유만만하게 전시작을 감상할 수 있다.
동강 사진상 수상 작가 강용석의 전시회는 ‘한국전쟁 기념비’, ‘선전촌 사진’, ‘민통선 풍경’, ‘매향리 풍경’, ‘동두천 기념사진’의 4가지 주제로 대별된다. 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는 ‘한국전쟁 이후 분단상황’이다. ‘동두천 기념사진’ 외에는 모두 음영이 뚜렷하지 않은 흑백사진이다.
‘한국전쟁 기념비’는 국내에 산재한 ‘6·25 기념비’를 찍은 것이고, ‘선전촌 사진’은 1973년 파주와 철원 두 곳에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 농촌의 전형적 모습인 것처럼 보이도록 꾸며 세운 마을, 선전촌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민통선과 매향리는 이 땅의 분단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소재다.
‘동강 사진상’ 수상자전과 ‘전쟁이 남기다’ 전
자극적인 색채 사진이나 선명한 흑백사진 따위에 길든 눈길에 강용석의 흑백사진은 밋밋하게만 느껴진다. 분단을 즐겨 다루는 다른 작가에 비기면 그의 사진은 즉물적 느낌과는 무관한, ‘나른하고 건조한’ 느낌만으로 다가온다. 거기서 분단의 비애나 전쟁의 공포 따위를 환기하는 것은 어렵다. ‘감정적 몰입 대신 이성적 질문이 이어지는 사진들’(한겨레 기사)이라는 평가는 그래서 적확해 보인다.
유일한 색채 사진인 ‘동두천 기념사진’은 거기 피사체로 등장하는 한국 여인과 검은 피부의 미군 병사 사이의 색채 대조만큼이나 강렬해 보인다. 미군 병사의 피부 빛깔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얗게 돋보이는 한국 여인의 얼굴빛에서 묻어나는 부조화는 그들이 짓고 있는 묘한 표정만큼이나 낯설어 뵌다.
바로 옆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이 남기다 전’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의 사진가들 작품을 통해서 ‘분단과 이념, 전쟁에 대한 재해석과 토론의 여지를 제공’하는 장이다. 주명덕의 ‘홀트씨 고아원’, 김녕만의 ‘판문점’, 신동필의 ‘비전향 장기수’, 주수용의 ‘반세기만의 귀향’, 노순택의 ‘분단의 향기’ 등이 익히 보아온 분단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라면, 최순호의 ‘탈북 한(恨)’과 채승우의 ‘휴전선’은 고착화된 분단의 그림자를 건조하게 보여주고 있다.
학생체육관에서 불과 2~3분 거리에 있는 동강사진박물관은 2002년부터 시작된 동강 사진축제가 자리 잡게 된 2005년도에 건립된 한국 최초인 동시에 일본의 도쿄 사진미술관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공립 사진박물관이다.
시골 군청소재지에 있는 박물관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박물관은 영월군청 앞 약 3천여 평 부지에 연면적 587평의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로 3개의 전시실과 야외 회랑, 다목적 강당을 갖추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사진작품은 모두 1500여 점에 이르고, 130여 점의 클래식 카메라도 갖추고 있다.
국제전 ‘내 영혼의 휴식’과 ‘지구촌의 여성전’
전시실에서는 ‘내 영혼의 휴식’이라는 제목의 동강 국제사진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엔 독일의 저명한 사진가 11명의 작품 100여 점이 관객들을 맞는다. 이들은 ‘인상 사진의 형식을 통하여 타자와의 만남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표현’(사진제 인사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작가들이 천착하고 있는 사실적 주제에 비기면 이들의 작품은 훨씬 더 관념적으로 대상에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 위주인 국제전의 작품들이 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반면, 박물관 입구와 주변의 야외 전시장에 걸린 ‘지구촌 여성전’은 훨씬 역동적이다.
여섯 명의 사진기자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한, 필리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남한의 저명 여성들의 모습 각각 담아낸다. 대형 규격의 색채 사진 속에 나타난 여성들의 삶은 그 배경의 강렬한 색조와 함께 그들의 고단한 삶을 웅변으로 말한다.
그 여자들의 사진 속에 담긴 서사는 사진의 배경이 되는 제삼세계 내지는 개발도상국의 온갖 모순과 슬픔을 정밀하게 드러내 준다. 고된 노동이 일상이 되어 버린 세계, 억압과 폭력, 남성들의 욕망 앞에 벌거벗은 여성의 모습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온당한가를 성찰하게 해준다.
‘초등학생 사진 일기 공모전’과 ‘강원도 사진가 초대전’, ‘영월군 사진가 초대전’을 우리는 생략했다. 다음 목적지인 모운동과 태백으로 갈 길이 멀었던 까닭이다. 단지 시간 탓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찾았던 전시회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잊을 뻔했다. 우리는 박물관 입장료로 1인당 천 원을 냈다. 세상에!
입장료 1천 원의 동강사진박물관
아내는 박물관 주변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흐뭇해했다. 박물관 뒤뜰의 소나무 사이로 영월읍이 건너다보였다. 단종의 슬픈 역사가 남은 영월, 역사에 대한 연민이 아스라하게 드리워진 이 유서 깊은 고장은 동강의 유장한 물결과 함께 이제 막 새롭게 ‘사진의 고장’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애당초 2002년에 시작된 ‘동강 사진축제’가 ‘동강 국제사진제’로 거듭난 것은 지난해부터다. 세계적인 국제사진제가 베풀어지는 곳은 뜻밖에 조그만 소도시가 많다. 프랑스의 아를르(Arles)나 일본 홋카이도의 히가시가와(東川)가 대표적인데 영월의 동강 국제사진제는 이들 도시를 모델로 삼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의 대표 사진제로 자리 잡은 동강 국제사진제가 세계적인 위상의 사진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국과 지속적 교류 전시가 필요하다. 동강 사진제가 미국의 게티 뮤지움(Getty Museum)과 일본의 ‘히가시가와 국제사진 페스티벌’ 측과 교류를 시작하여 향후 상호 교류 전시 등을 모색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도비와 군비 등 4억여 원으로 사진전을 꾸려가는 영월군은 사진전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이 사진전만 보고 영월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관광객들은 사진전과 함께 영월의 수려한 자연과 역사유적을 둘러보는 다목적의 여행을 즐길 것이라는 거다. 물론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는 내년에 다시 영월을 찾을 것이다. 그때는 올해보다 훨씬 더 알차게 ‘동강 국제사진제’가 베풀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조그만 시골 마을이 프랑스의 아를르나 일본의 히가시가와에 뒤지지 않는 세계적 사진제의 고장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제 도록 한 권을 사고 우리는 서둘러 김삿갓면 주문리의 모운동(募雲洞), 해발 1087m 망경대산의 7부 능선에 있는 ‘구름이 모이는 마을’을 향해 떠났다. 영월(寧越)은 ‘편히 넘는’ 곳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그 폐광 마을을 거쳐 우리는 태백으로 가는 수라리재를 아주 ‘편안하게 넘’을 수 있었다.
영월에서 돌아와 사진제 도록을 펼쳐놓고 지난 시간을 복기해 본다. 고정된 흑백의 이미지는 완강하게 침묵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건네는 말은 우리의 무심한 일상으로 내밀하게 닿아온다. 그렇다. 나는 2010 동강 국제사진제를 복기하면서 사진제의 주제가 왜 ‘말없이 말하다’인가를 뒤늦게 깨달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애당초 ‘동강 국제사진제’의 ‘국제전(9월 26일까지)’을 제외한 주요 전시는 8월 22일까지였다. 그러나 관람객들의 성원에 따라 동강사진박물관 측은 ‘거리 설치전’과 ‘지구촌의 여성전’의 기간을 12월 31일까지 연장하였다. 동강 사진상 수상 작가전과 ‘전쟁이 남기다 전’을 보려면 서둘러 영월로 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연장 전시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느긋하게 이 무더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겠다.
2010. 8.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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